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조총련 가족 이야기(1) - 디어 평양(Dear Pyongyang)

Lesley 2011. 8. 19. 15:28

 

  얼마 전 재일교포인 양영희 감독의 2006년도 작품 '디어 평양(Dear Pyongyang)' 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양영희 감독은 1980년대 초반부터 몇 년에 한 번씩 세 오빠가 거주하고 있는 북한을 드나들면서 캠코더로 동영상을 찍었다.  이런 홈무비 형식의 동영상에, 2000년대 들어 정식으로 찍은 필름을 더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1. 조총련

 

 

  이 영화는 정치물이 아닌, 냉전시대 남북대립으로 벌어진 한 가족의 애환을 담은 영화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조총련 소속의 재일교포이기 때문에, 조총련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가야 영화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서 살고있는 우리나라 교포 중,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는 정치적으로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다.

  즉, 재일교포라고 해서 다 같은 재일교포가 아니고, 남한 국적을 선택한 민단(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소속과 해방 직후 부여된 조선적을 유지한 채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소속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조선적을 유지한 채 조총련도 선택하지 않아,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음.)  그렇게 두 편으로 나뉘어진 재일교포는 지금까지도 '두 조국' 을 대신하여 일본땅에서 대립하고 있다.

 

  북한이 남한보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던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재일교포가 조총련 소속이었다.

  당시 60만명 가까이 되는 재일교포 중 50만명 정도가 조총련 소속이었다니, 전체 재일교포 중 80%가 넘는 숫자가 북한을 지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1960년대 재일교포 사회만 놓고 본다면, 남한 정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 했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모든 면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우세해지고, 북한이 조총련을 이용하여 불법송금 및 돈세탁 같은 무리한 해외공작을 벌이면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실망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재일교포의 특성상,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나 동해상에서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으로 북한에 대한 일본의 공포감과 적대감이 나날이 높아지면서, 재일교포 스스로의 현실적인 생활 문제를 위해서도 민단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민단 소속이 조총련 소속보다 훨씬 많을 정도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는 구체적인 숫자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지금부터 쓰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한국인들이 모르고 있다.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들의 고향은 어디일까?

  많은 한국인이 조총련 소속의 재일교포들은 원래 북한 출신 또는 북한 출신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고향이 북한인 사람들이니,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에 가입한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여긴다.

  하지만 조총련계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남한 출신 또는 남한 출신의 후손이다.  그것도 '상당수' 라고 해서 과반수를 넘어서는 60%나 70% 정도가 아니다.  남한 출신자가 무려 99%나 된다...!  그 남한 출신자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말하자면, 경상도 및 제주도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걸까?

  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지금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후손인데, 그들이 거의 경상도와 제주도 출신이다 보니, 조총련도 대부분 그 두 지방 출신자들일 수 밖에 없다.

 

  경상도와 제주도는 징용자를 뽑아내기 위한 좋은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다.

  우선 경상도는 한반도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서(물론 지금은 수도권이 가장 많음.) 노동력이 풍부했다.  거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는 점까지 더해서, 징용자를 차출하기 편리했다.  제주도는 인구는 적지만 변변한 산업시설도 농지도 없어서 일본으로 노동력을 빼내기 쉬었다.  또한 경상도만큼은 아니어도 일본에서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징용자의 절대다수가 이 두 지방 출신자들로 채워졌다. 

  게다가 이 두 지역 사람들은 해방 후 남한에서 벌어진 혼란에 실망하고, 자신들의 고향에서 벌어진 사건(제주도의 4.3 사건, 경상도의 대구 10월 사건 등등)에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당한 사실에 분노했다.  그래서 귀국을 포기한 채, 자신들의 고향에 들어선 남한 정부에 반감을 갖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조국' 인 북한 정권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북한의 실상에 실망하여, 하나둘씩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조국의 현실에 실망하여 일본땅에 거주하며 또 다른 조국을 선택한 조총련 가족의 이야기다.

  어쩌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던 가족들의 인생을 지금과 같이 결정해버린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 인해 남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 및 네 자식들에 대해, 비난하는 시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옹호하는 시각도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그것도 제3자가 아닌 조총련계 재일교포인 감독이 자신의 가족을 카메라에 담아서 말이다.

 

 

 

 

  2. 영화 줄거리 및 감상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답게 자막으로 시작한다.

  해방 후 발생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민단 및 조총련으로 분열된 재일교포의 상황, 1960년대와 1970년대 9만명이 넘는 조총련계 교포들이 북송사업(귀국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일, 그렇게 북한으로 간 교포들은 두 번 다시 일본땅을 밟을 수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양영희 감독의 세 오빠도 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연이 차례로 나열된다.

 

  그러고나서야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2004년 정월, 양영희 감독과 부모님이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면이다. (다만, 좀 의외였던 것은 재일교포 1세인 부모님들도 거의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한국어는 간간히 섞어 쓰는 정도라는 것임.  하긴 1년 반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중국에서 생활하고도 한국어에 무심코 중국어 단어 섞어 썼던 내 경험을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생활한 기간이 긴 교포 1세들이 우리말에 능숙할 거라 여기는 게 말이 안 됨. ^^;;) 

  아버지와 딸은 첫 등장 부분부터, 이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인 '민족' 과 '국적' 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혼기가 한참 지난 딸이 남자를 한 번도 데려오지도 않는다고 타박하는 아버지' 와 '어떤 남자를 데려왔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딸' 의 평범한 대화였다.  맨 처음 아버지는 그저 '네가 사랑하는 남자이기만 하면 괜찮다' 라고 하더니, 슬그머니 '미국놈과 일본놈만 아니면 괜찮아.' 라고 조건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어쨌든 조선사람이어야 한다.' 라며 더 까다로운 조건을 또 붙인다. ^^;;  그러자 딸은 국적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볼멘 소리를 하고, 아버지는 은근슬쩍 말을 돌려 오랫 동안 부녀간 갈등의 씨앗이었던 이 위험한(!) 대화에서 빠져나간다.

 

  제주도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조총련 초기시절부터 활동한 조총련의 간부였다.

  해방 후 일시 귀국했다가 남한의 상황에 실망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조총련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재일교포가 진학 또는 취업 문제에서 여러 차별을 받는 점을 생각해서, 북한이 재일교포를 상대로 귀국사업(북송사업)을 벌일 때 아직 10대였던 세 아들 모두를 북한으로 보냈다.  오빠들과 터울이 많이 져서 너무 어렸던 양 감독만 부모 곁에 남아 일본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가족은 몇 년에 한 번씩 어렵게 만날 수 있는 재일교포판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조총련 간부로 활동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는, 일본 살림에 더해 세 아들의 평양 살림까지 돌보게 되었다.

  그것도 몇 년 동안 일시적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라, 무려 30년 동안...!  북한의 경제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어려워졌고, 10대 때 북한으로 간 세 아들은 그 세월 동안 장성하여 아내를 맞고 자식들을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짊어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30년 동안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무척 의아했던 것이,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는 달리, 세 오빠들의 1980년대 평양 살림살이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에 서울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의 기억을 되짚어봤을 때, 양 감독 오빠들의 평양살이가 나의 서울살이보다 훨씬 유복해보였다. -.-;;  북한에서는 평양과 지방의 생활 수준 차이가 심하다더니, 그래도 평양에 거주하는 덕에 잘 사는 편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 관련한 기사들을 검색해보니, 오빠 가족들은 평양사람들 중에서도 상류층 사람들이다...!

  이미 북한 경제가 엉망이 된 1980년대 초반에 프로판가스용 가스렌지와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게다가 모두 북한에서는 무척 귀하다는 일본제품임.  하긴 남한에서도 1980년대 일본 제품은 부자 또는 일본 다녀온 지인에게 선물받은 사람이나 쓸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북한에 있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항상 걱정하며 마음 쓴 덕분이다.  영화를 보면 일본에 거주 중인 부모님네도 부자로는 안 보이던데, 30년 동안이나 세 아들네 살림을 지원해주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약, 옷, 부엌살림, 손난로(한 손자가 난방 안 되는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동상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후 보내기 시작한 품목임.), 심지어 연필과 지우개까지 보낸다.  어머니가 양 감독에게 말한대로 '부모니까 할 수 있는 행동' 이다.  

  심지어 세 오빠들이 부모님의 결혼 50주년과 아버지 진갑을 축하한다며 평양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조차, 그 비용은 부모님에게서 나왔다.  남한에서도 언론을 통해 유명해진 '옥류관' 에서 100명 정도 되는 하객을 모아 부모님을 위한 잔치를 벌이기 위해, 부모님 스스로가 돈을 지불한 셈이다.

 

  영화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그런 정성에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북한으로 보낸 데 대한 죄책감도 한 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디어 평양' 의 후속편인 2009년도 영화 '굿바이 평양(Goodbye, Pyeongyang)' 을 보면, 큰 오빠가 오랜 세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연이 나온다.  그 동안 어머니가 우울증 약을 부쳐줬는데, 일본 법률이 엄격해지면서 환자가 의사를 직접 만나지 않고는 약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어머니는 전화로 북한의 며느리에게 약을 구하지 못 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마치 제 날짜에 빚을 못 갚게 된 사정을 설명하는 사람마냥 무척 미안해 한다.

  비록 차별은 받을지언정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던 일본에서 살 때, 큰 오빠는 클래식 음악과 커피에 푹 빠져 지냈다.  겨우 6살 밖에 안 된 막내 여동생에게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줄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다.  그런 감성적인 성격의 오빠가 모든 서양 음악이 금지되는 생활을 하면서(지금은 클래식 음악은 허용된다고 하지만)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조총련 간부로서 조총련에 평생을 다 바친 아버지조차 후회의 감정을 내비친다.

  아버지는 '만일 보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라며 '네 오빠들을 보낼 때 정세를 너무 낙관했다.  곧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북한 주도의 남북통일,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조만간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다는 뜻임.)' 라고 털어놓는다.

  양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아버지가 오빠들을 보낸 것을 사실은 후회하고 있음을 양 감독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직접 말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저 오빠들을 떠나보낸 걸 후회한 적 없느냐는 자기 질문에,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촬영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해서, 자신도 무척 놀랐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식들은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었다.  그리고 자식들의 인생을 그렇게 결정지은 게 바로 자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 전보다 더 북한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북한에서 지낼 수 밖에 없는 자식들의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을테고,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도 덜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영화 끝부분에서는 국적 문제로 딸과 오랫동안 대립했던 아버지가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해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딸이 '(지금 상태로는) 외국을 다니는 게 너무 힘이 든다' 며 남한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고 말하자, '이제는 정세가 변했으니 네가 하는 일에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고 대답한 것이다.  뜻밖의 반응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못 참으며 '나중에 나를 따돌리거나 심술부리지 않기다.' 라고  다짐받으려는 딸에게, 아버지도 장난스레 웃으면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심지어는, 이전에 딸이 한국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자 '너는 아버지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거냐?' 라며 엄청나게 화를 냈던 것과는 달리, '만일 내가 서울로 시집간다면 어쩔거냐?' 는 딸의 질문에 '좋지.  한국사람도 조선사람이니까.  이 아버지처럼.'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건강이 악화되어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게 된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국적 문제와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문제로 아버지를 미워했던 딸은, 비록 자기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방식이지만 어쨌거나 아버지도 열심히 살았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사상적으로 안 맞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딸로 태어나서 행복하다.' 라고 말하고, 병든 아버지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두 부녀는 함께 '화이팅! 다시 평양에 가자!' 라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딸은 아버지에게 평양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정치적인 의미가 아닌 가족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3. 뒷 이야기

 

 

  이 영화가 남한에서 개봉된 후, 양영희 감독은 북한의 오빠 가족들을 못 보게 되었다.

  북한의 실상을 담은 영화를 북한 당국의 허락없이 찍고 개봉했다며, 북한 입국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편지 왕래는 허용이 된다고 하지만, 검열이 심해서 안부 이외의 자세한 이야기는 편지에 쓸 수가 없다고 한다. 

  양 감독이 처음 이 영화를 찍을 생각을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를 했다.  행여나 이 영화 때문에 평양에 머무는 세 아들 가족이 무슨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빠들이 '영희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게 하라.' 며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기 때문에, 양 감독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희는 자기 원하는대로 살게 하라.' 는 말의 울림이 참 깊다.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살지 못 했음을 반증해주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서 병이 깊게 든 몸으로도 아들, 손주들이 있는 평양으로 다시 가고 싶다 했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평양 땅을 밟지 못 했다.

  이 영화 후속편인 '굿바이 평양(Goodbye, Pyeongyang)' 을 보면, 결국 아버지는 몇 년 간의 투병 생활 끝에 2009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조총련 가족 이야기(2) - 굿바이 평양(Goodbye, Pyeongyang)(http://blog.daum.net/jha7791/1579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