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타이타닉' 과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의 불법(!)관람에 얽힌 추억

Lesley 2012. 5. 31. 00:11

 

  이번에는 영화 '타이타닉(Titanic)' 과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케(원령공주, もののけ姬 Princess Mononoke)' 대해 써볼까 한다.

  다만, 이번 포스트는 이 두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라, 두 작품 관람에 얽힌 나의 추억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

 

 

 

 

 

◎ 타이타닉

 

 1. 이미 10번도 더 본, 그러나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보게 된 영화 '타이타닉'

 

  미국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를 한국 젊은 여인네들의 우상으로 만들었던 '타이타닉' 을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마 4월 중순쯤이었던 것 같다.

  개봉한지 10년도 더 된 영화가 뜬금없이 재개봉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알고보니 올해가 타이타닉호 침몰 100주년 되는 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사건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옛날 필름을 가지고 1년 동안이나 새로 작업해서 3D 영화로 새로 내놓은 것이다. 

 

  만일 내 돈 내고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다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를 대학시절 영화제에서 처음 본 것을 시작으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린 비디오로 또 보고, 나중에 시대가 바뀌어서는 파일로 구해서 다시 보고, 한 동안은 무슨 명절이나 연말에 특선영화로 TV에서 해주는 것으로도 몇 번씩 봤으니까...

  하지만 동생이 어디서 얻은 대한극장 초대권을 줘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흐흐흐... 공짜다~~ ^^)

 

  그러나 무료관람이라고는 해도, 만일 이 영화를 과거에 영화관에서 봤더라면,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를 다시 보겠다고 영화관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 썼다싶이, 난 이 영화를 대학시절에 '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개최하는 영화제' 를 통해 '처음으로' 봤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관에서 개봉할 때는 사정이 있어 못 보고, 그 후에 학교 영화제에서 본 모양이군.' 하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폭발적인 인기 누리며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 학교 영화제에서 본 것이다...!  지금 같으면 영화관에서 아직 개봉 중인 영화의 필름 또는 파일을 구해다가 학교 영화제에서 상영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저작권의 개념이 희박했던 1990년대 중반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  

  명색이 영화제라고 대형 스크린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면에서 정식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못 한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이왕 무료로 영화 볼 기회 생겼겠다, 또 3D용으로 손질했다니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이미 10번도 넘게 본 이 영화를 대한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

 

 

2. 대학 영화제에서 본 타이타닉

 

  사실, 하마터면 영화제에서 이 영화 상영이 불발될 뻔했다.

  당시 엄청난 인기 누리던 영화를 단돈 1,000원만 내면 볼 수 있다고 교정 여기저기에 포스터 붙여가며 광고한 덕에, 우리 학교 학생들은 물론이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원정(!)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너무 요란하게 광고했는지, 그만 영화 배급사에서도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배급사에서는 상영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상영 당일까지도 상영을 하네 못 하네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저작권을 무시하는 게 너무 당연시되던 사회적 분위기에, 비록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상영주체가 전문적인 상업집단이 아닌 영화 동아리 학생들이라는 점이 정상참작(?)이 되어서, 배급사에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

 

  나는 이 영화 시작하기 3시간(!) 전부터 친구와 함께 상영장소인 소강당에 가서 줄을 섰다.    

  예약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무조건 현장에서 선착순 300명까지만 받는다고 했는데, 이 영화를 보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각각 두번째와 세번째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런 정성으로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노벨상도 받았을 것임. ^^;;)

  시설도 훨씬 좋고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따로 있었지만, 그 곳은 무슨 학술대회였는지 무엇인지를 한다고 해서 상영장소로 쓸 수가 없었다.  사실 소강당의 좌석은 300개에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타이타닉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영화제 주최측에서 다소 무리해가며 사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처럼 일찌감치 줄을 선 사람은 다 낡아빠진 의자라도 하나씩 차지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입장자 수십명은 좌석 사이 통로에 앉아야 했다.  그래도 타이타닉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 음향효과라든지 좌석의 편의성이라든지 모두 안 좋은 상황에서 봤건만, 지금도 이 영화를 학교 안 소강당에서 봐서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거의 100% 대학생들이다 보니, 또래집단끼리만 통하는 공감대 어린 반응이 영화 보는 재미를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만일 나 혼자 또는 연령대가 제각각인 사람들끼리 봤더라면 그냥 넘어갔을 장면에서도, 학생 관객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며, 관람 분위기를 하나의 축제 분위기로 바꾸어버렸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대한극장에서 다시 볼 때에는, 참...  재개봉한 영화라 그런지 관람객 숫자도 무척 적은데다가, 그나마 어디 교회 같은 곳에서 단체관람 오신 듯한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라, 정말 밋밋한 기분으로 영화를 봤다.  어떤 장면에서도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시던 할머니들...!  관객이 하도 적어서 지정된 좌석은 무시하고 맨 뒷줄 가운데에 앉았었는데, 그런 내가 어떤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중간줄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앉으신 할머니들이 한꺼번에 뒤돌아보시는 통에 정말 무안했다. -.-;;  

 

 

 

◎ 모노노케 히케(원령공주)

 

 

 1. '모노노케 히메' 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지금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전설로 남아있는 '모노노케 히메' 역시, 대학시절 학교 영화제에서 감상했다.

  타이타닉과 마찬가지로, 일본 현지에서 한창 상영 중인 것을 해적판 VCD로 학교에서 상영한 것이다. (이 글에서 벌써 세 번째 쓰는 말이지만, 1990년대 한국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음.  그런 것 신경쓰는 사람은 산삼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였음. ^^;;)  그래도 이 애니메이션은 영상시설이 잘 갖춰지고 의자도 제법 괜찮은 대강당에서 봤기 때문에, 타이타닉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에서 편히 볼 수 있었다.

 

  모노노케 히메 상영이나 타이타닉 상영이나 저작권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불법상영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두 불법상영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타이타닉은 당시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상영중인데도, 영화 동아리에서 불법상영한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관객들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합법관람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불법관람을 한 것이다.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관람' 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은 사람은 무조건 불법관람을 해야만 했다.

  이 애니메이션이 일본에서 개봉되고 내가 한국에서 불법관람했던 1997년 당시, 한국에서는 모든 일본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수입과 상영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일본 영상물의 홍수 속에서 자란 지금의 대학생 이하 파릇파릇한 세대들이 들으면 황당한 일이겠지만,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1998년 가을까지 일본의 각종 영상물은 계속 수입 금지였다.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겪었다는 역사적 상처로 인한 반감에, 당시만해도 우리보다 훨씬 우월했던 일본의 영상문화가 우리 영상업계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까지 더 해진 탓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진 다음 해인 1999년만 해도, 장동건 주연의 '청춘' 이라는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의 내용은 물론이고 주연배우의 옷, 머리 모양, 귀걸이까지 그대로 베꼈다가 일이 시끄러워지자 방영 2주만인지 3주만인지 후다닥 종영해버린 사례가 있을 정도로, 일본 영상물이 우월함을 자랑하던 시절이었으니... -.-;;)  하지만 북한처럼 원칙적으로 왕래가 불가능한 곳도 아니요, 지리적으로 바로 옆에 있는 나라인데, 어디 그게 막는다고 막아지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통로가 막혀있을 뿐,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어둠의 통로' 를 통해서 일본 영화고 일본 애니메이션이고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어차피 일본 영상물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인데, 차라리 합법화하여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구분하여 정부에서 통제 및 관리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라는 여론이 슬슬 일어났다.

  즉, 음지의 일본 영상물을 양지로 끌어내어, 작품의 유해성 여부에 따라 선별적으로 합법화하자는 것이었다.  자기네 영상물이 한국에서 버젓이 불법유통 되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와 업계에서도 계속 시장개방 압력을 넣기도 했고, 미국이나 EU 등지에서 우리나라를 저작권 침해 국가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찮았다.  우선, 일본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훨씬 떨어졌던 우리 영화업계와 방송업계가 모조리 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36년이나 우리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일본놈들의 영상물을 합법화하자니, 너희가 친일파냐 아니면 미친거냐?' 는 식의 뿌리 깊은 반일사상도 한몫 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만 해도 3.1절이나 광복절에 서울 시내 돌아다니다가 한국 대학생들에게 얻어맞은 일본인 이야기가 신문에 실릴 정도였으니... ^^;;)

 

  그러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야당이 대권을 잡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들어선 김대중 정부가 '개방'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몇 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일본 영상물을 들이기로 하고(덕분에 맨 처음 들어온 일본영화는 죄다 하품만 씹어 삼키게 되는 예술영화였음. ^^;;), 1998년 10월에 역사적(?)인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졌다.  2001년에는 제4차 개방을 통해서 음반, 애니메이션, TV용 오락방송 등을 합법화하기로 했는데, 마침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가 터지면서 그 후로 몇 년 동안 개방정책이 중단되었다. (즉, 일본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상영될 수 없었음.)

  그런데 공교롭게 2002년 월드컵이 한일 공동 개최였기 때문에, 월드컵 공식음반에 일본 노래가 안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월드컵 공식음반에 넣을 일본 노래 3곡은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만 특별히(!) 허용해주는 좀 우스운 일도 있었다. ^^;;

  지금이야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금지된 것이 너무나도 당연시 되던 분위기에서 자란 나는, 대학시절 일본 영화 '러브레터' 와 '역무원' 을 합.법.적.으.로. 영화관에서 보면서 느꼈던 '설레임+어색함+약간의 죄책감' 등 아주 복잡미묘했던 그 감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  

 

 

 2. 세 번을 봤지만, 단 한번도 원음으로 못 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

 

  자, 다시 학교 대강당에서 모노노케 히메를 관람하던 1997년으로 돌아가서...

 

  당시 참 우스웠던 일이 이 영화를 중국어 더빙판으로 봤다는 점이다...! ^^;;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때 상영한 해적판 VCD가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중국은 해적판 자료의 제작과 유통에 있어서 우리보다 몇 수 위다.  그 VCD는 중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중국어과 학생이 공수해온 것이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이 막 시작하고 '아주 먼 옛날에...' 하면서 중국어 나래이션이 깔리자, 중국어 더빙판이라는 것을 미리 경고(?)받았음에도 모두들 까르르 웃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도 나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가끔 보는 사람은 그러려니 하며 봤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을 두루 섭렵한 관객들은 상영하는 내내 귀에 선 중국어가 무척이나 거슬렸던 모양이다.  관람이 끝나고 나가면서, 다른 학생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국어로 보려니, 도무지 몰입이 안 되더라.' 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

 

  그런데 모노노케 히메에 얽힌 이 황당한 언어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동료에게서 받은 모노노케 히메 파일은 영어 더빙판이었다. -.-;;  고대 일본이 배경인 애니메이션에서 쏼라쏼라 하는 서양언어가 나오니, 차라리 중국어판이 낫겠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 또 다시 모노노케 히메를 볼 일이 있었다.  중국 하얼빈에서 어학연수를 받을 때 구입한 모노노케 히메의 DVD를, 정작 하얼빈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 번도 못 보다가 귀국하고 한참 지난 올해 봄에야 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얼빈에서 구입한 DVD도 중국어판인데, 그나마 대학 때 처음 본 것은 보통화(중국 표준어)판이기나 했지, 이것은 광동화(홍콩 및 중국 광동성의 방언, 보통화와 완전히 달라서 거의 안 통함.)판이다...! -0-;;  귀로는 콧소리 잔뜩 섞인 광동어 들으면서 눈으로는 영어 자막 훑는 상황이라니,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지금까지 모노노케 히메를 3번을 봤는데, 3번 모두 원음인 일본어 녹음판이 아닌 각기 다른 언어 버전이라니...

  이런 황당한 경우 겪은 사람도 드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