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검우강호(劍雨江湖)

Lesley 2011. 9. 15. 00:12

 

  지난 여름, 오래간만에 무협영화 한 편을 봤다.

  우리나라 배우 정우성도 출연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그러나 흥행성적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 검우강호(劍雨江湖)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냥 그렇다.

 

  학창시절 성적에 비유하자면,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수한 성적도 아닌 70점짜리 영화라고 할까? ^^;;

  영화 보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거나 볼거리가 풍성한 것도 아니고, 영화가 끝나고서 큰 감동이 남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잇, 괜히 시간 낭비 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영화도 아니다.  즉, 내 돈 주고 영화표 사서 보기에는 아깝지만, 누군가 나에게 영화표 사준다면 그냥저냥 볼만한 영화랄까? -.-;;

 

  일단 무협영화로서의 기본 토대는 괜찮은 편이었다.

  언제부턴가 중국어권 무협영화에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이 잔뜩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렇잖아도 사양기에 들어선 무협영화가 유치해서 차마 못 봐줄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에 비해 이 영화의 경우, 사실상 원톱인 양자경은 물론이고(영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봤을 때, 정우성을 과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조금 의문임.  내가 보기에는 양자경이 단독 주인공임. ^^), 다른 등장인물들도 모두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권법을 보여준다.  물론 대부분의 무협영화들이 그렇듯이 피아노줄(!)의 도움이야 줄기차게 받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실적이고 진지한 무협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무협영화로서의 기본이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내용 전개가 밋밋하고 개연성 측면에서 구멍이 몇 군데 뚫려있다.

  기존의 무협영화와 차별되는 새롭고 대단한 무협씬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와호장룡' 같은 영화처럼 무협영화의 간판을 내걸었으면서 사실은 깊은 사색이 느껴지는 종류의 영화도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객들이 깊은 사색을 할만한 소재를 골라잡기는 했는데,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다지 치밀하지 못 했다.

  그렇기 때문 더욱 아쉽다.  뭔가 대단한 작품이 나올 뻔하다가 그저 그런 작품으로 굳어져버린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포스팅하는 이유는, 석가모니와 그 제자 아난(阿難)의 대화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이며 동시에 제자이기도 한 아난이 석가모니와 주고 받았다는 대화가, 이 영화의 도입부분부터 결말부분까지 관통하는 주요 소재가 된다.

  아난이 출가를 하기 전에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가 그 소녀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아난은 "저는 돌다리로 변하여, 오백년간 바람을 맞고, 오백년간 햇볕을 쬐고, 오백년간 비를 맞기를 원합니다. 단지 그 소녀가 돌다리를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라고 했다.  아난이 무려 오백년간이란 긴 세월 동안 바람, 햇볕, 비를 맞는 일을 견디는 대가로 원했던 것은, 그 소녀 또한 아난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몸이 변하여 이루어진 돌다리 위를 소녀가 한 번 건너가주기만을 원했을 뿐이다.  그만큼 그 소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다.

 

  한 암살조직의 뛰어난 여자객 '세우(양자경 분)' 는 조직을 몰래 빠져나와 어디론가 떠나던 중, 우연히  '육죽' 이라는 젊지만 불법(佛法)과 무예 모두 상당한 경지에 이른 승려를 알게 된다.

  육죽은 처음 만난 세우에게서 강한 인연의 끈을 느낀다.  그래서 세우와 함께 동굴 속에서 석 달을 지내며, 세우가 쓰는 검법의 약점을 지적하고 교정해준다.  동시에 세우로 하여금 지금까지 걸은 길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서 암살자의 길에서 떠나게 하려고 한다.

 

  육죽은 세우와 마지막 검술대련을 하다가, 세우의 검에 찔려 죽게 된다.

  그 때 육죽은 "선기(禪機)에 이미 도달했다." 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옮긴 한국어 자막은 어설퍼서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고, 중국어 자막에는 '禅机(禪機)已到' 라고 되어있음.  선기(禪機)란 '선종(禪宗)의 승려가 설법할 때 언행(言行)이나 사물로 교의(敎義)를 암시하는 비결(祕訣)' 이라고 중국어 사전에 나와있는데, 이게 당최 무슨 뜻인지...ㅠ.ㅠ)  그리고  "나는 돌다리로 변하여, 오백년간 바람을 맞고, 오백년간 햇볕을 쬐고, 오백년간 비를 맞기를 원한다.  단지 네가 그 돌다리를 지나가기를 바라며 말이다." 라고 덧붙이고 숨을 거둔다.

 

  나중에 세우가 육죽의 스승을 만나 육죽이 남긴 말의 뜻을 묻자, 스승은 불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와 아난의 이야기라고 설명해준다. 

  세우는 그 설명을 듣고서, 석 달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리고 자신의 검에 찔려 죽으면서까지, 육죽이 자신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육죽의 뜻대로 암살자의 길을 버리고, 얼굴과 이름을 완전히 바꾸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부분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곧 죽을 것만 같은 증정(세우의 나중 이름.)이 남편 강아생(정우성이 분한, 장인봉의 나중 이름)에게 유언처럼 읊조리는 말도 저 돌다리 이야기다.

  알고보니 자신과 원수지간으로 밝혀진 남편 앞에 이제는 다 죽어가는 몸으로 서서, 예전에 죽음을 눈앞에 둔 육죽이 그러했듯이, 자신 또한 죽어서도 영원히 남편을 사랑할 것이라는 마음을 저 돌다리 이야기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돌다리는 이 영화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선 주인공 세우가 자기 인생 속 가장 중요한 두 남자인 육죽과 강아생을 만났던 곳이 바로 돌다리 위였다...!

  세우가 무림고수들이 모두 노리는 달마대사의 시체를 차지하고자 강아생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떠나며 돌다리를 건너던 중,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던 강아생과 마주쳤다.  훗날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인지도 모른 채 강아생의 가슴에 칼을 꽂아 돌다리 밑으로 떨어뜨리는 순간, 육죽이 돌다리 위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 끝부분에서 부부사이의 모든 은원 관계가 깨끗이 정리된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비추는 것 또한 돌다리다. 

  엔딩씬의 그 돌다리가 세우가 육죽과 강아생을 만났던 그 돌다리인지, 또는 마지막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에 있는 돌다리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아난이 말했던 돌다리에 들어있는 그 깊은 뜻이, 세우와 강아생 부부의 미래 속에서는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엔딩씬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인 암살조직의 두목(따로 이름이 있었던 듯한데, 이미 기억이 가물가물... ^^;;)과 엽탄청(한국에서도 인기 있었던 대만 드라마 '유성화원(꽃보다 남자)' 의 여주인공 서희원 분.)의 인연에서도, 돌다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세우에게 돌다리가 자신의 인생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끌어준 두 남자와의 아름다운 인연의 매개체라면, 이 두목과 엽탄청에게 돌다리는 악연(!)의 매개체다.

  엽탄청이 가공할 무공 비결을 배울 욕심에 두목에게 접근한 데 비해, 두목은 엽탄청에게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엽탄청이 두목의 신체의 비밀을 알게 되고 비웃자, 두목은 배신감에 무자비하게 복수를 하게 된다.  혈을 찔려 움직이지 못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있는 엽탄청을, 그대로 돌다리 아래 땅 속에 파묻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남의 약점 함부로 비웃으면 안 되는 것임. 한을 품은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가 있음. -.-;;)

  차라리 엽탄청에게 욕을 퍼붓고 악을 쓰며 생매장했더라면 덜 살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목은 마치 조용히 있어야 하는 장소에서 징징거리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듯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달래는 말투로 "내가 너를 왜 하필이면 이 곳에 묻는지 아느냐? 그래야 내가 저 돌다리를 오갈때마다 너를 떠올리지 않겠느냐?" 라고 한다. (이래서 처음부터 증오하기만 한 상황보다, 사랑이 증오로 변해버린 상황이 더 무서운 것임. ㅠ.ㅠ)

 

 

  2% 부족해서 아쉬었던 영화, 검우강호...

 

  위에서도 이미 썼듯이, 이 영화는 꽤 괜찮은 소재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잘만 만들었다면 '와호장룡' 과 같은 무협영화의 형식을 빌린, 하지만 실제로는 '삶의 의미' 또는 '구도(求道)의 길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번뇌하는 인간의 아픔' 혹은 '인간세상의 은원(恩怨)의 무상함' 같은 것을 표현해내는 수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 

 

  일단 세우가 강호를 떠나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 계기인, 육죽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좀 더 설명이 있어야 했다.

  육죽이 아무리 범상치 않은 승려라고 해도 그렇지, 첫만남에서 세우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런 무서운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좀 뜬금없지 않나... -.-;;  어째서 육죽이 세우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더 있어야 했다.

  또한 세우가 어쩌다가 육죽과 함께 동굴에서 지내게 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암살자 세우가, 처음 만난 육죽이 따라오란다고 순순히 따라갔을 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강아생이 세우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세우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애매하다.

  강아생 스스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부러 세우에게 접근해서 기회를 엿본거라고 말했다.  즉, 강아생이 처음부터 세우가 원수임을 알면서 복수 차원에서 결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아생이 아내의 정체를 알려주는 증거들이 묻힌 무덤을 파헤친 후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봐서는, 아내가 원수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마음에 심하게 상처를 입은 나머지 거짓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강아생이 원래 세우의 정체를 몰랐다고 한다면, 심한 부상을 입은 세우를 의원에게 데려갔을 때 의원이 말한 "이것도 일종의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라는 말의 뜻이 불명확해진다.  앞뒤 상황을 보건데, 의원은 분명히 "원래 원수지간인 너희들이 번갈아가며 나에게 수술을 받아 새 얼굴과 새 이름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 어디 범상한 인연이냐?" 라는 의미로 말한 듯하기 때문이다.

 

  좋은 소재를 갖고도 기획력이 부족해서 영화 내용이 뒤로 갈수록 산으로 가버린 것 같아, 너무 아쉽다.

  하지만 그래도 석가모니와 아난이 주고받았다는 저 돌다리 이야기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