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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3) - 고려궁지(高麗宮址)

Lesley 2011. 10. 26. 00:24

 

  고려궁지(高麗宮址)는 말 그대로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터를 말한다.

  조선시대 들어서서는, 이 고려궁지에 강화도유수부라든지 외규장각이라든지 하는 여러 관청을 지었다.

  그러므로 고려궁지 안에 있는 강화도유수 동헌과 외규장각을 고려궁지와 각각 다른 목차로 나누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시각적 편의를 생각해서 나누어 소개하겠다. ^^

 

 

 

1. 고려궁지(高麗宮址)

 

  고려궁지는 강화도가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시절 지은 궁궐이다.

  13세기에 고려는 몽골과 40여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몽골보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고려는 몽골이 바다에 약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 했다.  이 때 강화도에 개성 궁궐의 규모와 비슷한 수준으로 궁궐을 지어 1270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몽골과 화친조약을 맺고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구대로 궁궐을 파괴했다.

  몽골은 고려 전역을 유린하고도 이 작은 섬을 공략 못 해서 40년 가까이 애를 먹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강화도 궁궐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파괴하고 싶어했을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도 궁궐을 그대로 두면 고려 왕실과 조정이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 항쟁할까 걱정도 되었을 것이다.

 

 

(위) 고려궁지로 들어가는 입구.

(아래) 입구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

 

  

고려궁지 윗부분에서 내려다본 강화도의 모습.

(위 사진의 건물은 강화유수부 동헌이고, 아래 사진의 건물은 외규장각)

 

  고려궁지 가장 윗부분에는 주춧돌 등을 놓았던 자리만 얼핏 보이는 공터가 있는데, 2007년~2008년에 발굴조사를 해서 찾은 고려시대 궁궐의 터라고 한다. 

  그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강화도로 온 고려 조정과 왕실에서 왜 이 자리에 궁궐을 짓기로 했는지 알 것 같다.  이 자리에서 서면 강화도 전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풍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았을테고, 혹시라도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올 경우에 적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에 좋아 방어에 유리했을 것이다. 

 

 

 

2. 강화도유수부 동헌

 

(위) 명위헌(明威軒)이라는 이름의 강화부유수의 동헌.

(아래) 낡기는 했어도 옛스러움을 간직한 동헌 단청.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고려궁지에 여러 관청을 세우게 되었다.
  이 고려궁지에, 조성 광해군 때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는 봉성전을 지었고, 그 다음 임금인 인조 때에는 행궁(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을 지었지만, 모두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며 소실되었다.  그 후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이번에는 병인양요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우리나라가 침략 많이 받긴 받았구나...ㅠ.ㅠ)  현재는 강화유수부 건물 중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있다. 

 

  저 동헌에 걸린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로 유명한 윤순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란다.

  그런데 이 안목없는 이의 눈에는, 명필로 보이기는 커녕 도무지 해독 불가능하게 마구 휘갈겨 쓴 글자로만 보이니, 참... ^^;;

 

  그리고 저 동헌 건물의 단청이 참 이채로왔다.

  보통 우리나라 단청은, 궁궐이든 관청이든 사찰이든 간에,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을 함께 쓰던데, 왜 저 동헌에는 빨간색이 안 보이고, 초록색과 파란색만 보일까?  마치 중국에서 봤던 건물들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단청 칠한 이유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설명 좀 해주시기를... ^^

 

 

명위헌 한쪽 방에 있는 각종 집기들.


  활과 화살도 보이고, 책상에, 문갑에...

  사진 왼쪽 문갑 위에 놓은 활을 보면, 시위를 풀어놔서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활 모양이 아니라 쪼그라든(표현이 참... -.-;;) 모양이다.  전에 어디에서 활을 안 쓸 때는 시위를 풀어놔야지, 안 그러면 활을 금새 못 쓰게 된다는 이야기를 읽은 듯하다.

 

 

 

3. 외규장각(外奎章閣)

 

  최근  몇 년 간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시대를 배경으로 개혁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소재로 한 사극이 많이 방영되었다.

  이산, 한성별곡,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  그리고 정치적 요소가 옅기는 했지만 '성균관 스캔들' 까지...  덕분에 규장각(奎章閣)이란 이름이 그다지 낯설지 않게 된 것 같다.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어김없이 규장각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즉후에 창덕궁 내에 설치한 일종의 왕실 도서관으로, 역대 국왕의 서화, 시문, 유교 등을 보관했다.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기능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실제로는 장용영(壯勇營)과 함께 정조의 정적들을 물리치고 정조의 구상대로 정치를 펴나가기 위한 친위세력을 길러내는, 정치적인 기능을 했다.  즉, 장용영이 정조의 군사적인 친위세력을 길러내는 곳이었다면, 규장각은 정치적, 행정적인 친위세력을 길러내는 곳이었다.  그래서 정조의 사후, 정조와 대립했던 벽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규장각은 평범한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역시 고려궁지 안에 있는 외규장각(外奎章閣).

 

  강화도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창덕궁 내 설치된 규장각의 부속기관이었다.

  병인양요 때 소실된 것을 2003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어쩐지, 강화유수부 동헌에 비해 지나치게 깔끔하더라니... ^^;;)  외규장각이 최근 유명해진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했던 외규장각의 의궤가 대여 형식으로나마 한국으로 돌아온 일 때문이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문서 중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이 '어람용 의궤(御覽用 儀軌)' 다. 

 

  의궤(儀軌)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중전이나 세자의 책봉, 왕실의 혼례, 국장, 궁궐 전각의 건축, 공신의 책봉 등등)를 후대의 같은 행사 때 참고할 수 있게 자세히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특히 참여한 인원과 각종 장비 및 재료에 대해 그림으로 상세히 남기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형태의 기록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조선시대에만 있고, 같은 동양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독특한 기록물로서의 가치 때문에, 2007년에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왕조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런 의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어람용 의궤다.

  의궤는 여러 부를 제작해서 여러 관청에 한 부씩 나누어 보관을 했는데, 몇 부를 제작하든 왕이 직접 보기 위한 의궤(즉, '어람용 의궤')는 한 부를 반드시 제작했다.  그런데 의궤를 여러 부 제작한다고 해서, 인쇄물로 펴냈던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일일이 필사했다...!  그 방대한 글과 그림을 사람의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리려니 실수가 생길 수 밖에 없어서, 같은 의궤라도 각 부마다 내용이 다른 경우가 생겼다.  하지만 어람용 의궤는 지엄하신 임금님용이라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서, 정확도가 높았다.  그래서 다른 의궤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 

  또한 왕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표지를 특별히 고급 비단으로 만들었다.  그런 화려한 표지 모습과 본문의 채색 그림들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눈길을 끌어 약탈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평범하게 생긴 책이었다면, 표지도 그냥 그런데다가 본문에도 프랑스군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만 가득해서, 어쩌면 약탈당하지 않았을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