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명장 관우 (關雲長 / The Lost Bladesman)

Lesley 2012. 5. 15. 00:34

 

  두어달 전에 '삼국지 : 명장 관우(關雲長, The Lost Bladesman)' 라는 2011년 중국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중국에서 '적벽대전 : 거대한 전쟁의 시작' ,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 '삼국지 : 용의부활' 등 삼국지 관련 시리즈(?)가 줄줄이 나왔는데, 이 영화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게 아닌가 싶다.

  적벽대전 1, 2편은 배우들 연기는 훌륭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이 과도하고 유치할 정도의 판타지가 뒤범벅 된 내용이 별로라는 평이 많았다.  (중국인들조차 '이건 완전히 외국인들 보라고 만든 판타지 아니냐' 라고 불평할 정도였으니... ^^;;)  그리고 '삼국지 : 용의 부활' 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기회가 닿아 봤는데, 졸작이었다. ㅠ.ㅠ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안 하고 '볼 기회 생겼으니 본다' 는 식으로 봤는데, 뜻밖에도 괜찮은 구석이 있는 영화였다.

 

 

'관운장(關雲長)' 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은 '관우' 와 '조조' 두 사람임을 명확히 드러내는 포스터.

 

 

  너무 유명한 원작, 새로운 해석... 영화에게 득인가, 실인가? 

 

  누군가 이 영화가 볼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중국영화 '검우강호' 를 볼 때와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껴야 했다.  ☞ 검우강호(劍雨江湖) (http://blog.daum.net/jha7791/15790823)

  즉, 이 '삼국지 : 명장 관우' 는 좋은 영화가 될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만, 그 조건들을 제대로 모아 섞지 못 해서, 영화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그래서 졸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걸작도 아닌, 그냥 그런 작품이 되어 버린 영화다.

  하긴 어떻게 생각하면, 삼국지처럼 널리 알려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본전치기 정도 밖에 안 되는 숙명(?)을 안고 있기는 하다.  서양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국어권 지역(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폴)과 한국, 일본 등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의 줄거리나 등장인물에 대해 대충이라도 알고 있다.  그러니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면 '너무 뻔하다, 지루하다.' 는 불평이 나올테고, 그렇다고 나름 상상력을 동원해서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는 영화를 만들면 '이게 무슨 삼국지냐? 원작에서는 분명히 이렇지 않았다.' 는 불만이 나올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히 역사소설이며 전쟁소설인 삼국지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관우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내세웠지만, 관우가 세운 혁혁한 무공이나 전투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관우를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조조의 설득작업과 계획(사실, 그냥 계획이라기보다는 음모에 가까운... ^^;;), 조조에 대해 어느 정도 끌리고 있지만 유비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관우의 우직함과 충성이 주요 소재다.  즉, 전쟁영화라는 표피를 두르고 있지만, 사실은 등장인물 사이의 밀고 당김을 묘사하는 심리 드라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이기에, 원작소설을 잘 묘사하는 영화를 기대하고 봤던 사람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관우가 조조의 군영을 떠나며 겪게 되는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 : 다섯 개의 관문을 돌파하며 여섯 명의 장수를 죽이다) 사건은 삼국지 팬들에게는 적벽대전 만큼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 장면에 대해, 너무 허술하다든지 또는 관우의 손에 죽는 조조 쪽 장수들의 무술이 언제부터 관우에 필적할 정도로 뛰어나게 되었냐는 등의 불평 어린 반응이 줄줄이 나왔다. ^^;; 

 

 

 

  조조는 당대의 영웅인가, 교활한 세도가인가?   

 

  그리고 이 영화를 더 잘 감상하려면, 요즘 중국 영상업계에 유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조라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을 한 번 짚어보는 것이 좋다. 

 

  내가 아직 중국에 머물고 있던 2010년에 중국 TV에서 삼국지를 장편 드라마로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중국에서 그 해 상반기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우리나라의 서울 드라마 어워즈 등 여러 나라의 드라마 관련 시상식에서 이런저런 상을 받기도 한 수작이다.  하지만 내 중국친구의 이야기로는, 인기가 엄청나게 높기도 했지만 동시에 논란도 굉장했던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존의 삼국지 관련 영화나 드라마가 삼국연의(三國演義, 우리나라에서 흔히 삼국지라고 부르는 소설이 바로 이것임.)를 토대로 하는데 비해, 이 드라마는 삼국지(三國志, 서진(西晉)의 진수(陳壽)라는 인물이 쓴 역사책으로 중국에서 정사(正史)로 인정되고 있음.)에 의거해서 인물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에 대해 평가는 후해졌고, 반대로 유비 및 그 의형제들에 대한 평가는 박해졌다.

  얼핏 생각하면, 소설보다는 사서의 내용을 따르는 드라마가 사실에 보다 충실한 작품이니, 시청자들의 반응도 더 좋을 것만 같다.  하지만 '유비 삼형제 = 정의와 의리의 화신, 조조 = 교활한 간신' 이라는 공식에 완전히 익숙해져버린 대중에게, 이런 역사 기록에 충실한 인물해석은 오히려 파격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덕분에 드라마 인기가 높은 것은 높은 것이고, 인터넷에서는 드라마의 인물해석에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가 허구헌날 댓글로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방송국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 (이 드라마는 올해 우리나라 KBS에서도 방영했는데, 시청자 게시판을 훑어보니 우리나라 삼국지팬들도 관심있게 시청했던 듯함.) 

 

  이 영화 또한 조조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조류(!)를 타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 속의 조조는 원작에서의 교활함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원작보다 인간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고 권력과 계략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기 보다는 말로 설득시켜 진정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물론 그 말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논리인지, 궤변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지만... ^^)

  관우 같은 강직한 성격의 사람은 세상사를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누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조조가 누가봐도 분명한 악당이며 간신이었다면, 관우 입장에서는 자신이 취해야 할 입장이 명확해져서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조조를 그저 경멸하며 외면하거나, 또는 정면돌파의 방법으로 조조와 사생결단을 내거나 하면 되었을테니까...

  하지만 영화 속 조조란 인물은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사는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성과 의리에 목숨 거는 도덕군자도 아니다.  어찌보면 유비처럼 이상은 높지만 현실적인 힘이 없는 인물보다 더 현실적으로 난세의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인물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자기의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연극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곧고 우직하기만 할 뿐 정치와 권력의 복잡미묘함에는 서툰 관우는 더 헷갈리고 갈등을 하게 된다.

 

 

 

  이 영화의 감점 요소 - 변화무쌍(?)한 황제의 캐릭터, 뜬금없는 여인

 

  이렇게 꽤 괜찮은 주제를 잡은 영화이건만, 단순한 옥의 티를 넘어서는 감점 요소들이 있다.

 

  우선 조조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황제(후한의 헌제)를 보자.

  처음에는 이 영화 속에서 뭔가 한 몫을 할 것만 같았다.  영화 초반에 이 황제는 아무 생각도 줏대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조조라는 인물의 공적과 과오에 대해 냉철히 파악하며 은인자중하고 때를 기다리는 인물로 나온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그런 황제의 캐릭터가 아무런 개연성 없이 완전히 돌변해서 정말 놀랐다.  갑자기 관우가 사랑하는 여자를 왜 죽인거냐?  영화 초반부에 보였던 그 범상치 않은 풍모는 어디에 내다던지고, 갑자기 아무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

 

  그리고 관우의 짝사랑을 받다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도 그렇다.

  유비의 첩으로서 관우가 조조의 편이 될까봐 걱정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여자는 분명히 관우가 예전부터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 때문에라도 관우가 조조에게 투항 못 하리라는 것을 알텐데, 왜 갑자기 관우를 죽이려 드는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여자가 살인을 불사해가면서까지 유비에게 충실한 것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만일 유비와 알콜달콩 신혼생활 즐기는 장면이라도 나왔더라면, 또는 유비가 반드시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충성심 품을만한 계기가 있었더라면, 이 여자의 캐릭터가 그렇게 붕 뜨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왜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유비를 위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강문(姜文) - 새로운 조조를 창조하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서 조조 역할을 맡은 이는 강문(姜文)이라는 배우(위의 포스터 사진의 오른쪽 사람) 하나 때문에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 배우를 송경령, 송미령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송가황조' 에서 처음 봤다.  ☞ 송가황조(宋家皇朝) - 송씨 가문의 세 자매 (上) (http://blog.daum.net/jha7791/14983291)  '송가황조' 속에서 강문은, 세 딸을 모두 여걸로 키워낸 아버지이고, 그 시절 중국에서는 무척 드문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 사상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지식인이며, 손문의 혁명의 지지자인 송기수(일명 찰리 송)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진송' 에서는 진시황 역을 맡아, 막 통일된 국가를 반석 위에 올린다는 명분으로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어린 시절 친구와 자신의 딸에 대한 회한을 느끼는 연기를 인상적으로 펼쳤다.

 

  이 영화 속에서 강문은 적당한 현실감각, 적당한 교활함, 적당한 인간적 매력을 동시에 지닌 조조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강문의 조조는 용인술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 부하와 백성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야 할 때와 엄하고 냉정히 대해야 할 때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이 고결한 군자가 아니라고 인정할 정도로 정치적 야망이 큰 인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부하들에게도 그들의 몫을 챙겨줄 줄 아는 공정함(또는 교활함)도 갖고 있다.

  조조가 관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쓸 때 부하 장수들은 '관우는 적인데, 적을 너무 믿는 것 아니냐' 며 불안해한다.  그 때 조조는 '지금 여기에 한 때 적이 아니었던 사람이 있냐?' 라고 태연히 되받아친다.  그만큼 과거에는 조조의 적이었다가 조조의 편으로 돌아선 이들이 많다는 뜻인데, 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줄 아는 것은 분명 대단한 능력이다.

 

  특히 영화 맨 마지막에서 관우의 시신을 유비에게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조조가 하는 말과 행동은, 이 강문이라는 배우가 아니면 누구도 소화 못 할 것 같다.

  떠나가는 관우의 시신을 바라보며, 조조는 관우와 조조 두 사람 모두와 인연이 있는 승려에게 말한다.  조조는 늑대로 가득찬 이 세상에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쓴 양이었다고...  따지고 보면, 관우의 죽음에는 손권 뿐 아니라 유비도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손권이 관우를 죽인 일 때문에, 강력한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 유비와 손권이 맺었던 동맹은 결렬되고 두 세력 사이에 전쟁이 날 것이라고...

  승려가 '관우는 죽어서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군요.' 라고 말하자, 조조는 그 때까지 관우를 생각하는 슬픔이 가득했던 표정을 모략가다운 냉철하고 교활한 표정으로 확 바꾸며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양이라고 한 적이 없소.' 라고...  엄청난 권력을 갖고도 그런 이들이라면 으레 취하는 위선을 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감탄해야 하는 건지, 자신이 인간적으로 끌렸던 이에 대한 애도의 마음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계산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이 영화에 대해 한 줄로 설명하자면...

 

  새로운 조조를 보고 싶은 관객에게는 추천해주고 싶고, 소설 삼국지에 충실한 내용의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에게는 안 보는 게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