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인지구(胭脂扣/Rouge) - 장국영과 매염방을 추억하며

Lesley 2012. 2. 6. 00:02

 

  장국영(張國榮)과 매염방(梅艷芳)은 모두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홍콩의 영화배우 겸 가수다.

 

  남자답게 씩씩하고 듬직하다는 느낌보다는 상처입기 쉬운 여린 사람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주던 장국영과, 언제나 화려하고 활발한 모습으로 주위에 많은 이들을 몰고 다녔던 매염방...

  얼핏 보면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이라 소원한 사이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무척 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여러 번 같은 영화에 출연했고, 서로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하여 상대방을 빛내주기도 했으며, 사석에서도 자주 어울렸다.  장국영이 2003년 만우절에 마치 만우절 거짓말처럼 자살을 하자, 매염방은 장국영 장례식에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결국 매염방마저 장국영을 뒤따르듯이, 그 해 말에 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쩌면 항상 파티를 즐기며 사람들을 몰고다녔던 매염방의 그 모습도, 장국영이 생전에 느꼈던 깊은 외로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국영이 인터뷰를 하면서, 매염방에 대해 '여동생 같은 친구' 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매염방과 함께 있을 때는 매염방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신경을 써야지, 안 그러면 매염방이 토라진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고독감을 못 이겨서 항상 사람들 틈에 끼여있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매염방이 그런 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매영방이 장국영과 20여년의 끈끈한 우정을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장국영과 매염방이 함께 찍은 영화를 두 편을 봤는데, 한 편은 제목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냥 그런 영화였지만, '인지구(胭脂扣)' 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장국영에 미쳤던 대학 시절에 이 영화를 비디오로 몇 번이나 봤는데, 볼 때마다 깊은 여운이 남는 영화다.

  비록 1987년도 영화라 지금 보면 영상이 거칠다 못 해 조악하기까지 하고 음향도 고르지 못 하지만, 사랑의 맹목성과 덧없음을 이 영화만큼 깊이 있게 표현한 영화가 과연 또 있을까 싶다.  남녀 주연배우의 연기력이 훌륭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감독이 바로 관금붕(關錦鵬)이라는 점 때문에 이런 수작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관금붕 감독은 장만옥(張曼玉) 주연의 영화 '완령옥(阮玲玉)' 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 감독은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다.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데다가, 청소년기에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성정체성 문제로 큰 고민을 하며 성장해야 했다.  이런 내적인 고민과, 자신처럼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 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갖는 따뜻하고 연민 어린 시선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중년의 남자 감독(지금은 이미 50대 중반)' 이 만든 영화라기에는 상당히 의외라는 느낌이 드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관금붕 감독의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이 인지구 말고도 '란위(藍宇)' 와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Red Rose White Rose)' 가 있다.

  두 작품 모두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고 잔잔한 전개방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깊은 감정의 교류와 충돌을 그려낸다.  그리고 '란위' 는 동성애를,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잣대와 이기심을 소재로 삼아, 사회의 일반규범에서 벗어난 자들이 일반인들에게 소외되는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는 내가 몸을 비비 꼬면서 보다가 중간에 잠깐 잠들기도 했을 정도로 지루하긴 했지만, 하여튼 작품성과 주제는 훌륭했음. ㅠ.ㅠ)

 

 

 

  자, 서론이 너무 길었고, 이제부터 영화 인지구에 대해 본격적으로 쓰자면... ^^;;

 

 

  현대적인 것과 봉건적인 것이 뒤섞여 있던 1934년의 홍콩

 

  홍콩의 명문가인 진씨 집안의 외아들인 '진방(장국영)' 은 기루에 갔다가 유명한 기생 '여화(매염방)' 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진방딴에는 나름 격조 있는 태도로 접근해보지만, 여화는 당대 최고의 기생답게 도도하면서도 노련하게 진방을 물리친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상당히 우아하고 느긋한 태도가 몸에 배어있는 이 도련님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젊은이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접근할 때 쓸 법한 폭죽 터뜨리기, 고급 침대를 선물로 안기기 등등... 여화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이벤트(!)를 차근차근 펼친다.  몇 번 튕기던 여화도, 결국에는 이 낭만적인 이벤트 공세에 감동해서 마음을 열게 된다.

  원래도 이 영화가 장국영이 막 30대에 들어선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인데, 폭죽 이벤트 때 창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어대던 장국영의 모습은 어찌나 풋풋하고 어려보이던지, 마치 사춘기 소년을 보는 것만 같았다. ^^

  

 

  그리고 옛날과 완전히 달라진 1991년의 홍콩

 

  한 신문사의 사내커플로 있는 두 기자 중 남기자(이 커플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남기자와 여기자로 하겠음. ^^;;)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 여화가 갑자기 나타난다.

  여화는 신문에 사람 찾는 광고를 내고 싶어서 왔다고 한다.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도 별안간 어디선가 나타난 것도 그렇고, 옷차림이나 화장한 모습도 어디 옛날 영화 속 인물 같고, 광고의 내용조차 '도련님, 3811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알쏭달쏭한 내용이고...  남기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광고비 낼 돈이 없다는 여화에게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 남기자 입장에서야 '이 여자 스토커 아냐?'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영화 밖 관객 입장에서는 웃을 수 밖에 없는 몇 장면이 이어진다. 

  여화는 퇴근하는 남기자에게 계속 따라붙는다.  점을 치고 싶은데 점값 낼 돈이 없다며, 자기 손을 만지는데 500원(물론 우리 한국돈이 아닌 홍콩돈으로... ^^)이니 자기 손을 만져보란다. -.-;;  어처구니 없어 하는 남기자에게 '어떤 사람은 그 두 배나 되는 돈을 내고 내 귀를 만지기도 했다' 라고 태연히 말하는 여화... ^^;;

  남기자는 홍콩의 명물 이층버스에까지 따라붙은 여화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로소 눈 앞의 여화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 즉 귀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화는 함께 자살한 도련님과 만나기로 했는데, 50년이 지나도록 못 만나서 도련님을 찾으러 이승으로 왔다며,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무서워서 덜덜 떠는 와중에도 '이미 점값도 빌려줬는데, 사람 찾는 광고비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고 묻는 경제관념 투철한 우리의 남기자...!  그리고 '내 목을 만지는 걸로 대신하면 안 되냐?' 고 묻는 직업의식 투철한 우리의 여화...! -0-;;

 

  비록 남기자가 여화의 정체를 알고 기겁해서 쫓아보내다시피 하기는 했지만, 막상 길거리에 혼사 서서 울고 있는 여화를 보니 불쌍한 마음이 들어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여기자가 남기자의 집으로 왔다가, 남자친구 집에 있는 이 수상쩍은 여자를 보고 오해하며 화를 낸다.  하지만 여기자 역시 곧 여화가 귀신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다시 1934년의 홍콩

 

  여화와 진방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서로에게 완전히 몰두해서, 주위 상황은 전혀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뼈대있는 가문인 진씨네에서 아들과 기생이 결혼하겠다는 걸 달가와할 리 없건만, 결혼 허락 받아내는데 그다지 큰 걱정을 안 하는 걸로 보이는 두 사람...

  걱정은 커녕, 장국영과 매염방의 실제외모에서 아이디어 따온 것이 틀림없을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장국영과 매염방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팬서비스 제대로 한다.  진방이 '어머니께 당신과 내가 닮았다고 말씀드렸다' 고 말하자, '내 입술은 두껍고 당신 입술은 얇은데?' 하고 받아치는 여화... ^^  그러자 '원래 반대끼리 짝이 되는 법이니, 우리 입술은 부부가 되기 딱이다' 라고 능청을 떠는 진방... ^^

  이 장면에서 장국영과 나란히 누워 미소를 띤 채, 장국영을 향해서 귀엽다는 듯 얄밉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가 치켜뜨는 걸 반복하는 매염방의 모습을 보면, 4살 때부터 연예계에서 활동한 관록이 그대로 드러난다. ^^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집안에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진방은 집을 나와 여화와 동거를 하게 된다.  하지만 명문가의 외아들로 자란 진방이 뭘 할 수 있겠나...  연인인 여화가 두 사람의 생계를 위해 기생일을 계속 하는 동안, 진방은 당시 중국에 만연해있던 아편이나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  냉정히 말하면, 진방에게 기생의 기둥서방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화가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사온 새옷을 입고는 '옷은 낡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라고 말하는 진방에게, 여화는 사람은 어떠냐고 묻는다.  너무나 태연하게 '사람도 마찬가지다.  단, 당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을테니 걱정말아라.' 하고 말하는 진방...  이 대화는 두 사람의 비극적이고 허무한 사랑에 대한 강한 복선이 된다.  '사람도 낡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어떤 한 사람에게만 예외적으로 일편단심으로 행동하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진방도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경극배우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

  여화의 주선으로 경극계의 거물을 소개받아, 주연의 시종 역할 같은 단역을 맡으면서 주연의 뒤치닥꺼리를 하게 된다.  비록 진하고 요란한 경극분장을 하고 있어서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지만, 귀한 대접만 받고 산 이 도련님의 얼굴에 굴욕과 비애의 표정이 언뜻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 진방의 부모가 아들을 찾아왔다가, 귀한 외아들이 자신들이 보기에는 일개 딴따라에 불과한 경극 배우 노릇이나 하며 지내는 것을 보고 기막혀 한다.  이 때 진방 어머니가 여화에게 하는 '나는 내 아들을 잘 안다. 당신이 놓아주지 않아도, 어차피 돌아오게 되어 있다.' 는 말 또한 여화와 진방의 앞날을 알려주는 복선이다.  진방의 어머니는, 고된 현실을 견디기에는 아들의 성품이 너무 유약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무척 동요하는 여화...

 

  진방의 부모를 만난 일로 불안해하는 여화에게, 진방은 목걸이 형식의 연지통을 선물한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이 연지통을 의미하는 중국어 '인지구(胭脂扣)'임.)

  비록 경극극장 밖의 노점에서 파는 싸구려 연지통이지만, 그래도 진방이 난생 처음 스스로 번 돈으로 사서 선물하는 것이다.  당연히 여화는 무척 감격한다. 

  하지만 연지통 목걸이를 여화의 목에 걸어줄 때와 목걸이를 한 여화를 뒤에서 끌어안을 때의 진방의 표정을 보면,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화 역시, 진방이 더 이상 이런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과 자신들의 사랑이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 할 것을 직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1991년의 홍콩

 

  여화는 기자 커플에게 자신과 진방이 1934년 3월 8일 밤 11시에 아편을 먹고 동반자살했음을 알려준다.

  '도련님, 3811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특이한 광고문에는 그 나름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자살하면서, 저승에서라도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지내던 그 기루에서 자신들이 자살한 그 날짜 그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지난 50여년의 세월동안 진방의 영혼은 단 한 번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화 생각에는, 혹시 진방이 이미 환생을 해서 안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었고, 결국 직접 이승으로 와서 진방을 찾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런 애절한 사연을 듣게 되자, 남기자와 여기자 모두 의기투합해서 여화의 도련님을 찾아주기로 한다.

  일단 두 사람의 도움으로 신문에 '도련님, 3811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광고문부터 낸다.  그리고 며칠 후 3월 8일 11시가 되자, 여화와 두 기자는 약속장소로 나간다.  하지만 여화는 특이한 차림새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취급만 받을 뿐, 진방을 만나지는 못 한다.

  그러자 두 기자는 3811이라는 숫자에 대해 온갖 추측을 하기 시작한다.  혹시 환생한 도련님의 신분증 번호가 아닐까, 38층짜리 건물의 11층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도련님이 소유한 자동차나 냉장고 또는 TV의 시리얼 넘버일 수도 있고...  이제 두 사람은 신문사로 출근해서도, 업무는 안 보고 여화의 도련님 찾아주기에만 몰두할 지경이다.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사랑' 과 '유약하고 무책임한 사랑' 이 만났을 때

 

  그러던 중 두 기자는 우연히 발견한 1934년도 신문에서 여화와 진방의 기사를 보게 된다.

  그저 안타깝고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여화의 사연에 반전이 일어난다.  여화와 진방의 죽음은 진정한 동반자살이 아니라, 여화가 자기 마음대로 진방을 저승길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여화 혼자만 죽었고, 진방은 나중에 사람들 눈에 띄어 살아났던 것이다...!

 

  힘든 현실에 지친 진방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녀와 혼인하기로 결심하자, 여화는 동반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진방이 과연 자신과 함께 죽으려 할까 하는 불안감에, 미리 수면제를 잔뜩 섞어놓은 술을 진방에게 몇 잔이나 마시게 한다.  결국 여화 역시, 자신들의 힘든 사랑을 끝까지 지키기에는, 상대방의 성격이 너무 믿음직하지 못 하다는 불신감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 다음에 여화가 먼저 아편을 한 숟가락 가득 먹고서, 진방에게도 아편을 들이민다.  이미 몽롱하게 풀린 진방의 눈에도 의아함과 두려움이 나타난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수면제를 탄 술을 마셔서 정신이 혼미해진데다가, 원래도 유약하고 줏대없는 성격이라,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내세울만한 의지가 없다.  그래서 얼떨결에 여화가 자기 입에 떠넣어주는대로 아편을 삼킨 것이다.     

 

  이제까지 나온 여화와 진방의 사연이 신분조차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면, 새로 나온 사연은 사랑이라는 감정도 알고보면 이타적이기는 커녕 이기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이 진방을 가질 수 없다 해서 진방을 자신의 저승길에 끌어들일 생각을 했고, 또한 진방이 그 때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서 '나중에라도 나를 따라 죽을 수 있었을텐데 왜 죽지 않은 거냐. 도련님은 나를 배신했다.' 라고 괴로워하는 여화의 맹목적인 사랑은 보는 이를 질리게 한다.

  또한, 부모님 뜻대로 여화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기로 한 결정을 무슨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이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그래도 네가 보고싶겠지' 라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히 굴며, 동거생활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자살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고 상대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진방의 무책임하고 유약한 사랑 역시, 보는 이를 아연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허무하고 덧없는 사랑의 끝

 

  역시 인생이란 예측불가한 것이어서, 여화가 진방을 찾는 걸 포기하고 저승으로 돌아가기로 한 그 순간에 진방의 소식을 알게 된다.

  여기자가 공중전화기를 통해 전해 들은 진방의 근황은 그다지 좋지 못 하다.  그 많던 재산은 옛날에 다 날려버렸고, 여화를 버려가면서 혼인했던 부인 역시 오래 전에 세상을 떴으며, 여화와 동거하던 시절 경극의 단역배우 일을 했던 것처럼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영화계에서 단역배우로 있다는 것이다.

  여기자가 그렇게 통화를 하는 동안, 공중전화 박스 밖에서는 여화가 자신에게 실망감과 배신감만 안겨준 옛 사랑과의 재회를 위해 지친 얼굴을 공들여 단장한다.

 

  여화와 두 기자는 진방이 머물고 있다는 영화 촬영장으로 간다.

  어수선한 촬영장에서 무척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 화장실도 아닌 곳에 소변을 보고는, 그 옛날 피웠던 아편인지 아니면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보다 현대적인 마약인지를 몰래 피우다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쪽잠을 청한다.

  그 노인이 여화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단정하고 우아한 도련님이라는 사실이, 두 기자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둘이 번갈아가며 '정말 저 사람이 맞냐? 확실하냐?' 고 여화에게 묻는다.  하지만 정작 여화는 두 사람과 다르게, 전혀 놀라지 않는다.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한다. 

 

  두 기자에게 먼저 작별을 고한 후, 잠 든 노인에게 다가서는 여화...

  그 옛날 두 사람이 함께 했을 때 불렀던 노래를 낮으막하게 읊조리자, 노인이 눈을 뜨고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화를 응시한다.  여화는 목에 걸고 있던 연지통 목걸이를 풀어 노인의 손에 쥐어주며 '50여년 동안 간직했던 것을 돌려주려 왔다, 이제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다' 라는 말을 남긴 채 무표정하게 돌아선다.  비록 촬영장의 밝은 조명 옆을 지나칠 때에는, 괴로움의 표정이 언뜻 스치지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사라져가는 여화의 냉정한 뒷모습과, 비척거리는 몸으로 여화를 뒤쫓으며 '용서해줘,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줘' 하고 애원하는 노인의 모습...

  한 때는 뜨겁게 불타올랐건만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의 결말을 보면서, 두 기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여기자는 그 허무함과 덧없음을 차마 더 바라볼 수 없어서 남기자의 손을 잡아끌며 서둘러 자리를 뜬다.  그리고 남기자는 그 허무함과 덧없음에 오히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여기자 손에 이끌려가면서 몇 번이나 뒤돌아 본다. 

 

 

  도련님, 3811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매번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도련님, 3811 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말은 흔히 영화나 소설 속에서 너무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사랑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는가를 상징하는 명언이다.  3811 이후로 50여년이나 일편단심으로 진방을 기다렸건만, 알고보니 진방은 이미 50여년 전에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게 된 여화...  그리고 3811 이후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던 시기를 이미 흘려보낸 채, 이제는 그저 외롭고 가난한 노인으로 전락해서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진방... 

 

  우리나라에도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되기까지 한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氷點) 중 본편인지 속편인지에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다' 라는 말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이 말은 평범함 속세 속 인간들의 사랑이 아닌, 종교적 의미에서의 사랑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라는 게 처음에는 서로간의 좋은 느낌이라는 감정적인 부분에서 시작하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화와 진방이 처음에 상대방에게 느낀 불같은 열정은 분명 진심이었겠지만,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결국 천상이 아닌 속세였다.

  온갖 사람들과 부대끼며 돈 문제니 뭐니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속세에서 사랑을 계속 지켜나가려면, 서로를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등 이성적인 처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 했다.  여자는 자신을 위해 계속 기생 노릇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단역배우와 심부름꾼 일을 하는 것조차 참지 못 한 남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질 바에는 함께 죽는 것이 낫다면서,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대에게도 똑같이 자살을 강요한 여자...

  그렇게 여화와 진방의 사랑은 의지적인 요소는 결여된 채 감정적인 요소만 가득 했고, 그래서 열정적인 시작과는 달리 너무 허무하고 차갑게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