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각종 행사

하정웅 기증전 - 영친왕(英親王)과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삶

Lesley 2011. 12. 21. 00:02

 

  지난 달, 하얼빈 일당 중 이제 하얼빈에 유일하게 남은 이가 잠시 귀국하게 되어, 종로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왕 만나러 시내 나가는 김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서 경복궁 바로 옆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하정웅 기증전' 을 관람했다. (그런데 이 전시회가 상설 전시회가 아니라서 당연히 유료 관람일 줄 알았는데, 무료 관람이네~~ 얼쑤, 좋다~~ ^0^)

 

  하정웅씨는 각종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재일교포인데, 상당량의 문화재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우리나라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 제목은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왕비의 일생' 였다.  하지만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보다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부부의 일생에 관한 쪽에 비중이 훨씬 높게 실린 전시회였다.  그래서 오늘 포스트에는 영친왕 부부에 관한 부분만 올려보려고 한다. 

 

 

 


 

 

 

  내가 영친왕 부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88올림픽 이전이었나 이후였나, 하여튼 1980년대 후반에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서 서울 시내 도로 한복판을 긴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TV 뉴스로 봤다.  TV 뉴스에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하는 것을 보고 '이방자? 무슨 이름이 저래?' 하는 생각을 했다. ^^;;  영자, 순자, 미자, 혜자 등등  '자(子)' 라는 글자 들어가는 이름의 슬픈 유래(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이 퍼졌다는 사실)도 몰랐고,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그런 이름은 무척이나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만 하던 때라, '황태자비씩이나 된다면서 무슨 이름이 저렇게 촌스럽지?'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0자' 라는 이름을 가지신 많은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ㅠ.ㅠ)

  그러다가 중학교 때였던가, 명절에 큰집에 갔다가 사촌 언니의 책꽂이에서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인 '세월이여 왕조여' 를 보고 영친왕 부부의 기막힌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기 직전, 11세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영친왕을 친일파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망국의 책임이 있는 조선 왕실의 마지막 계승자였다는 점, 조선의 왕실 최고위 인사로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활동을 보이지 않고 내내 일본의 지배에 순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런 논란이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1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가서 일생 대부분을 사실상 인질로서 지냈고,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던 때에도 14살이었기 때문에 황태자로서 정치력을 행사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고종(高宗)이나 순종(純宗)은 몰라도, 당시 나이도 어리고 정치에 관여한 적도 없는 영친왕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비록 본인의 의지는 아니더라도,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이나 일본 군부의 고위직(육군 중장)을 역임했다는 점은 여전히 생각해 볼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인데, 비록 다 망해가는 나라일지라도 한 나라의 왕위 계승권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연민만 할 수도 없는, 참 복잡한 삶을 산 인물이다.

 

 

(위 왼쪽) 11세에 덕수궁에서 부친인 고종과 함께 찍은 사진.

              영친왕은 고종이 늦게 본 아들이라, 아버지-아들이라기 보다는 할아버지-손자처럼 보임. ^^;; 

(위 오른쪽) 역시 11세에 찍은 단독사진.

(아래) 이것도 11시의 모습으로, 신하들과 함께 찍음.

 

 

(위 왼쪽) 아기 시절의 이방자. 본명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임.

(위 오른쪽) 부모와 함께 한 7세 때의 모습.

(아래 왼쪽)  역시 7세에 부모와 터울이 좀 지는 여동생 등 온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아래 오른쪽) 11세의 이방자의 모습.

 

  영친왕도 참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친왕비 이방자가 남편보다 더 기구하게 산 것 같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이 결혼은 양쪽 모두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다.  영친왕 입장에서야 피지배민족의 왕족이 어차피 인질로 끌려오기까지 한 상황에서 겪는 일이라고 체념하더라도, 지배민족의 왕족인 이방자로서는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방자가 원래 일본 태자비 후보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방자 개인으로서는 굴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영친왕이야 상대쪽인 일본에서 보더라도 동적적인 눈길이라도 받을 상황이었지만, 영친왕비는 상대쪽인 조선에서 보면 조선 왕실의 피를 흐리기 위해 일본 정부가 보낸 가증스러운 존재였을테니 말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첫아들 진(晉)과 함께한 영친왕 부부의 모습.

 

  첫아들 진(晉)은 생후 1년만에 급사했다.

  사망 전날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기도 했고, 공교롭게도 이 부부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서울의 창덕궁을 방문한 때에 죽었다는 문제도 있어서,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즉,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그 당시 조선인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과거에 고종을 모셨던 이들이 일본인의 피가 조선 왕실에 섞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어린 아이를 독살했다는 소문이다.

  사실 여부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영친왕비의 자서전인 '세월이여 왕조여' 를 보면, 나중에 둘째 아들을 낳은 영친왕비가 영친왕에게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조선땅에 가지 않도록 해달라.' 라고 부탁하고 영친왕 역시 선선히 응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친왕 부부 역시 창덕궁의 누군가가 첫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신빙성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갓난 아이의 죽음에 그런 정치성 짙은 소문이 돌 수 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참 살벌하다.

 

 

첫아들을 잃고 약 10년만에 어렵게 얻은 둘째아들 구(玖)와 함께 한 영친왕비. 

 

 

 

함께 승마를 하는 영친왕-이구 부자의 모습.

 

 

1940년대 영친왕이 오사카에서 사단장으로 근무할 무렵, 영친왕 가족의 모습.

 

 

 

귀국 후 칠보공예나 바자회 등으로 장애인 재활활동에 힘쓴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잘 알려진 것처럼, 영친왕 부부는 8.15 해방 후 곧 귀국하지 못 했다.

  영친왕 부부는 귀국을 희망했지만, 한국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영친왕의 존재를 꺼렸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왜 그렇게 영친왕을 냉대하고 귀국을 금지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공교롭게도 이승만 역시 조선 왕실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 말기 아직 신분제도가 있던 시절에 태어난 이승만은, 자신이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왕실의 서열로 따지면, 일개 대군의 한참 후대로 태어난 자신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영친왕의 지위가 더 높아서, 영친왕을 대하기 껄끄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해방 후 한국을 통치했던 미군정 사령부의 고위인사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한 마디 한 것 때문에, 이승만이 영친왕에 대해 경쟁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 고위인사가 미군정을 종료하고 한국측에 정권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이승만에게 '한국의 옛 왕실의 후계자를 왕으로 모셔 영국 같은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면 어떨까'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될 생각을 품고 있던 이승만이 영친왕을 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이승만 정권 내내 영친왕 부부는 귀국할 수 없었다.

  해방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에야 겨우 귀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 영친왕은 일본에서 앓던 병이 심해져 거의 식물인간 상태였다.  그 상태로 귀국해서 8년만에 세상을 떴다. 

  이방자 여사는 남편과 한국에서 거주하게 된 뒤로, 칠보공예품을 만들어 판매를 하거나 왕실 의상 전시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재활활동에 힘썼다.

 

 

(위 오른쪽) 장애인 재활활동에 애쓴 공로로 훈장을 받았을 때의 모습.

(위 왼쪽)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장면.

(아래) 명예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모습.

 

 

 

  이 전시회는 내년 1월 31일까지 한다고 하니, 일제시대 또는 구한말 조선 왕실에 관심 있는 이라면 한번쯤 시간 내서 가보면 좋을 것 같다.

  이 포스트에 올린 사진들 말고도, 영친왕 부부가 조선 왕족들이나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 하며, 다른 왕족들의 사진, 순종의 서북 순행 사진, 영친왕 부부의 공식행사를 담은 흑백 기록영화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가이드가 활동하는 시간에 맞춰 가면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이런 괜찮은 전시회가 무료이니 기회 닿는 분들은 꼭 가보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