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 - 1

Lesley 2012. 8. 6. 00:12


  지금으로부터 십수년 전에 수많은 시청자를 TV 앞에 붙들어놓으며 조연급이었던 배우 전광렬을 스타로 부상시킨 드라마가 한 편 있었으니, 바로 '허준' 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의원인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동의보감' 이라는 소설이 인기를 끌자, 그 소설을 각색해서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소설 동의보감' 이 인기를 끈 후에 '소설 목민심서', '소설 토정비결' 등 우리 역사 속 유명한 책 이름 앞에 '소설' 이라는 말을 붙여 그 책의 저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줄줄이 나오기도 했음. ^^;;)

 

  이 드라마에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인물이 한 명 등장하는데, 바로 '예진(배우 황수정이 연기했음.)' 이란 여자다.

  드라마에서 예진이 외지에 나가있는 허준에게 시 한 수를 적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예진은 허준을 좋아하지만 허준이 유부남이라서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내보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감정을 계속 억누르기는 힘들고...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시에 실어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때 예진이 편지에 쓴 시가 '이상은(李商隱)' 의 시다. (1980년대 강변가요제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담다디' 라는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우리나라의 여가수, 그 이상은이 절대 아님...! -.-;;)

 

  먼저 시를 쓴 이상은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문학적 재능은 있으나 박쥐 같은 삶을 산 인물' 이다. -.-;;

  이상은은 당나라 후기의 유명한 시인이다.  비록 어린 시절에 부친을 잃고 불우하게 자랐지만, 글재주가 무척 뛰어나 18세에 영호초라는 고위 관직자 눈에 띄어 그의 막료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이 영호초 아들의 도움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당나라 후기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서, 실력이 있어도 연줄이나 돈이 없으면 과거에 합격하기 힘들었음.)

  그러나 영호초가 세상을 뜬 후에는 영호초의 반대파인 왕무원의 수하가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왕무원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도움으로 출세했다.  이 일 때문에, 영호초가 속한 파벌과 왕무원이 속한 파벌 모두에게서 지조 없는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보호자 역할을 해주던 장인 왕무원이 세상을 뜨자, 그만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상은은 양쪽 파벌 모두에게 경원시당하며 궁핍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옛날 자신의 벼슬길을 터주었던 영호초의 아들에게 비굴하게 매달려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 일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비웃음을 사고 손가락질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無題(무제)



                                - 李商隱(이상은) –



八歲偸照鏡 長眉已能畵 (팔세투조경 장미이능화)

여덟 살에는 몰래 거울을 비춰보며, 긴 눈썹을 이미 그릴 줄 알았습니다.

 

十歲去踏靑 芙蓉作裙衩 (십세거답청 부용작군차)

열 살에는 들놀이 가면서, 연꽃을 치마에 수놓았습니다.

 

十二學彈箏 銀甲不曾卸 (십이학탄쟁 은갑부증사)

열두 살에는 쟁(거문고 비슷한 악기)를 배우기 위해, 은갑(쟁을 연주할 때 손가락에 끼는 도구)을 빼지 않았습니다.

 

十四藏六親 懸知猶未嫁 (십사장육친 현지유미가)

열네 살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못 보도록) 육친 뒤에 숨었는데, (내가)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먼발치에서라도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十五泣春風 背面鞦韆下 (십오읍춘풍 배면추천하)

열다섯 살에는 봄바람 속에서 울며, 고개를 돌려 그네에서 내려왔습니다..


 

 

  이 시는 여덟살짜리 소녀가 열다섯살의 처녀(그 시절 기준으로는 열다섯이면 이미 다 큰 처녀니까... ^^)로 성장하기까지의 심리변화가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시 속 화자는 여덟 살에서 열 살에 눈썹을 그리고 치마에 연꽃을 수놓는 등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열두 살이 되자, 은갑을 손가락에서 빼지 않을 정도로 쟁 연주에 빠지는 등 예술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열네 살이 되어서는 조혼이 당연시되던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혼인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에, 조만간 혼인하게 되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슬픔까지 겹쳐서, 그네를 타다가 봄바람이 공연히 서럽게 느껴져 울 정도가 된다.

     

  시 내용만 봐서는 지은이가 남자라고 믿기 힘들다.

  우선 시의 화자가 여자이기도 하고, 또 시의 내용이 워낙 감성적이라 도무지 남자가 쓴 시로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지은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시를 봤더라면, 분명히 어떤 여류시인이 썼다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시 속에 표현된 화자의 세세한 심리묘사로 보건데, 화자는 무척이나 감수성 풍부하고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소녀일 것만 같다.  그런 소녀를 창조해낸 인물이, 위에서 설명한 '비겁한 인생' 을 살았던 사람이라는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

  중국 쪽 사이트를 뒤져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이상은이 16살 때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한다.  16세까지만 해도 이런 해맑은 시를 지었던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가, 어쩌다가 이편 저편 왔다갔다 하는 변절자가 되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역시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 남긴 업적과 그 사람 자체의 됨됨이는 별개의 문제인가 보다. ^^



이상은(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 - 2(http://blog.daum.net/jha7791/15791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