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그을린 사랑(Incendies)

Lesley 2012. 1. 11. 00:17

 

 

 

 

 

  전혀 캐나다 영화 같지 않은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 

 

  영화 '그을린 사랑 (Incendies)는 작년에 제작된 캐나다 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캐나다' 했을 때 보통 떠올리는 것들, 즉 유럽계 캐나다 주민이라든지, 한국학생들에게 어학연수지로 유명할 정도로 주요 영어권 국가 중 하나라든지,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라든지, 느긋하고 평화스러운 일상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이 영화를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아랍 사람들이고, 나오는 언어는 캐나다 일부 지역(퀘벡)에서만 주로 쓰는 프랑스어와 주인공들의 고국인 레바논의 아랍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원제인 'Incendies(큰 불, 전쟁, 감정의 고조, 폭발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로 대표되는, 온갖 종류의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다.  폭력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영화 '친구' 식의 주먹질, 발길질 오가는 종류를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사람들이 피범벅 되는 장면 같은 직접적인 폭력성은 훨씬 덜 하면서도, 그보다 격이 더 높게(폭력의 품격?) 종교간의 갈등으로 야기되는 모든 종류의 폭력(총기 난사, 폭탄 테러, 성고문을 포함한 정치범 학대)가 나온다. 

 

 

 

  촘촘히 이어진 씨줄과 날줄로 엮인 영화 '그을린 사랑' 

 

  이 영화는 어두운 사연을 어두운 방식으로 조용하게 풀어나가지만, 전혀 지루하다는 느낌은 안 든다.

  원래는 연극 대본이었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가 여러가지 소재로 워낙 촘촘하게 잘 엮여있기 때문이다.  한 고비 넘어갈 때마다 '아, 그래서 앞부분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아서, 처음에는 좀 어수선하다는 느낌도 들고 뭐가 뭔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3분의 2쯤 보고 나면, 영화가 어찌나 짜임새 있는지 이 영화가 수학적으로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긴, 어떤 의미에서는 수학도 이 영화의 관람 키포인트 중 하나라 할 수 있음.)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반전으로 유명한 또 다른 영화 '식스센스' 를 능가하는 수준의 대반전이 일어난다.  식스센스와의 차이라면, 식스센스가 그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면, 이 영화는 반전이 보여주는 끔찍하고 잔인한 운명 때문에 관객들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 영화 속 씨줄과 날줄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면... 

 

  혹시 이 영화를 앞으로 볼 사람이라면, 여기까지만 읽고 더 이상은 보지 말기를...!!!

  이런 종류의 영화는 내용을 다 알아버리고 보면, 재미가 반감되어 버리니...

 

   

 

  황당한 유언장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민와서 자란 '잔느''시몽' 은 20대 중반의 아랍계 쌍둥이 남매인데,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게 된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홀어머니 '나왈' 이 약 20년간 공증인의 비서로 일하면서 쌍둥이를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왈이 딸 잔느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원인 모를 극심한 쇼크 상태에 빠지더니 결국 세상을 뜬 것이다.

 

  그런데 나왈은 생전에 편안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수영장에 막 들어서면서 딸과 주고 받는 대화를 들어봐도 그렇고, 아들 시몽이 죽은 어머니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나왈은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딸인 잔느는 체념 반 인내 반으로 어머니를 좋게 대해주려 애를 썼지만, 아들 시몽은 어머니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자식들에게는 괴팍스럽고 모나게 굴었던 나왈이, 자신의 고용주인 공증인 '장' 과는 원만히 지냈다.  나왈과 장 사이에는 상관-부하직원으로서의 신뢰감 및 유대감, 그리고 오랜 친구로서의 친밀함이 있다.  더구나 장의 직업이 마침 공증인이기까지 하니, 나왈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을 작성해서 장에게 그 유언장을 집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나왈이 장을 통해 쌍둥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장이라는 게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시체를 관에 넣지 말고, 시체에 아무 것도 입히지 않은 채, 세상을 등질 수 있게 땅속에 엎어서 묻으라는 것이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 뒤에 더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장은 나왈이 남긴 편지를 쌍둥이에게 한 통씩 건네주며, 그 편지를 수취인에게 전하라고 한다.  그런데 딸 잔느가 받은 편지의 수취인은 이 쌍둥이의 아버지이고, 아들 시몽이 받은 편지의 수취인은 쌍둥이의 형(오빠)이다.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듣도 보도 못 한 손위의 형제가 있었다니...!  나왈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비석에 아무 글자도 새겨넣지 말라면서, 이 두 통의 편지가 수취인에게 전해져서 유언이 지켜졌을 때 비로소 비석에 이름을 새겨넣을 것을 요구했다.

  잔느는 이 뜻밖의 상황에 무척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려고 어머니의 조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수소문 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잔느보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훨씬 안 좋은 시몽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유언을 따를 생각이 없다며 쌍둥이 누이와 함께 가는 것을 거절한다.  

 

 

 

  폭력과 증오로 그을린 어머니의 조국, 그리고 드러나는 어머니의 과거

 

  영화에서는 나왈의 고향이 아랍의 어떤 나라인지 확실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랍 국가임에도 상당수의 기독교도가 존재한다는 점, 그 기독교 세력이 정권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 세력이 무력으로 맞서는 통에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는 점, 이 나라 남부에는 이스라엘에서 밀려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주 중이라는 점 등으로 봤을 때, 이 나라는 분명히 '레바논' 이다.

 

  잔느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찾으려는 목적에서 레바논으로 간 것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 때까지 전혀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와 맞닥뜨리게 된다.

  어머니의 고향 마을을 찾아간 잔느는, 어머니의 친척들에게 뜻밖의 냉대를 받는다.  어머니 나왈은 그 곳에서 '가문의 수치' 로 여겨지고 있었다.   잔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너무나 명확하고 간단하게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를 힘겹게 찾는 잔느의 모습' 과 '과거의 나왈의 모습' 을 계속 교차해가며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밖의 관객들은 나왈에 대해서, 잔느가 찾아낸 몇몇 사실 뿐만 아니라, 보다 자세한 과거의 일까지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잔느는 관객들만큼 어머니의 평범하지 못 했던 과거를 알지 못 한다.  즉, 나왈이 보수적인 아랍 세계에서 자유연애를 하고 혼전 임신과 출산이라는 파격적인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다. (더구나 상대남자는 같은 기독교도가 아닌, 이슬람교도인 팔레스타인 난민이었음.)

 

  잔느가 겨우 과거의 일을 제대로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듣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다.

  나왈은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담해서 기독교 세력의 주요 정치인을 암살한 일로, 감옥에서 십수 년을 복역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관객은 기독교도인 나왈이 왜 이슬람쪽 단체에 가담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잔느는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 한다.  그리고 사실, '어머니가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걸까?' 라는 것은 잔느에게 중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단순히 수감 생활만 한 게 아니라, 성고문을 당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왈이 교도소에 갇혀서도 꿋꿋한 태도를 버리지 않자, 교도소 측에서는 나왈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아부타렉' 에게 나왈을 맡게 했다.  나왈이 보통의 고문으로도 굴복하지 않자, 아부타렉은 강간을 고문 수단으로 쓴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충격을 받은 잔느가 시몽에게 전화해서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울면서 말하자, 어머니 일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던 시몽도 장과 함께 레바논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잔느가 어머니의 과거를 단편적으로만 알아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잔느와 시몽을 진실의 중심부로 들어가지 못 하고 언저리에서만 계속 헤매게 된다.  이 쌍둥이 남매는 어머니가 아부타렉에게 강간당해서 출산한 아이가, 바로 어머니의 유언장에 나오는 자신들의 오빠이자 형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감옥에서의 출산이 나왈의 두번째 출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왈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 한 쌍둥이로서는,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의 행방을 수소문한 결과는 쌍둥이에게 또 한 번 큰 충격을 준다.  무서운 고문 기술자 아부타렉이 나왈을 강간하여 태어난 아이들이 바로 잔느와 시몽이었던 것이다...! 

 

  쌍둥이가 수영장에서 격렬하게 수영을 한 후 조용히 포옹하는 장면은, 대사 하나 없는 장면인데도 많은 것을 보여준다.

  사랑이 아닌 폭력으로 태어난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슬픔, 어째서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다정하지 못 했는지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그래도 이런 충격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 또 다른 분신과 함께 있어 다행이라는 작은 위로...

 

 

 

  니하드를 찾아서...

 

  장의 주선으로 현지에서 만난 레바논인 공증인이 여러 기록을 열심히 추적한 덕분에, 쌍둥이의 형이자 오빠인 '니하드' 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니하드는 이슬람교도인 아버지와 기독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외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져서 자랐다.  그런데 이슬람 무장세력이 고아원을 습격할 때, 그 무장세력이 니하드를 비롯한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데려갔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것이다. (물론 쌍둥이와 장에게나 새로운 사실이지, 관객들은 벌써 다 알고 있던 사실임.) 

 

  시몽은 레바논인 공증인의 충고대로 니하드를 데려갔다는 그 무장세력의 지도자에게 자기 이야기가 흘러들어가게 해서, 그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공교롭게도 그 지도자가 이끄는 단체가, 과거에 나왈이 가담했던 이슬람 무장세력이다.  그 지도자는 나왈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나왈의 아들 시몽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시몽이 자신의 형 니하드를 찾으라는 나왈의 유언으로 왔으며, 니하드와 나왈이 모자지간이라는 것을 출생기록을 통해 확인했다고 하자, 지도자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시몽과 독대한다.

 

  수십 년의 내전 속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안 할 반군 지도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는 자기네 조직이 니하드를 비롯한 고아원 아이들을 전사로 키웠고, 니하드는 훌륭한 저격수로 이름을 떨쳤다고 설명한다.  니하드가 그런 무서운 전쟁기계가 된 이유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애증 때문이었다.  자기 어머니가 어디에서든 자기 사진을 볼 수 있도록 유명해지겠다며 전쟁광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니하드는 적군인 기독교 세력에 생포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쪽에서는 자신들의 동료를 수도 없이 죽인 니하드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니하드를 훈련시켜 나왈이 갇혀 있던 그 교도소로 보내, 니하드와 같은 편이었던 이슬람쪽 죄수들을 고문하는데 이용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의 적인 이슬람 세력에 대한 무서운 복수라 할 수 있음.) 

  여기까지 들은 시몽이, 그렇다면 자신의 이부형 니하드가 자신의 생부 아부타렉과 함께 고문 기술자로 일한 거냐고 묻는다.  지도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1 더하기 1은 1이었다!

 

  여기에서 지도자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얼핏 생각하면 뜬금없고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장면들이 뒤를 잇는다.

 

  호텔방에서 불도 안 켜고 혼자 멍하니 있는 시몽에게, 잔느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밑도 끝도 없이 "1 더하기 1은 2여야 해. 1 더하기 1이 1일 수는 없는 거지?" 라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시몽...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잔느...  잠시 후에야 잔느는 시몽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듣고 비명을 지른다.

 

  이어서, 영화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나오기는 했지만 단편적으로만 나와서 그 전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나왈을 죽게 만든 수영장에서의 그 사건이 다시 나온다. 

  딸 잔느와 수영장에 간 나왈이 수영을 하다가, 문득 숨을 멈추고 풀장 밖을 응시한다.  나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세 개의 검은점 문신이 박힌 발 뒤꿈치가 보인다.  그 옛날 나왈이 첫사랑의 아이를 낳은 후, 나왈의 할머니는 훗날 나왈이 아이를 찾게 될 때 증거가 될 수 있도록 갓난아이 뒤꿈치에 세 개의 점을 문신으로 새겨넣었다.  과거에 그 아이가 지내는 고아원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에 아이를 애타게 찾아헤맸고, 그런 결과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기독교 세력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속한 기독교 세력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슬람 세력에 가담했으며, 그에 대해 끔찍한 대가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마법처럼 나타난 것이다!

  터져나오려는 온갖 감정을 겨우 억제하는 표정으로, 그 남자 뒤편으로 가서는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쳐다만 본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뒤돌아 본다.  무슨 용건으로 그러냐고 묻는 듯한 남자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자, 온갖 감정으로 들끓던 나왈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하게 식어버린다.  그러고는 급하게 남자 옆을 지나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그대로 굳어져버리는 나왈... 

 

  이슬람 무장세력 지도자의 나레이션이, 이 긴장감 넘치면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서 설명해준다.

  니하드는 고문 기술자가 되면서 이름을 바꿨는데, 그 이름이 바로 아부타렉이었다.  즉, 나왈을 강간한 고문 기술자 아부타렉은 나왈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친아들 니하드였다!  다시 말해서, 니하드는 쌍둥이에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며, 동시에 친아버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 놀랍고 끔찍한 사실이, 나왈의 정신에 엄청난 타격을 주어 나왈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평생을 전투와 음모 속에서 지낸 노회한 무장단체의 지도자를 동요하게 만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항상 사랑할거야. 

 

  캐나다로 돌아간 쌍둥이는 니하드를 찾아가서, 영문을 몰라하는 니하드에게 강렬한 눈빛으로 어머니가 남긴 두 통의 편지를 전하고 돌아선다.

  니하드가 뜯어본 첫번째 편지는, 나왈이 고문 당했던 죄수의 입장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에게 쓴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은 나를 못 알아봤지만, 나는 당신을 알아봤노라는...  그리고 이 편지를 전한 이들이 바로 당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놀란 니하드가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쌍둥이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뜯은 두번째 편지는, 나왈이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쓴 것이다.  네가 태어날 때 한 약속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항상 사랑할거라는...  너를 잊지 못 했고, 평생 찾아다녔노라는...  너는 사랑 속에서 태어난 아이니까, 네 동생들 또한 사랑 속에서 태어난거라는...

 

  그렇게 유언 속 약속이 모두 지켜지고, 약속이 모두 지켜졌기에 나왈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무덤에 세워진다.

  니하드가 그 무덤을 찾아와 무덤을 내려다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속 다양하고 치밀한 복선 - 오이디푸스의 이야기, 수학

 

  종교적 갈등이라는 소재를 뺀다면, 이 영화는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현대판 버전이 된다.

  영화 도입부에서, 갓 태어난 니하드의 발뒤꿈치에 점 세 개를 새겨넣는 장면이 나올 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문신이라는 것은 팔이나 등에 하는 게 아니던가?  왜 하필이면 발인가?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주요 복선이었음을, 니하드와 아부타렉이 동일인물이라는 게 드러난 후에야 알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게 될 거라는 신탁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  오이디푸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자가 차마 갓난아이를 직접 죽일 수 없어서, 짐승의 밥이 되도록 아기의 발을 묶어 매달았다. (이 부분은 다양한 버전이 있어서, 발에 못질을 해서 매달았다고도 함.)  그래서 아이의 발이 퉁퉁 부었고, '부은 발' 이란 뜻의 오이디푸스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성장해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그 운명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운명의 덫에 걸려,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된다.

  니하드의 발에 문신이 새겨졌다는 것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어머니를 범하게 되리라는 복선인 셈이다. 

 

  그리고 쌍둥이 중 하나인 잔느가 수학과 대학원생으로 나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수학 교수의 조교이니 대학원생이 맞을 것임.)

  카메라가 어머니의 이상한 유언 때문에 심란해하는 잔느의 모습을 비출 때, 그 위로 잔느의 담당교수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흐른다.  교수는 "지금까지 너희가 다룬 수학은 명확하고 한정적인 문제에서 시작해서, 명확하고 한정적인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배울 이론수학에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남들은 너희가 시간 낭비한다고 말하겠지만, 너희는 그들을 이해시킬 수도 없다.  너무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교수의 말이야 말로, 앞으로 잔느가 어머니의 고국으로 돌아가 부딪치게 될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상황을 미리 말해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알아내게 되는 어머니의 과거는 '너무 복잡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는 문제' 이기도 하다.  영화 내용을 미리 암시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복선이 되지만, 어머니가 과거에 겪은 여러 복잡한 사연들이 알고보면 수학의 온갖 공식처럼 정확한 인과관계로 딱딱 맞물려있었다는 점에서도 복선이 된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흔적 - 기록과 공증인

 

  또한 이 영화에서 '기록' 이라는 것의 중요성 및 그 기록의 정확성과 합법성을 보장해주는 '공증인' 이란 직업의 사명감에 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쌍둥이가 아버지이며 형제이기도 한 니하드에 대해 알아나가는 단서는 출생기록, 고아원 입소기록 등 각종 기록이다.

  그런 기록이 없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비밀에 다가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기록은 단순히 사람을 찾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의 흔적이고 역사다.  그래서 장이 시몽에게 들려주는 기록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남자가 생전에 두 나라에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이중생활을 했는데, 그에 관한 기록(결혼기록)이 서류로 남았기 때문에 그 남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이제는 드러난 것이다.  장은 그 서류를 시몽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인간은 죽는다고해서 전부 끝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고, 그 흔적이 바로 기록이라고...

  기록에 대한 중요성은 레바논 공증인 입에서도 한 번 더 강조된다.  니하드에 대한 기록이 고아원 습격 사건 이후로 끊겼다는 말에, 그렇잖아도 자신이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막 알게 되어 힘들어하던 시몽이 "그럼 형은 죽은거니 이제 그만 찾자." 고 한다.  그러자 레바논 공증인은 정색을 하며 "죽었다는 게 아니라 흔적을 놓쳤다는 것이다." 고 반박한다.  기록이라는 객관적인 자료에 의존하는 공증인에게 '더 이상 기록이 없다' 와 '죽었다는 기록을 확보했다' 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록을 작성하고, 그 기록에 사실성과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직업인 공증인...

  나왈이 죽어가면서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은 사람, 그리고 나왈이 쌍둥이 자식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언장을 작성했을 때 그 유언장의 집행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장이다.  물론 장이 나왈 가족과 무척 돈독한 관계라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장의 직업이 공증인인 것 또한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내용상, 분명히 장은 나왈에게 모든 것을 다 들은 걸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는, 쌍둥이에게 유언장을 공개하기 전에, 장이 온갖 공증서류가 가득한 방 안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는, 장이 나왈의 부탁으로 유언장을 작성한 후 홀로 어둠 속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나온다.  즉, 장도 이 엄청난 사연의 유언장 집행에 큰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얼른 편해지고, 쌍둥이도 그 먼 레바논까지 가서 헤매는 수고를 겪지 않도록, 차라리 쌍둥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알려주고 이 일을 빨리 끝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장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장은 유언을 지키는 일, 즉 약속을 지키는 일을 '신성한 일' 이라고까지 말하며 최선을 다해 유언장을 집행하려 든다.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 공증인이란 직업을 이어온 공증인 가문 사람으로서, 그는 공증인이란 일을 단순히 직업이 아닌 신성한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감독이 공증인들의 사명감과 그 공증인들이 작성하는 기록의 정확성을 선전해 줄 생각으로, 이 영화에 직업의식 투철한 공증인을 두 명이나 나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겨져 후세에 전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록 영화 속 큰 줄거리가 한 가족의 비극이기는 하지만, 그 가족의 비극도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갈등 때문에 생겨난 비극이었다.  결국 역사라는 것은 수많은 개개인의 삶을 합쳐놓은 것 아니던가?  그렇다면 개인의 기록이라는 것도 넓은 의미로는 역사의 기록이다.  장이 말한 것처럼 사람은 죽었다고 끝이 아니고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면, 국가니 종교집단이니 하는 커다란 조직 또한 무엇을 하든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끔찍한 인권 유린을 저지른 독재자들은, 거짓 발표를 통해 사실을 숨기거나 왜곡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력으로 진실을 잠시 가려둘 수는 있어도, 진실에 관한 모든 기록을 말살하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그런 기록들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게 되어 있다.  10여년 세월동안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되었던 5.18 사건도, 국내에서는 보도를 제한하는데 성공했지만 외신기자들이 촬영한 사진과 영상 등의 기록이 국제사회에 보도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에, 결국에는 정부에서도 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껏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많은 일반인들이 계속 부인하고 있는 남경대학살과 731부대의 생체실험이 다른 나라에서는 엄연한 사실로 인정받는 이유도, 남경대학살과 731부대에 대한 수많은 자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왈이 정말로 니하드를 용서하고 모든 것을 품은 것인가?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이들이 쓴 감상문을 보면, 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과 용서라는 면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 많은 듯하다.

  아마도, 나왈이 니하드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너를 사랑할거야.' 라는 부분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를 사랑해' 가 아니라 '너를 사랑할거야' 라고 쓴 걸로 보아, 나왈이 이미 용서를 했다기 보다는 용서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걸로 보인다.  사실 저런 비극적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나...  나왈 역시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병원으로 옮겨진지 얼마 안 되어 결국 세상을 떴다.

  나왈이 모든 것을 용서했다기 보다는, 니하드 역시 따지고 보면 운명의 희생자였기에, 이 비극이 자기선에서 끝나고 니하드는 그 비극을 넘어서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긴 넓게 보면, 이런 바람 역시 용서의 테두리 속에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모든 종류의 증오라는 게 다 안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종교적 증오와 민족적 증오가 가장 무서운 것 같다.

  다른 종류의 증오는 최소한 '왜?' 라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해소하면 갈등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종교 또는 민족의 경우 그 존재 자체가 증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이유 같은 것 없이, 그저 너와 나의 종교가 다르고, 너와 나의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게 된다.  그저 서로의 존재 자체가 증오의 원인이니, 서로를 없애기 전에는 갈등을 끝낼 방법도 없다.

  특히나 종교라는 것은, 어떤 종교나 그 교리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인데, 그런 종교가 원인이 되어 서로 피를 흘리게 된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어처구니 일이 지금도 지구상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