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연극

첨밀밀(甛蜜蜜)

Lesley 2011. 6. 28. 00:28

 

  오늘의 포스트는 곧 다가올 홍콩 반환 14주년(7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포스트의 소재는 홍콩의 진가신(陳可辛)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여명(黎明)과 장만옥(張曼玉)이 주연한 1996년도 영화 첨밀밀(甛蜜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듬해인 1997년에 개봉했는데, 공교롭게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던 바로 그 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홍콩영화가 인기를 잃은 후로, 드물게 우리나라에서 흥행성적도 괜찮았고 작품성도 인정받았던 영화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두 남녀가 10년 동안 사랑하고 이별하고 재회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알콩달콩한 로맨틱 코미디 또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틀림없이 하품만 씹게 될 것이다. ^^;;  그 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사 속에 묻어나는, 특수한 역사를 지닌 홍콩이라는 작은 도시가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홍콩 반환이라는 사건 속에서 홍콩인들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생각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홍콩에 대해 털끝만큼도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주인공들이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넘어와 겪는 사연을 보면,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TV나 영화 속에서 본 화려한 서울의 이미지에 혹해서 '서울이란 곳은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 가서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곳' 으로 여기며 상경했던 사연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영화 감상기는 두 남녀간의 사연 그 자체가 아닌, 두 사람의 사연에 잘 녹아있는 홍콩이라는 곳이 갖는 의미에 방점을 찍고 써볼까 한다.     

   

 

   


 

 1. 1986년 - 만남

 

   여소군(여명)은 중국 우시(無錫, 무석)에 살던 청년이다.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를 고향에 남겨둔 채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왔다.

 

 

여소군 :  "(여자친구 소정에게 보내는 편지로)  친애하는 소정!  나는 이미 잘 도착했어.  알고보니 홍콩은 정말 멀더군.  여기는 우시와 모든 게 달라.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건물도 높아.  듣자하니 도둑도 아주 많대.  광동인들은 말하는 게 거칠고 목소리도 커.  소정, 정말 네가 보고 싶어."

 

 

  홍콩과 대륙(중국인들은 홍콩, 마카오, 대만과 중국 본토를 구별하여 말할 때 흔히 대륙이라고 부름)의 경제 수준 차이는 지금도 크지만, 중국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못 했던 1980년대에는 그 차이가 엄청나게 컸다.

  가난하고 순박한 대륙 청년 여소군의 눈에는, 홍콩에 와서 처음 접해본 무선호출기(일명 삐삐 ^^), 현금인출카드, 맥도날드가 무슨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것들로 보인다. (하긴 중국까지 말할 것도 없이, 중국보다 경제수준이 훨씬 높았던 우리나라에도 1986년에는 저런 것들 구경하기 힘들었음.  특히 현금인출카드라는 건 아예 없었던 듯...)  게다가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으니 이역만리 외국에 뚝 떨어졌다고 해도 될만한 상황이다.

 

 

  홍콩의 언어

  홍콩의 공용어는 광동화와 영어임.  일상생활에서는 광동화를 주로 쓰고, 영어는 행정기관, 금융기관, 그 밖의 각종 공공기관, 호텔 등에서 광동화와 병용됨.

  광동화는 중국의 광동성 및 홍콩에서 쓰이는 방언임.  중국의 표준어인 보통화와는 발음이 완전히 다른데다가 문법적인 차이까지 있어서, 사실 방언이라기 보다는 외국어에 가까울 정도임.  광동화가 보통화보다 고대 중국어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광동인들은 이 광동화야 말로 한족의 정통 언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  그래서 오히려 표준어인 보통화만 구사할 수 있는 북방 사람들을 촌닭 취급하며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함. ^^;;

 

 

  하지만 이 낯선 홍콩땅에서 겪은 가장 큰 사건은 이교(장만옥)를 만나게 된 일이다.

  원래 이교와 여소군의 관계는, 맥도날드의 직원과 손님으로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끝날 뻔했다.  하지만 광동화도 영어도 못 하는 여소군의 처지가 얄궂게도 이교와 여소군 사이를 연결해주는 끈이 된다.

  여소군은 고향에서는 구경도 못 한 맥도날드의 화려함(?)에 끌려 맥도날드 직원으로 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광동화와 영어를 모두 하지 못 해서 그럴 수가 없다.  마침 이교는 맥도날드 말고도 영어학원에서도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영어학원에 새 수강생을 소개해주면 소개비를 받을 수가 있다.  그래서 약삭빠르고 영악한 이교가 어리버리한 여소군에게 접근한다.

 

 

이교    :  "(광동화로)  당신 대륙에서 막 건너온 사람이죠?"

여소군 :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교    :  "(광동화로)  그야 당신이 하는 광동어를 들으면 당장 알 수 있죠.  그렇게 서툴게 말하니..."  (아주 대놓고 무시함. -.-;;)  "영어 못 하면 정말 골치아파요."

여소군 :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교    :  "(광동화로)  홍콩의 몇몇 학원에서는...  내 말 알아들어요?"

여소군 :  "못 알아듣겠어요."

이교    :  "(보통화로 바꿔서)  홍콩의 어떤 학원은 전문적으로 대륙인들한테 영어를 가르쳐요.  사실 영어 배우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아요." 

여소군 :  "(이교의 보통화를 듣고 반가워 흥분하며)  앗, 당신도 대륙에서 왔어요?"

이교    :  "(얼른 광동화로 바꿔서)  당연히 아니죠!  내가 하는 광동화를 들으면 알 수 있잖아요."

여소군 :  "하지만 방금 전에 보통화도 잘 하던데요.

이교    :  "(건방진 태도를 취하며 보통화로)  보통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륙인인 것은 아니죠.  (다시 광동화로)  하지만 광동화를 못 하는 사람은 반드시 대륙인이죠."

 

 

  그렇게 맥도날드와 영어학원을 매개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곧 친한 사이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교가 여소군을 부려먹는 사이가 된다. -.-;;  하루 빨리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이교는 맥도날드와 영어학원에서 일하는 것도 모자라, 꽃집에서까지 일을 한다. (투잡족도 아니고 쓰리잡족...! -0-;;)  그리고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여소군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  반대급부로, 푸짐하게 밥을 산다든지 빨간 비디오를 한 번에 몇 개씩이나 빌려주기도 하면서... ^^


   

 

 2. 1987년 - 사랑과 우정 사이

 

   섣달 그믐밤에서 설날 새벽까지, 이교는 축제 분위기로 들뜬 거리에 노점을 차리고 등려군(대만 출생의 유명한 여가수인데 대륙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음.)의 노래 테이프를 판다.

  여소군도 이교 옆에서 함께 일한다.  하지만 의외로 테이프는 팔리지 않고, 남에게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노점을 차린 이교는 암담한 심정이 된다.  여소군이 따끈한 웨이타나이(홍콩에서 잘 마시는 음료수 이름이라고 함.)를 사와 위로하듯이 쥐여주자, 이교가 힘없이 입을 연다. 

 

 

이교    :  "작년 설에 광저우(廣州, 광주)에서 사촌여동생이랑 노점을 차렸는데, 테이프를 4000개 넘게 팔았어."

여소군 :  "우리 고모가 그러셨어.  어떤 사람이 등려군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이 대륙인이라는걸 모두 알게 되는 거라고.  그래서 등려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사러 오지 않는다는 거야."  (홍콩에서 대륙인의 위치가, 참...)  "(뒤늦게 이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어?  너 광저우에 있었다고 했어?"

이교    :  "작년에 광저우에 있었어.  재작년에도.  올해는 아니지.  나 광저우에서 왔거든."  (대륙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종종 하더니만, 이교 역시 대륙인이었음. ^^;;)

여소군 :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하하... 사실 나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어.  그러면 우리는 동지네."

이교    :  "(벌컥 화내며)  동지는 무슨 놈의 동지!  우리는 광동화로 말하고, 홍콩 비디오를 보고, 웨이타나이를 마셔!  우리는 홍콩과 가깝단 말야."  ('같은 대륙인이라도 나는 너랑 달라' 하며 우기는... ^^;;)

여소군 :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래, 너의 태도하며, 치장하는거 하며, 행동거지하며...  게다가 생긴 것까지 전부 홍콩인이랑 똑같지."

이교    :  "(다시 풀죽은 태도로)  나 가지고 노는 거니?"

여소군 :  "너야말로 나를 많이 가지고 놀았지."
이교    :  "잘 알면서, 내가 너를 이용하게 두니..."

여소군 :  "(씁쓸하게)  만일 내가 너한테 이용당하지 않으면, 네가 나를 찾지 않을까봐 걱정됐어.  그러면 나는 홍콩에 하나 밖에 없는 친구마저 잃게 되잖아."

이교    :  "(처음으로 솔직하게)  사실 나도 홍콩에 친구가 별로 없어."

  


  그리고 이 날 두 사람은 여소군의 방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헤어지려다가, 그만 어찌어찌하여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고향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를 둔 여소군이나, 어떻게든 홍콩에 자리를 잡고 싶어 대륙인과의 결혼은 꿈에도 생각 안 하는 이교나, 자신들의 관계를 '연인' 으로 규정지으려는 용기는 없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외롭고 삭막한 홍콩 생활 속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서로 밖에 없는데, 헤어지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계속 이어나간다.

 

  이교는 여전히 이재에 밝아서, 하루에 몇 곳이나 되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번 돈으로 주식과 외환에 손을 대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느 무더운 저녁, 이교와 여소군은 주식시장에 나갔다가 한 쌍의 부부를 본다.  그 부부는 잘 나가는 주식을 사지 못 한 것을 두고 서로 네 탓이네 내 탓이네 하며 다툰다. 

 

 

이교    :  "겨우 이천원(2000 홍콩달러를 말하는 듯) 가지고 저렇게 싸우다니."

여소군 :  "오늘 저녁은 덥잖아.  날씨가 더우면 사람은 쉽게 화를 내게 되지." 

이교    :  "내가 장담하는데, 저 부부는 분명 손바닥만한 집에서 대판 싸움이나 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낼거야." 

여소군 :  "그래도 저 부부 밤에는 서로 사랑할거야."  (역시 순수하고 낙천적인 여소군... ^^)

이교    :  "천신만고 끝에 홍콩에 왔는데, 대충대충 한평생을 보낼 수는 없어."  (역시 이교다운... ^^;;)

여소군 :  "에이,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사는 건 아니잖아."

이교    :  "가슴에 큰 뜻을 품는 게 뭐가 나빠?  사람은 큰 뜻을 품어야만 이상도 가질 수 있는 거야."

여소군 :  "나는 이상이 없어."

이교    :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열심히 저축해서 우시에 있는 애인하고 결혼해서 홍콩에 데려오고 싶다고, 자주 말했잖아?"

여소군 :  "그것도 이상이라고 할 수 있어?"

이교    :  "당연하지!  그저 이상이 좀 작을 뿐이지.  다행히도 나는 대륙에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애인 같은 건 없어.  그렇지 않다면, 결국에는 대륙인에게 시집가야 하겠지.  그러면 내가 홍콩에 뭐하러 왔겠어?"

 

 

이교    :  "몇 년 후에 내 집을 살거야.  나는 홍콩으로 옮겨와 살고, 대륙에도 한 채 사서 엄마한테 드릴거야."  (이 부분은 항상 이익만 따지며 사는 것 같은 이교의 순수한 면을 보여줘서 참 좋았음.)

여소군 :  "그게 가능할까?"

이교    :  "왜 불가능해?  여기는 홍콩이야!  목숨 걸고 일한다면 뭐든지 다 가능해!"  (미래에 대해 희망과 확신을 가진 대사임에도, 웬지 안쓰러웠음. 홍콩이 정말로 기회의 땅이던가...)  "여소군, 우리는 좋은 친구지?"

여소군 :  "Sure!" 

이교    :  "너는 나와 함께 고생도 했고, 또 나를 즐겁게도 해줬지.  사실, 너는 홍콩에서 제일 친한 친구야."

여소군 :  "Thank you!"

이교    :  "오, 이제 영어도 몇 마디 하는데."

여소군 :  "Of course!  하하하..."  (영어와 중국어로 서로 묻고 대답하는 이 부분에서, 두 사람 모두 정말 예뻤음. ^^)

 

 

  하지만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이교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안마소에 나가게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이교는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그런 불안정한 마음 때문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여소군과의 관계에도 회의를 느끼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두 사람이 각자 이별의 아픔을 삭이는 동안, 불과 10년도 안 남은 홍콩 반환 때문에 홍콩의 분위기도 두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울적해진다.  중국정부가 반환 후 50년 동안 홍콩의 자유경제체제와 자치를 약속한다고 공표했지만, 정말 그 약속을 지키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여소군 :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요즘 홍콩인들은 모두 이민가야 한다고 말해.  유럽이나 캐나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야.  대륙인들은 모두 홍콩으로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하지만 정작 홍콩인들은 다른 곳으로 가기를 간절히 원해."  (홍콩은 중국과 영국 사이를 오간 역사로 봐도 그렇고, 사회주의 국가 안의 자본주의 도시로 남아있는 지금의 상황으로 봐도 그렇고, 정착자들의 도시라기 보다는 뜨내기들의 도시라는 느낌이 큼.)

 

 

  그렇게 여소군과 이교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여소군은 고향의 여자친구 소정을 홍콩으로 불러들여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교 또한 안마소에서 만난 조폭의 두목(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귀엽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구양표와 이어진다. 

 

 

 

 3. 1990년 - 재회와 이별

 

   여소군이 소정과 결혼하던 날, 비록 청첩장은 보냈어도 올까 싶었던 이교가 남자친구 구양표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묘하게 얽힌 두 커플은 나름 친한 사이가 된다.   여소군과 이교는 과거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 친구라는 이름으로 애써 태연하게 행동한다.  구양표는 첫눈에 이교와 여소군이 과거에 연인이었음을 눈치채지만, 아주 쿨~~~ 하게 넘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정은 자기를 이모저모 챙겨주는 이교에게 금세 호감을 느끼며 친한 사이가 된다. (어떤 면에서는 소정이야말로, 이 영화 최고의 피해자인 듯... ㅠ.ㅠ) 

 

  돈 많은 조폭 두목 남자친구 덕분에 이교는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꽃가게와 웨딩샵도 모자라 이제는 부동산 사무실까지 열게 되었다.  그런 이교를 축하해주려고 여소군 부부도 개업식에 찾아온다.

  소정이 함께 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던 여소군과 이교지만, 소정이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이미 했던 말을 또 하거나 상대방이 한 말과 전혀 상관없는 말로 맞장구를 치는 등 자연스럽지 못 한 태도를 보인다.  아직 옛날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에 상대방을 태연하게 대하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나마 옛날 함께 했던 시절과 현재의 회한을 내비치는 두 사람... 

 


여소군 :  "(담담하면서도 애틋하게)  너는 드디어 네가 되고 싶어하던 사람이 되었구나.  이제는 누구도 너를 대륙인이라고 부르지 않지?"

이교    :  "(자신의 성공에 들뜬 표정으로)  5성급 호텔에 가면 사람들이 나한테 영어를 써.  내가 상점에 가면 판매원들이 감히 나를 무시하지 못 해.  지난 달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지었지.  고향 사람들이 전부 나를 알아보지 못 했어.  엄마한테 말했어, 나도 마침내 홍콩인이 되었다고 말이야.  (갑자기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엄마는 그 집을 보지 못 했어.  집을 다 짓기 전에 이미 세상을 뜨셨거든."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지내던 두 사람은 결국 더 이상 감정을 자제하지 못 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기들 관계를 솔직히 털어놓기로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 구양표가 경찰에 쫓겨 홍콩에서 도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교는 여소군과의 일을 고백하려고 구양표가 탄 배에 올라갔다가, 모든 걸 다 잃은 구양표를 보고 차마 헤어지자는 말을 못 하고 그와 함께 해외로 밀항하기로 한다.

  여소군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이교가 떠나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것을 보고도, 아내 소정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이교가 자신과 함께 하든 못 하든,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아내를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    :  "그녀도 당신을 사랑해?" 

여소군 :  "나도 모르겠어."

소정    :  "그러면 당신은 왜 나하고 결혼한 거야?"

여소군 :  "그게 나의 이상이었으니까."

소정    :  "(여소군의 뺨을 때리더니 급하게 짐을 챙기며)  가자, 나와 함께 가는거야.  짐을 싸.  우리 당장 우시로 돌아가는 거야.  어서 짐을 싸.  우리 지금 돌아가.  (문득 멈추고)  만일 홍콩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  그렇지?  (갑자기 힘이 다 빠져 속삭이듯이)  하지만 결국 당신은 홍콩에 왔어.  그 다음에는 이교도 왔어.  마지막으로... 나도 오고 말았어."  (갑자기 이 모든 게 정말로 현실이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은 분위기...)

여소군 :  "(고개를 푹 숙이며)  소정, 우리는 돌아갈 수 없어."  (단순히 우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인 듯.)
 

 

  그렇게 두 사람은 이혼을 한다.

  여소군은 홍콩의 유일한 친척인 고모가 자신에게 물려준 유산을 소정에게 남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4. 1993년 -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연

 

 

  두 사람은 미국의 뉴욕이라는 한 공간에서 살게 되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방 역시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다.

  여소군은 홍콩에서 자신을 요리사로 키워줬던 주방장과 함께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일한다.  외롭게 지내는 여소군을 보다못한 주방장이 한 아가씨와 선을 보도록 주선하지만, 이교를 잊지 못 하는 여소군은 요지부동이다. 

  이교는 이교대로 한 곳에 자리잡지 못 하고 구양표와 떠돈다.  이교와 구양표가 겨우 한 곳에 정착할 결심을 했을 때, 그만 구양표가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생긴다.  그렇게 이교는 이역만리 타국에 홀로 남겨진다.

  

  이교의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추방될 상황에 처했을 때, 두 사람의 인생이 다시 교차점을 찾게 된다.

  이교는 구양표를 잃고 아무런 의욕없이 미국 이민국 직원들이 이끄는대로 공항으로 가던 중, 차창 밖으로 여소군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이민국 직원의 차에서 뛰쳐나가 여소군을 부르지만, 도로의 소음 때문에 여소군은 듣지 못 한다. 

  비록 두 사람이 만나지는 못 했지만, 그 일로 이교는 미국에 머물게 된다.  불법체류자가 되는 걸 감수해가며 미국에 머문 것은, 예전에 홍콩에서 그랬듯이 다시 한 번 성공을 꿈꾸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여소군도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여소군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5. 1995년 - 재회, 그리고 결말

 

 

  이교는 뉴욕에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가이드로 일하던 중 드디어 영주권을 얻고, 고향을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관광객들과 이교 사이에 오가는 말은, 홍콩 반환을 목전에 둔 홍콩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이교가 여소군을 막 만났던 1986년에 비해 무섭게 성장한 중국 경제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관광객 1 :  "아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신 광저우 사람이면서요."

이교       :  "맞아요, 여기 온지 거의 7년이 됐어요."

관광객 1 :  "돌아가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어요?"

이교       :  "다음달에 돌아갈 거에요." 

관광객 2 :  "맞아, 맞아,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지.  지금은 전부 돌아오고 있어.  많은 홍콩인들이 우리 있는 곳에 와서 일을 한다니까."

관광객 1 :  "그래, 이전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후회하지.  아무래도 국내에 돈 벌 기회가 비교적 많으니까." 

관광개 2 :  "맞아."  (관광객 1과 관광객 2처럼 어디에서나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은 정말 피곤함. ㅠ.ㅠ)

 

 

  이교가 여행사에 들려 고향으로 갈 비행기표를 발권해서 나가는데, 중국어권 전체의 스타였던 등려군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다.

  등려군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이교는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배회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의 죽음은, 그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자란 이교에게도 자신의 한 시대(젊고 패기만만하고 성공을 위해 거침없이 질주했던 시절)가 저물었다는 느낌을 받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등려군의 노래는 여소군과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소군 역시 등려군 사망 소식을 접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는다.

  정처없이 걷다가 문득 어떤 상점의 쇼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TV 앞에 멈춰서서 등려군의 사망 뉴스를 본다.  어느새 이교도 그 상점 앞에 와서 멍하니 TV를 바라본다.

  이윽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상대방을 응시한다.  너무 뜻밖의 만남이라서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다가 TV에서 등려군의 첨밀밀이 울려나오는 가운데, 두 사람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따뜻한 미소가 나타난다. 

 

  영화의 마지막은 영화의 시작과 맞물린다.

  1986년, 여소군이 탄 기차가 홍콩역에 막 도착했다.  여소군은 목적지에 도착한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졸고 있다가, 자기와 뒷머리를 맞대고 있던 뒤쪽 좌석 사람이 갑자기 움직이는 통에 놀라서 깨어난다.  카메라가 비춰주는 뒤쪽 좌석에 앉아있던 이가 바로 이교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