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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Chinatown) 中 - 중국의 자취 찾기

Lesley 2011. 12. 7. 00:22

 

  차이나타운은 어지간한 대학 캠퍼스만큼도 안 되는 넓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외곽으로 한 바퀴 돌고나면 그 곳 지리에 대해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차이나타운 여기저기 서있는 지도 팻말이나 집에서 들고간 안내서를 보면, 차이나타운은 비교적 길찾기 쉬운 곳이다.  미로처럼 마구 꼬인 골목길로 이어진 곳도 아니고, 바둑판처럼 직선이 가로 세로로 이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하늘이 내려준 길치에 방향치라는 점과 내 동행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 ^^;;  덕분에 우리는 이 날 "여기 아까 왔던 곳 아냐?", "아마 지금이 세번째 지나가는 걸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00 들렸을 때 여기도 한 번에 볼 걸 그랬어.", "그 때는 여기랑 거기랑 가까운 줄 몰랐지." 식의 대화를 몇 번이나 나눴다. ^^  

 

  그렇게 헤매고 헤맨 곳을 순서대로 소개하는 것은 곤란하니(완전 무작위로, 발길 닿는대로 걸었음. ^^;;), 차이나타운이란 이름에 걸맞게 중국적인 건축물과 개화기 시절의 분위기를 내는 건축물로 나눠서 소개하겠다.

  그럼 오늘 포스트에서는 중국 분위기 폴폴 풍기는 곳, '차이나운 주변' 이 아닌 '차이나타운' 바로 그 곳을 올려보겠다. ^^

 

 

(위) 신포시장 방향에서 걷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차이나타운의 모습. 현수막 뒤로 한중문화관의 모습이 얼핏 보임.

(아래현수막에는 유어인천(遊於仁川)이라고 해서 '인천에서 노닐다' 라는 뜻의 행사를 알리는 문구가 써있음.

 

  처음부터 느낌이 꽤 괜찮다.

  유어인천(遊於仁川, 인천에서 노닐다)이라니,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  괜히 인천은 뭐도 좋고 뭐도 있고... 이런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한 글보다 강렬한 효과가 느껴진다.  한두 줄의 짧은 글 속에 모든 것을 강렬하게 함축하는 게 표어의 목적이라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영어에서 들여온 차이나타운(Chinatown)이란 말을 쓰지만, 중국인들은 보통 당인가(唐人街, 당나라 사람들의 거리)라고 한다.

  당나라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로 진출했기 때문에, 화교를 당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로 동남아시아 국가 사람으로서, 현재는 현지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화교로서의 정체성은 없지만, 인종적으로 화교의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들(즉 동남아시아 사람치고 피부가 하얀편이라 동북아시아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거의 당나라 때 해외로 진출한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필리핀의 아키노 전 대통령이나 중국과 전쟁까지 벌인 베트남의 전 주석 호치민도 화교의 후손이라니, 오랜 세월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해외로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중국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니 우리나라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해서는 당인가(唐人街)라는 호칭 대신 중국성(中國城, 중국 도시)란 호칭을 붙여놓았다.  당인가와 중국성의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현수막이 달린 공중통로 아래를 통과하면 보이는 독특한 시계와 그 뒤편으로 보이는 한중문화관.

 

  이 포스트에 올린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저 시계판의 숫자가 참 독특하다.

  0시 방향에 써진 숫자는 1883, 2시 방향은 1902, 5시 방향은 1950, 8시 방향은 2001이다.  아마도 이 차이나타운의 역사를 나타내는 숫자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차이나타운이 형성된 게 1883이고, 이 차이나타운에 뭔가 굵직한 사건들이 생긴 게 1902년, 1950년, 2001년이 아닐까...

 

 

(왼쪽) 위에서 소개한 독특한 시계 쪽에서 보이는 등 돌리고 선 아저씨(?)의 석상.

(오른쪽)아저씨가 공자가 아닐까 하며 앞쪽으로 가서 확인해보니,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였음. ^^

 

 

한중문화관 화장실(!)에서 찍은 왕희지 석상과 그 둘레의 작은 쉼터.

 

  저 석상과 그 근처의 쉼터를 대강 둘러보고서 한중문화관으로 들어갔는데, 거기 화장실에 들렸다가 화장실 창문 통해 보이는 전경이 좋아 몇 컷 찍어봤다.

  그런데 이 방법은 여자에게만 권하겠다.  여자화장실은 건물 벽쪽으로 나있어서 창문을 통해 저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남자화장실은 여자화장실과 계단 사이에 위치에 있어서 사진 찍는 게 불가능하다. ^^;;

  사진에 나오는 쉼터 오른쪽 끝으로 황금색 패루가 슬쩍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세 개의 패루(牌樓) 중 제2패루인 인화문(仁華門)의 모습.

 

  패루는 우리나라로 치면 장승처럼, 옛날 중국에서 어떤 동네의 입구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동시에, 무덤이나 사당 또는 중요한 건축물에 그것을 건립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 또는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세계 각지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이 패루는 본국인 중국에서 만든 것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옛 뿌리를 잃지 말자는 현지 화교들의 염원도 있을테고, 각지에 나가있는 화교들과의 끈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중국 외교의 중요정책이기도 해서 그렇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威海, 위해)시에서 기증받았다는 패루가 3개 있다.

  그 중 제1패루는 인천역에서 이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이 날 제1패루가 있는 쪽으로 가지 않아서 보지 못 했고, 이 제2패루와 제3패루만 봤다.

 

 

한중문화관의 모습.

 

  한중문화관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에 대한 자료보다는 중국에 대한 자료가 훨씬 많다.

  한국쪽 자료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를 보여주고 우호를 증진하자는 의미에서 곁들여놓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  그보다는 중국 각지의 유명 특산물이라든지, 현대 도자기라든지 하는 것들을 많이 전시해 놓았다.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도 여러 벌 비치해놓아서, 직접 입어보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종종 중국어나 중국문화 관련한 행사를 여는 모양이다.

 

 

(왼쪽) 당나라 때 중심지역이었던 중국 서북지역의 특산물인 당삼채(唐三彩). 당나라 때 많이 만들어진 유명한 미술품임.

(오른쪽) 중국 서남지역(쓰촨성)의 유명한 자수 작품. 쓰촨의 명물 팬더를 수놓았음. ^^

 

  당삼채는 내가 처음으로 중국 배낭여행을 가서 정말 인상깊게 본 도기 종류다.

  도자기 쪽으로 문외한이라 예술적 가치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형이상학적인 모양이 아닌 각종 동물 등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있고, 거기에 색깔까지 화려하니, 내 수준에 딱 들어맞는다. ^^

  당나라 때 만들어진 세 가지 색깔의 도기라는 뜻으로 당삼채(唐三彩)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반드시 세 가지 색깔을 쓰는 것은 아니다.  보통 흰색, 갈색, 녹색, 황색, 남색 중 세 가지 색깔을 칠하되, 경우에 따라 한 두 가지 더 추가되기도 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외부세계와의 교역과 문화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라, 이 당삼채도 실크로드를 따라 움직이던 상인이나 군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말, 낙타, 코끼리 등의 모양이 많다.

 

  쓰촨지역의 자수 작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아래 링크를 타고 가세요~~

 

  ☞  문수방(文殊坊)과 문수원(文殊院) - 1 (http://blog.daum.net/jha7791/15790557)

       '호우시절'과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 (http://blog.daum.net/jha7791/15790609)

 

 

조개 껍데기를 이용해서 만든 개와 닭의 모형.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중국 산동성 칭다오(靑島, 청도)와 그 부근의 특산물인 조개 껍데기 공예품이다.

  내가 처음으로 밟은 중국땅(동시에 처음으로 밟은 외국땅 ^^)이 바로 칭다오였다.  칭다오앞 바다는 황해라고 안 믿어질 정도로 푸르고 맑아서, 중국에서도 유명한 피서지역이다.  바닷가다 보니, 조개 껍데기나 소라 껍데기로 만든 각종 기념품이 많이 발달했다.  그 때 나도 소라 껍데기로 만든 예쁜 목걸이를 몇 개 보고 입맛만 다시다가 결국 사지 못 했다.  가격이 비싸서가 아니라, 배낭여행 중 짐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곳이 여행의 종착지였다면 하나 정도 샀을지도 모르지만, 칭다오는 여행의 시발지였기 때문에 절대로 짐을 늘여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

 

 

중국 사극에서 귀족 아가씨나 부인들이 종종 즐기는 전지(剪紙) 공예품. 

 

  전지(剪紙)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종이를 자르다' 라는 뜻이다.

  즉, 종이를 여러 모양으로 접어 가위로 잘라내어 각종 복잡하고 정교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공예다.  

  그런데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저런 전지 공예품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게 되는 것이, 종이를 단 한번도 서로 자르거나 잇는 일 없이 저렇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종이를 잘라서 풀로 이어 붙이는 식으로 만든다면, 나 같이 손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저런 모양 못 만들 것이 없다.  하지만 종이를 여러 번 접고 몇 번 자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정교한 무늬를 만들어내다니, 저런 것 만드는 법을 개발한 사람들은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사람들인가 보다. (나처럼 손재주 없고 인내심 없는 사람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꿈도 못 꿀 일임! ^^;;)

 

 

중국 산동성의 내화(內畵) 예술품.

 

  19세기부터 중국 산동성의 몇몇 지역에서 유행한 예술품이라고 한다.

  유리로 만든 병 안에 그림이 들어가 있어서, 안쪽의 그림이라는 뜻의 내화(內畵)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저 내화의 제작 방법 설명문을 보고 정말 놀랐다.  우리는 당연히 그림을 먼저 그린 후, 그 그림 위에 유리를 입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붙은 설명을 읽어보니, 일단 유리병부터 제작한 후 아주 얇고 특수한 붓을 유리병 안에 집어넣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당연히 엄청나게 피곤한 작업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숙련된 사람이라도 30분 정도 일하고 나면 눈이 너무 아파 쉬어야 하며, 하루 두세 시간 밖에 작업을 못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신기묘기 수준이다.

 

 

(위) 인천화교소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  특이한 건, 중학교 이름만 손문(孫文)의 호를 딴 중산(中山)학교임.

(아래) 화교학교 바로 옆에 있는 구 청국 영사관 회의청 건물.

 

  지금 화교학교가 있는 자리는 원래 구 청국 영사관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영사관 건물은 현재 없고, 대신 영사관에 딸린 건물이었던 회의청은 지금껏 남아서 한국화교협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희의청에 보이는 두 개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푸른 하늘 바탕의 하얀색 태양 모양의 깃발로 대만의 국기임.) 문양이 이 한국화교협회가 대만계열 화교들의 단체임을 보여준다. 

 

 

(왼쪽)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계단의 오른쪽은 일본 조계지였고, 왼쪽은 청국 조계지였음. 

(오른쪽)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맨 위에 있는 공자의 석상.

 

  양쪽으로 석등이 늘어선 이 계단이, 청나라 조계지와 일본 조계지를 가르는 경계였다.

  맨 꼭대기에는 중국 산동성에서 만들어왔다는 공자의 석상이 인천 바다쪽을 향해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공자 석상 뒤편에서 바라본 인천 풍경. 저 멀리 바다와 배가 보임. ^^

 

  저 공자가 이 낯선 이국까지 와서 자리 제대로 잡은 듯하다.

  공자 석상이 서있는 곳에서 바라다 본 아래 풍경은 장관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보는 이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해준다.  그러니 차이나타운에 들리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볼만한 곳이다.  좀 의외였던 것은, 아주 높은 지대가 아닌 것 같은데 저 멀리 인천항까지 다 보인다는 점이다.  바다와 배와 항구의 각종 기구들까지 다 뚜렷하게 보인다. ^^

 

 

(위) 공자상을 등지고 왼쪽을 보면, 유명한 삼국지 벽화 거리가 보임.

(아래) 화교학교 담에 쭉 그려져있는 삼국지 벽화.

 

  삼국지 벽화 거리에는 삼국지 이야기 전개에 따른 순서대로 번호를 붙인 그림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다.

  그런데 1번이 아닌  2번 도원결의(桃園結義) 그림이 제일 앞에 커다랗게 나와있다.  그만큼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부분이 워낙 유명하고 인상 깊기 때문일 것이다. ^^

 

 

(위) 적벽대전(赤壁大戰) 역시 도원결의처럼 다른 그림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있음.

(아래) 삼국지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하는 장면도 있음. ^^

 

  삼국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적벽대전이기 때문에, 적벽대전도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역사상 기록에서는 적벽대전이 대전(大戰)이란 이름 붙일만한 대규모 전투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지에서는 제갈량 없는 적벽대전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실제로는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의 활약이 그다지 큰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역시 소설과 전설은 비록 허구라도 그냥 두는 게 낫다.  실제로 어땠느냐 하고 따지고 들면, 꿈과 낭만이 박살이 나버리는... ^^;;

 

  구아두(救兒斗, 아두를 구하다)는 삼국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솔직히 삼국지의 세 주인공은 비쥬얼상으로는 도무지... ^^;;  삼국지에서 묘사하는 유비의 모습을 보면 귀가 어깨에 닿을 만큼 길고, 팔도 길어서 손이 무릎에 닿을 지경이니, 이게 인간의 형상이냔 말이다. -.-;;  그리고 관우는 수염이 엄청나게 길고 풍성한데, 나는 수염 기르는 남자는 싫다. -.-;;  마지막으로 장비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

  그에 비해 조자룡은 현대 영화에서도 통할만한 젋고 잘 생긴 장군이다.  조자룡이 미남인지 어떤지는 삼국지에 확실히 나오지 않았떤 것 같은데, 웬지 미남까지는 아니어도 호남형일 듯하다. ^^  그런 젊은 장수가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수많은 적군의 포위를 뚫으며 종횡무진하는 장면은, 나로서는 오히려 적벽대전보다 더 대단하고 박진감 넘치게 느껴진다. 

 

 

(왼쪽)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계단 앞면에 진시항 병마용의 군사를 모델로 한 것 같은 그림이 있음.

(오른쪽) 그림이 그려진 계단을 지나 계속 오르면, 저 위에 제3패루인 선린문이 보임.

 

  재미있는 것은, 저 계단의 그림을 나는 보고 함께 간 동행은 못 봤다는 점이다. ^^

  계단 윗면이 아니라 앞면에 그렸기 때문에, 그림 그려진 계단에서 좀 떨어져 쳐다봐야만 보인다.  그런데 동행은 주위 둘러보느라 그림을 못 보고, 계단에 그림 있다는 내 말에 계단 위에 올라서서 그림을 찾았으니, 보일 리가 있나... ^^;;

 

 

제3패루인 선린문(善隣門).

 

  이 제3패루는 제2패루인 인화문에 비해 훨씬 마음에 든다.

  인화문은 너무 황금색으로 범벅해놔서 좀 경박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선린문은 차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