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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 가족 이야기(2) - 굿바이 평양(Goodbye, Pyeongyang)

Lesley 2011. 8. 26. 00:02

 

  이번에 포스팅 할 영화는 먼저번 포스팅한 '디어 평양(Dear Pyongyang)' 의 후속편인 2009년도 영화 '굿바이 평양(Goodbye, Pyeongyang)' 이다.

  이 작품 역시 '디어 평양' 과 마찬가지로, 양영희 감독이 조총련계 재일교포인 자신의 가족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다만, '디어 평양' 이 딱히 누가 주인공이랄 것 없이 양 감독의 가족 모두를 비슷한 비중으로 촬영한데 비해, '굿바이 평양' 은 일본어 제목인 '愛しきソナ(사랑스런 선화)' 에서 알 수 있듯이 양 감독의 조카 '선화' 를 위주로 촬영했다. 

 

 

 

 

 

 

  양 감독은 조카들 중 가장 어리며 유일한 여자아이인 선화를 그저 예뻐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다.

 

  양 감독이나 선화나 모두 북한과 일본이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 틈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두 문화 중 어느 것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쪽이고, 어느 것이 특수한 상황에서 체험하는 쪽인가' 가 정반대라는 점뿐이다.

  양 감독은 일본에서 비틀즈 음악과 연극에 심취해 성장기를 보냈지만, 일단 학교(조총련계 민족학교)에 가면 조국, 충성, 혁명이란 말을 들으며 폐쇄적인 북한 문화 속에서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전혀 다른 두 문화 사이의 모순 속에서 힘든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그에 비해 선화는 고모와는 완전히 반대로 두 문화의 간극을 체험하며 자랐다.  선화의 일상은 북한식 교육과 체제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일본에서 가끔 찾아오는 고모와 조부모가 하는 말과 그들이 보내주는 이런저런 선물을 통해 바깥 세상의 문화를 맛보았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생각했던 것은, 역시 양 감독의 오빠들의 가족은 평양의 상류층이라는 점이다. ^^;;

 

  어떤 탈북자가 이 영화를 보고서 '저렇게 볼링장에 다니고 따로 장소를 대여해서 결혼식 하는 사람은 북한의 상위 1% 계층이다. 나도 북한에서 살았지만 저 사람들의 생활이 실감나지 않는다.' 라고 했다고 한다.

  상위 1% 라는 말이야 좀 과장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부모님이 애태우며 지원해준 덕분에 대다수 북한 사람들보다 부유하게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 첫부분에 등장하는 3살짜리 깜찍한 선화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을 보면, 지금의 남한 아이들과 견주어봐도 차이가 없을 정도다.  나중에 선화가 중학생이 되어 치아에 교정기를 끼고 있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남한의 여중생이다.

 

  전에 어떤 학자가 '키는 권력이다.' 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펴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다.

  '키가 큰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유리한 이유는, 단순히 미적인 면에서 좋아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키가 큰 사람은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모두가 무의식 중에 알고 있기 때문에, 권력지향적(!)으로 키 큰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라는 설명이었다.  그 글을 읽을 때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화 오빠들과 사촌 오빠들의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키와 권력(그리고 권력과 불가분 관계인 재력)의 밀접한 관계를 설파한 그 학자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대다수 아이들에 비해 양 감독 조카들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좋은 것은, 조카들이 남들보다 훨씬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라 영양상태가 좋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기' 라고 부를 정도로 끔찍했던 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북한 남자 청소년의 평균키가 158~160센티미터(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저 범위에 속함.)라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양 감독의 조카들은 북한식 억양으로 말한다는 것 빼고는, 키, 머리 모양, 옷차림 그 무엇 하나 같은 또래 남한 남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다.  원래도 이 집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우월한 유전자' 가 내려오는 집안인데(아버지나 세 오빠나, 모두들 젊은 시절 외모가 무척 준수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뒷받침으로 잘 먹고 자란 덕에 키까지 훤칠한 것이다. 

 

 

 

  물론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결국 북한이다.

 

  일본의 할머니가 아들들과 손주들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며 생활비와 온갖 물건을 보내줘도, 심각한 경제난의 그늘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다.

  주방에는 일본에서 부쳐준 예쁜 그릇들이 가득하건만, 그 그릇들을 마음껏 쓰지는 못 한다.  그릇이 너무 귀해서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돗물은 하루 2시간 밖에 공급되지 않고 전기 역시 통제되기 때문에 자주 쓸 기회가 없는 것이다.  양 감독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올케들에게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고 했다. 

  일본에서 고모가 찾아올 때마다 초코맛 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조카들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그렇게 넉넉하게 사는 집 아이들에게도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특별한 경우에나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인 것이다.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것이, 우리처럼 '초콜릿' 이라는 영어를 그대로 차용해 쓰지는 않더라도 초콜릿에 해당하는 말이 분명히 따로 있을 것 같은데, 조카들이 초코 아이스크림을 '새카만 것' 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었음. ^^)

 

 

 

  이렇게 특이하고 상호모순적인 환경(북한에서 자유주의 문화를 접하고, 경제난 속에서도 풍족함을 누리는 환경)은 선화에게서 여러 상반된 모습을 끌어낸다.

 

  선화가 어른들 앞에서 재롱을 떨며 시를 읊는 장면이 두 차례 나온다.

  그런데 평범한 동시가 아니라, 모두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시다. -.-;;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입에서 그런 시가 웅변적인 말투로 나오는 것을 듣는 것은 아주 기묘한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선화가 어린 마음에도, 기록으로 남겨도 되는 말과 그렇지 못 한 말을 구분하며 카메라를 의식하는 장면도 나온다.

  먼저, 초등학교 다니는 선화가 겨울철이라 교복치마 속에 타이즈를 입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보내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타이즈다.  고모가 '미키마우스는 미국건데 괜찮아?' 라고 묻자,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의식해서 직접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다른 사람들은 이게 뭔지) 잘 모르니까 괜찮아.'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중학생으로 성장한 선화가 고모와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선화가 아예 '카메라를 꺼달라.' 고 요구한다.  그렇게 카메라에 담지 못 한 고모와 조카딸 사이의 대화를, 영화는 자막으로 보여준다.  선화는 카메라가 돌아갈 때에는 연극 같은 것에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자, 고모에게 그 동안 어떤 연극을 봤느냐며 호기심을 보인다.  고모가 '시카고, 레 미제라블, 코러스라인...' 등 제목을 쭉 대자 선화는 어리둥절해 한다.  북한 바깥 세상에서 사는 고모와 조부모를 둔 덕에 다른 아이들보다 외래문화에 노출된 선화에게도, 너무 생소한 제목들이었기 때문이다.  선화의 상황을 미처 생각 못 하고 대답했다는 걸 깨달은 고모가 미안하다고 하자, 선화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조차 안 듣는 것보다는 나으니, 더 이야기해달라.' 고 한다. 

  그저 별 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 떨며 놀 궁리나 하는 게 당연한 나이의 아이인데도, 자기네 체제 속에서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말을 할 때에는 당국의 단속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씁쓸했다.

 

 

 

  그렇게 선화와 연극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이후, 양 감독은 지금까지 선화를 못 만나고 있다.

 

  이 '굿바이 평양' 의 전작인 '디어 평양' 을 북한 당국의 허락 없이 제작하고 개봉한 것이 문제가 되어, 북한으로 입국하는 게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학생이던 선화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몇 년 후, 선화는 고모에게 북한의 최고 명문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영문 편지로 알린다.  고모가 알려준 'I love you' 란 짤막한 영어를 앙증스레 말하던 대여섯살박이 아이가, 이제는 대학에 가서 영어로 편지를 쓸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디어 평양' 끝부분에서 병세가 심해져서 거동도 제대로 못 하던 아버지는, '굿바이 평양' 끝부분에서 다시 평양에 가서 자식들과 손주들을 만나고 싶다던 소망을 못 이룬 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북한의 암담한 상황과 어린 선화의 재치가 뒤섞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선화가 아직 어릴 때 양 감독이 평양을 방문해서 모두 모여있는데, 전기 사정이 워낙 안 좋은 평양이라 갑자기 정전이 된다.

  남자 조카들이 양초를 찾고 라이터를 켜는 등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하지만 선화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와중에도 카메라의 마이크를 켜달라고 하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일본에 가서 이 북새통 정전 운신이 오빠집(선화의 큰집, 즉 양감독 큰 오빠의 집)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전이 된 이 집은 정말 멋있습니다.' 라고 재잘거린다.

  그리고 북한에서 자주 쓰는 '영광스럽다(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혁명 투사... 등등 북한은 유독 영광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듯... -.-;;)' 는 말을 이용해서 과장된 말투로 '아~~~ 영광스럽게 정전되었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어둠 속에서 사촌오빠들과 고모가 '영광스럽게 정전되었다니!' 하고 소리내 웃는 가운데, 영화는 끝난다.

 

 

조총련 가족 이야기(1) - 디어 평양(Dear Pyongyang)(http://blog.daum.net/jha7791/157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