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규보(李奎報) 시문(1) - 절화행(折花行)

Lesley 2012. 7. 18. 00:02

 

  이규보(李奎報)는 고려 중기 때의 관료이며 유명한 문인이다.

  시, 거문고, 술을 무척 즐겼다니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가 그냥 붙은 게 아닌 모양이다. ^^

   

  사실, 우리 역사 속 대단한 문인인 이규보는 나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내가 이규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달랑 두 가지였다.  고려시대 사람이라는 것과,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하여튼 국어 교과서에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說 : 이와 개에 대해 이야기하다)이라는 수필이 실려있었다는 것 뿐이다.

  슬견설은 지금 보면 훌륭한 작품이다.  오직 외적인 것을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는 오류를 쉽게 저지르는 우리들에게, 외면이 아닌 본질을 바라보라는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10대 때는 제목만 봐도 지겨운 작품이었다. ('이와 개를 이야기하다' 라니 얼마나 재미없고 멋없는 제목이란 말인가...! ㅠ.ㅠ)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이 슬견설 하나를 배움으로써, 이규보는 '교훈적이기는 하지만 정말 재미없는 글이나 쓰는 사람' 으로 내 머리 속에 단단히 새겨졌다.

 

  그런데 최근에 이규보의 시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슬견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절화행(折花行 : 꽃을 꺾다)이라는 제목의 이 시를 알게 된 계기는, 바로 지난 5월에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다. ^^  케이블TV에서 이 드라마의 첫회를 재방영해주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온갖 봄꽃이 피어난 궁궐에서 남녀 주인공이 한 행씩 번갈아가며 읊는 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때는 드라마 작가가 드라마를 위해 창작해 낸 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뜻밖에도 이규보의 시였다.  

 

 

 


折花行(절화행)

꽃을 꺾다

                                     - 李奎報(이규보) -

 

 

牡丹含露眞珠顆 (모란함로진주과) 

모란꽃은 이슬을 머금어 진주알 같은데

 

美人折得窓前過 (미인절득창전과) 

미인이 꺾어서 창 앞을 지나가네.


含笑問檀郞 (함소문단랑)

웃음을 머금고 낭군에게 묻기를

 

花强妾貌强 (화강첩모강)

“꽃이 예쁜가요, 제 용모가 예쁜가요?”


檀郞故相戱 (단랑고상희)

낭군이 일부러 놀리며


强道花枝好 (강도화지호)

꽃가지가 좋다고 단호히 말하네.


美人妬花勝 (미인투화승)

미인은 꽃이 더 낫다는 것을 질투하여


踏破花枝道 (답파화지도)

꽃가지를 밟아 망가뜨리며 말하네.


花若勝於妾 (화약승어첩)

“꽃이 저보다 더 낫다면


今宵花同宿 (금소화동숙)

오늘밤 꽃과 함께 주무세요”

 

 

 

  먼저번 역시 고려시대 시인 정포(鄭誧)의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를 소개하는 포스트에서도 이미 썼지만,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와 다르게 시 속에 나타나는 감정이나 행동이 참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던 것 같다.    ☞ 

정포(鄭誧)의 양주객관별정인(梁州客館別情人) (http://blog.daum.net/jha7791/15790875)

  만일 고리타분한 조선시대였다면, 일반인도 아니고 이규보 정도 되는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이 남녀간의 밀땅(!)을 그린 이런 시를 지은 것을 보고 난리났을 것이다.   조정은 물론이고, 유림 전체가 '오호, 통재라~~  저런 음탕한 자가 조정의 대신이라니, 장차 이 나라의 앞날을 어찌한단 말이가!' 식의 비분강개 하는 이들로 바글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어디 그 뿐일까...  이규보를 파직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새우라는 상소가 줄줄이 올라왔을 것이다. ^^;; 

 

  이 시는 그렇게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을법한 남녀의 밀땅을 세세하게 묘사했기에,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시를 해석하느라 여러 사람의 블로그나 게시판을 참조했는데, 그 중 이 시의 뒷부분에 대해 재미있는 상상을 덧붙인 것이 하나 눈에 띄었다.  아내가 남편의 농담에 토라져서 "꽃이 저보다 더 좋으면 오늘밤은 꽃하고 같이 주무세요." 하고 치맛자락 휘날리며 가버리면, 정말로 화가 난 아내의 태도에 남편이 당황해서 "어, 이게 아닌데..." 할 것이라는 재미있는 상상이다. ^^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남편은 능글맞게 웃으며 멀어져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고, '일부러 토라진 척 했던' 아내 쪽에서는 '아니, 이쯤 되면 얼른 와서 붙잡고 달래야 하는 거 아냐? 왜 그냥 있는거지?' 하며 당황해 할 것 같다.  어떻게 된 건가 더 이상 궁금함을 못 참고 뒤돌아보면, 남편은 보란 듯이 짓밟힌 꽃가지를 집어들어 어루만지며 한숨까지 내쉬며 '미모가 죄구나, 자기보다 예쁘다고 이렇게 짓밟다니... 그래도 네가 더 예쁜 건 분명한 사실이지.' 하고 다 들리게 혼잣말 하며 아내를 약올리는 거다. ^^ 

  '옥탑방 왕세자' 의 작가가 이 시를 드라마 내용에 집어넣은 것은, 그저 부용(여주인공 한지민의 조선시대 역할)의 학식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만이 아니라, 먼 훗날 박하로 환생했을 때 이각(박유천)과 계속 밀땅을 벌이게 된다는 복선으로서의 역할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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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시문(3) - 영정중월(詠井中月)(http://blog.daum.net/jha7791/15790912)

이규보(李奎報) 시문(4) - 슬견설(蝨犬說)(http://blog.daum.net/jha7791/1579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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