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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2) - 용흥궁(龍興宮)

Lesley 2011. 10. 21. 00:22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1분 정도만 걸으면,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의 잠저인 용흥궁(龍興宮)에 도착한다.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용흥궁으로 통하는 골목길.

 

 

용흥궁과 성공회 성당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

 

  저 표지판을 용흥궁을 나올 때야 봤다. 

  표지판 꼭대기에서 날개짓을 하고 있는 학 모양의 장식품과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귀엽다. ^^  '강화도 나들길' 이라고 써진 부분의 그림이 하도 산만해보여서, 직접 볼 때는 도대체 뭔가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니, 산맥이 표시된 강화도 지도를 배경으로 철종으로 보이는 인물과 학, 개, 물고기 등이 그려진 거였다. ^^ 

 

 

(위) 궁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소박하고 차분해보이는 용흥궁.

(아래) 용흥궁의 대문.

 

  용흥궁은 정작 철종이 이 곳에 살던 시절에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명색이 왕이 살았던 곳인데, 그냥 둘 수는 없는 법...!  철종 즉위 몇 년 후에 강화유수로 부임한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초가에서 궁으로 벼락출세한 집...!!! ^^)

 

 

  철종은 조선의 역대 국왕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갖고 왕이 된 인물이다.

 

  대부분의 왕은 다른 왕의 아들, 즉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된다.

  간혹 선왕에게 왕자가 없서서, 왕자로 태어나지 않은 왕족이 왕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다음 조건은 갖추고 있었다.

  첫째, 선왕보다 항렬이 높지 않은 왕족이어야 했다.  이는 성리학적 가부장제를 국가 단위로까지 확장해서 적용했던 조선왕조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후대의 왕이 선대의 왕보다 윗 항렬일 경우, 아저씨뻘 되는 사람이 조카뻘 되는 사람에게 제사를 올리며 후손 노릇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제7대 왕인 세조가 제6대 왕인 단종보다 항렬 높은 건 생각하지 말자. 조카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양위한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 강요당한 것이었으니까...)

  둘째, 비록 왕자로 태어나지 않아 왕이 되기 위한 교육은 못 받았어도, 최소한 그 시대 지배층이 갖출만한 지식과 교양을 교육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그 나라의 정치와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셋째,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는 식의 연좌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대니만큼, 가족 중에 큰 죄인이 있는 왕족은 곤란했다.

 

  하지만 철종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비껴나간 상황에서 왕이 되었다.

  첫째, 철종은 그 선대왕인 헌종(憲宗)보다 항렬이 높다.  철종과 헌종 모두 우리나라 사극의 단골 주인공인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서 갈라져 나온 후손들이다.  그런데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고, 헌종은 사도세자의 고손자다.  즉, 철종이 헌종의 재당숙(7촌 아저씨)이 된다.  그래서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서, 엉뚱하게도 헌종의 할아버지인 순조(純組)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취했고, 그러면서 조카 헌종의 제사도 모셔야 했다. (그래서 몇몇 꼬장꼬장한 신하들이 왕실 족보가 이런 식으로 콩가루 꼴 나는 상황을 못 참고 철종을 왕으로 즉위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안동 김씨들에게 찍혀서 귀양갔음. -.-;;)

  둘째, 철종은 역모에 연루되어 몰락한 왕족 집안에 태어나, 일반 농민이나 다름없는 힘든 삶을 살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 했다.  19살에 왕이 되어 경연에서 공부하게 된 책이, 어지간한 양반 집안의 아이라면 10살 전에 끝내는 소학(小學)이었을 정도다.

  셋째, 집안에 역적 한 명이 나와도 온 집안 식구가 죄인 취급 받던 시대인데, 철종의 가계는 역모 또는 역모에 버금가는 죄목으로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큰아버지(상계군)가 어린 나이에 홍국영에게 이용당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자살한 것부터 시작해서(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음.), 할머니(은언군 부인 송씨)와 큰어머니(상계군 부인 신씨)는 국가에서 금지하던 천주교를 믿다가 사약을 받았고, 할아버지(은언군)도 그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믿은 일에 연좌되어 사사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전계군)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함께 자랐던 이복형(회평군)마저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당했다. 

 

  이렇게 도무지 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이 왕이 된 것은, 조선 후기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우선,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서 사도세자의 후손 중 상당수가 역적으로 몰려 희생된 통에, 승하한 헌종에게는 6촌 이내의 남자 친척이 없었다.  게다가, 순조 때부터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린 안동 김씨 일족은, 허술하고 만만한 왕을 즉위시켜 자신들의 세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똑똑한 인물이 왕이 되면 자기들 목이 모조리 날아갈 정도로, 자기들이 그 동안 나쁜 짓 많이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임. -.-;;)  그래서 안동 김씨 출신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왕후)가 철종을 헌종의 후사로 지목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채로 왕이 되었으니,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재야의 선비들이나 백성들은 물론이고, 철종을 즉위시킨 안동 김씨 일족조차 지엄한 임금을 뒤에서 '강화도령' 이라고 부르며 은근히 조롱하는 판국이었다. 

  그래도 철종이 왕으로서 의지를 갖고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 빈민구제책였다.  철종 스스로도 워낙 힘들게 자랐기 때문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동 김씨는 자기들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있었지, 허수아비 왕이 내리는 명령이나 백성의 어려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썩을대로 썩은 지방 수령들도 빈민을 구제하는데 쓰라고 철종이 보낸 비용을 착복하기 일쑤였다.  결국, 실의에 빠진 철종은 주색에 탐닉하다가 33살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위) 용흥궁의 안채.

(아래) 너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멋진 처마.

 

  정작 용흥궁에 갔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야 용흥궁 대문 들어서자마자 있는 저 건물이 안채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저 건물이 안채라는 것을 안 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여자는 대문 밖 출입 거의 못 하던 양반집에서는, 보통 안채는 대문에서 떨어진 집안 깊숙한 곳에 있고, 사랑채가 대문에 더 가깝게 있지 않나?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용흥궁은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안채부터 보이고, 안채를 옆으로 돌아 작은 쪽문을 통해 더 안으로 들어가야만 사랑채가 나온다.  게다가 안채는, 하인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손님이 머무는 행랑채와 마주보고 있다.

  남녀와 신분을 엄격히 따지던 조선시대에 양반 집안 여자들과 하인들이 항상 마주보며 살게끔 집을 짓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차피 누가 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철종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기념하려고 지은 집이라,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었던걸까? -.-;;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전통집의 처마에 대해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솟아오른 처마의 선이...' 하는 글을 보면 시큰둥한 느낌이었다.

  하도 많이 보고 들은 표현이라 식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처마에 대해 특별한 감흥이 없기 때문에, 전혀 공감이 안 되었다.  그런데 역시 무언가 이해 안 가는 것을 이해하는데에는 '비교법' 이 즉효약인 듯하다.  중국에서 지낼 때 그쪽 전통 건축물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각이 많이 꺾여 하늘을 찌를듯이 솟구친 중국 처마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상큼하게 하늘로 들린 우리 처마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우리 전통가옥의 처마가 참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심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인위적으로 보이는 중국 처마보다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우리 처마가 더 보기 좋다. ^^ 

 

 

(위) 안채 뒤편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아래) 우물 안의 모습. 사진으로 보면 모르겠지만, 직접 보면 제법 깊음.

 

 

뒷편의 굴뚝.

 

 

(위) 이 곳이 철종의 잠저라는 것을 적은 비석이 있는 비각.

(아래) 비각으로 통하는 문.  그 옆에 담쟁이 넝쿨에 싸인 담장이 무척 예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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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 너무 웃긴 팻말. ^^

 

  어쩌다가 '들어가지 마시오' 가 '들어가시오' 로 탈바꿈 한 건지... ^^

  그저 어쩌다가 망가져서 그리 되었다고 보기에는 석연찮다.  그보다는 대청 마루 위로 올라가고픈 개구쟁이가, 자기를 못 들아가게 막은 저 팻말이 너무 괘씸해서 가운데 글자를 지워버린 게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