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여행기/경기도

강화도(1) - 성공회 강화성당

Lesley 2011. 10. 20. 00:28

 

  9월 마지막 토요일에 다녀온 강화도 관련 포스팅을 이제야 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인지... ^^;; 

  어쩌다보니 차례가 밀려서, 거의 한 달은 지난 지금에야 포스트가 올라오게 되었다.

 

  사실, 강화도로 가면서 큰 기대는 없었다. 

  강화도에 대한 내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마니산이니 첨성단이니 하는 곳을 둘러본 게 전부다.  너무 오래 전 일이고, 또 그 때는 우리 역사유적지 같은 것에 털끝만큼도 관심 없던 때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겨울 서울의 성공회 성당에 갔다가, 거기에서 가이드 역할 하시는 부제님께 '강화도에도 성공회 성당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식 성당이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  ☞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내부 (http://blog.daum.net/jha7791/15790790)  그 때는 '그런 곳도 있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 가자는 분이 계시고, 더구나 아무래도 대중교통이 서울만큼 편리하지 않은 곳인데 차로 데려다주기까지 하신다니, 기회 있을 때 한 번 가보자는 심정으로 따라 나섰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그만 섬을 반 바퀴는 도는 사태가 발생... ^^;;

  덕분에 섬의 역사유적지를 구경할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나는 우리가 구경할 예정인 성공회 강화성당과 전등사에 대한 인터넷 자료만 읽어보고 갔는데, 알고보니 이 강화도라는 섬 자체가 역사유적지다...! @.@  차를 타고 섬을 도는 동안, 온갖 유적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수시로 보였다. (그래, 강화도 너는 이제 제2의 경주로 나에게 찍힌 것이야...! ^^)

  게다가 폭이 좀 좁아 보이기는 했지만, 섬의 해안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깔려있다.  그러니 체력이 받쳐주고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 강화도로 와서 자전거 이용해서 온종일 한 바퀴 돌면서 눈에 띄는대로 유적지 한 번씩 들려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된다면, 아예 1박 2일짜리 자전거 여행을 해도 좋을 듯 하고...  강화대교 근처에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도 있는 모양이니(1박 2일에 13,000원이라나, 15,000원이라나...), 승용차가 없어서 자기 자전거를 운반하기 곤란한 사람은 대중교통 이용해서 강화도까지 온 후에 자전거를 대여해서 타면 된다. 

 

 

 

  그럼, 본격적으로 강화도 탐방을 시작하면서, 성공회 강화성당부터 둘러보자면...

 

 

(위) 성당이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절이나 향교와 비슷하게 생긴 성공회 강화성당의 정문.

(아래) 세월의 흐름과 예스러운 멋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기둥과 지붕. 

 

 

불교 사찰의 범종을 닮은 강화성당의 종.

(범종과 다른 것은 종의 끝부분 동그라미 안에 있는 십자가 문양 뿐임. ^^)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에 건립된 성공회(영국 국교회)의 성당이다.

  강화도 최초의 성당이며,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식 성당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

  성당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은 '천주교 성당' 이고 '서양식 건물' 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최초로 들어선 성당이, 천주교 성당이 아닌 성공회 성당인 까닭은 무엇이며, 어째서 한옥식으로 건립되었을까?

 

  첫째, 강화도 최초의 성당이 성공회 성당인 이유는, 성공회의 초기 전파 과정과 연관이 있다.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조선이 요동을 치던 1890년, 성공회 신부인 코페(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가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고 조선땅으로 온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는데, 곧 난관에 부딪친다.  코페 주교가 조선에 왔을 때, 천주교는 성공회보다 100년이나 일찍 조선에 전파되었고, 개신교 각 종파는 영국보다 먼저 조선에 영향력을 행세하던 미국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양 종교를 믿을만한 서울 사람들을 먼저 차지해버린 탓에, 성공회 신자가 될만한 사람이 없었다. ^^;;  덕분에 코페 주교가 조선에 온지 6년이 되어서야, 겨우 첫번째 조선인 신자가 나왔다.  그 신자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이미 뿌리박은 서울이 아닌, 강화도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이왕 강화도에서 최초의 신자가 나오기도 했고, 마침 강화도가 섬이라는 점이 영국 성공회의 성지인 이오나(iona)섬을 연상시켰기에, 아예 강화도를 성공회 선교의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강화도에 있는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의 잠저였던 용흥궁(龍興宮) 근처 언덕에 성당을 짓게 된 것이다.

 

  둘째, 강화성당을 한옥식으로 건립한 이유는, 외래종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거부감과 반발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코페 주교도 그렇고, 다른 성공회 선교사들도 그렇고,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기들 스스로도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문화권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가 높은 편이었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결국 순조로운 선교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조선의 전통문화를 존중한다는 취지로 불교 사찰 모양으로 건립된 이 성당은, 여러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비난이 유독 심했던 모양이다.  '절은 장차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 이미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섬기는 곳이다.' 라고까지 했다니, 아펜젤러가 개화기 우리나라 교육계에 공헌한 건 공헌한거고,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아닌 듯하다.

 

 

  성공회는 이 성당의 건립에 여러모로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훗날 성공회의 제2대 조선 교구장이 된 터너(Arther Beresford Turner, 한국명 단아덕) 주교가 코페 주교의 지시로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성당 대들보에 쓸 소나무를 백두산에서 구해오게 했다.  백두산 소나무를 뗏목을 이용해서 바다를 통해 강화도까지 운반하는데 6개월이나 걸렸고, 다시 육지에서 말리는데도 또 다시 6개월이 걸렸다니, 정성도 이만저만한 정성이 아니다.  게다가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도편수를 데려오는가 하면, 중국에서 유명한 석수를 데려오는 등, 그 당시의 일류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공사를 진행시켰다. 

 

 

(위) 이 성당 본당의 이름도 불교 사찰처럼 '천주성전(天主聖殿)' 임. ^^

(가운데) 비스듬히 바라본 본당의 풍경.  정말 방주의 모습인가?

(아래) 본당의 뒷모습.

 

  강화성당의 본당은 지붕 꼭대기에 달린 십자가만 빼놓으면, 영락없는 절의 모습이다.

  그 이름부터, 불교 사찰의 본당을 대웅전이니 극락전이니 하는 것처럼, 천주성전이라고 붙였다.  그것도 한자로 써놓으니, 더욱 더 불교 사찰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가운데 사진과 아래 사진을 보면, 이 건물이 정사각형이 아닌 직사각형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이 본당이 방주의 모양일 본떴기 때문이라는데, 건축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이게 과연 방주 모양이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  방주 모양을 본뜬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와 같이, 이 성당이 세상을 구원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기 때문이란다.

 

  위의 사진과 가운데 사진을 보면, 본당 앞부분에 불교 사찰의 주련(柱聯)과 같은 5줄의 한자 글귀가 보인다.

  그런데 이 주련은 그 겉모습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교리를 담고 있다.  다행히 인터넷 사이트 여기저기에 이 주련의 독음과 해석이 올려져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보겠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시다.

 

  宣仁宣義聿照拯濟大權衡 (선인선의율조증제대권형)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여,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  

  삼위일체 천주님이 만물의 참된 근본이시다.

 

  神化周流囿庶物同胞之樂 (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락)  

  신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선파계중민생영지방)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민중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본당 뒷편에 있는 사제관의 모습.

 

  신부들의 사택격인 사제관도 한옥식 건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제관에서는 불교 사찰 뿐 아니라 유교의 향교 또는 서원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제관 건물 그 자체는 사찰의 요사채(승려들의 생활공간)을 본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 왼쪽에 보이는 나무가 향교 또는 서원에 많이 심는 회나무(회화목, 홰나무)다.  여름에도 벌레가 잘 안 생기고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는게, 꿋꿋한 기상과 넓은 마음을 지닌 선비를 상징한다고 해서, 향교나 서원에 심는다고 한다.  꿋꿋한 기상과 넓은 마음이 오직 유교 선비만 갖출 덕목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제관에 회나무를 심은 뜻이 짐작이 간다.  

 

 

이 성당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전염병으로 세상을 뜬 알마 수녀의 기념비.

 

  한글 맞춤법이란 것이 없던 시절에 만든 기념비라, '수녀 기념비'가 '슈녀 긔념비' 라는 발음하기도 참 힘든 글자로 적혔다. ^^;;

  혹시라도, 저런 식의 묘비명 표기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링크 타고 다른 블로그 구경 하고 오시기 바란다.  내가 중국 가기 전에 자주 들렸던 블로그인데, 저 알마 수녀와 비슷한 시대 사람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우리 동포들의 묘비명 한글 표기가 전부 저런 식이다. (스크롤바를 가운데로 내리면 묘비명 나오는 내용이 나옴.)

 

☞ 19세기 후반, 한글의 갈라파고스 섬:LA로즈데일 묘 (http://blog.daum.net/harlemgirl/6968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