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포스팅할 의릉(懿陵)은 조선 제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그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능이다.
의릉은 우리집과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가까운 편이라 이미 몇 번이나 갔던 곳이다.
그런데 갈 때마다 의릉의 모습이 바뀌고 있어서, 몇 번을 가도 지루하기는커녕 항상 새로운 느낌이다. ^^ 그런데 그렇게 의릉의 모습이 계속 바뀌게 된 이유가, 우리나라의 어두운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그렇잖아도 한 많은 삶을 살다간 경종과 선의왕후인데, 이 두 사람은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 했구나 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 지경이다.
(위) 의릉 앞길. 초록색 철망 안쪽이 의릉이고, 차가 나오는 오른쪽과 사람들이 서있는 왼쪽이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임.
(아래) 의릉을 비롯한 조선왕릉 전체가 2009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음.
먼저 의릉에 누워있는 경종과 선의왕후에 대해 설명하자면...
경종(景宗)은 조선 제20대 왕으로, 제19대 왕인 숙종(肅宗)과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이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극이 무슨 곰탕 끓이는 수준으로 재탕에 삼탕을 거듭한 덕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여기에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 장희빈의 굴곡진 삶은 아들 경종의 인생에도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경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생모가 사약을 마시고 죽는 참극을 겪었고, 그 후로는 장희빈을 죽인 부왕 숙종과 노론의 압박 속에서 암울한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숙종은 장희빈이 죽은 직후만 해도 아들 경종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 경종이 장성해가면서는 점점 꺼려하더니 나중에는 대놓고 구박까지 했다.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신하로서 복종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자신까지 함부로 대하고 구박하다니, 경종의 스트레스가 오죽 심했을까...! ㅠ.ㅠ
그리고 어렵게 왕이 되어서도, 왕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는 노론의 핍박과 음모 속에서 힘겹게 지내야 했다. 결국 즉위 4년 만에 노론과 이복동생 영조(英祖)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휩싸인 채 승하했다.
선의왕후(宣懿王后)의 인생도 남편 경종보다 더 기구하면 기구했지, 덜 기구하지는 않다.
선의왕후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첫 세자빈(단의왕후)과 사별한 세자(경종)과 혼인하여 새로운 세자빈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어린 세자빈에게 대궐 생활이 어려웠을텐데, 남편의 지위가 불안정한 상태였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남편 경종이 왕이 되면서 선의왕후도 16살에 중전이 되었지만, 시동생 영조를 경종의 후사로 삼으라는 노론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선의황후는 다른 왕족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으려 애썼지만, 10대의 소녀 왕비가 노론이라는 거대한 정치 세력에 맞설 수는 없었고, 결국 시동생이 남편의 후계자가 되었다. 원래 병약했던 남편 경종은 선의왕후가 20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10대에 결혼해서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20살에 과부 신세라니, 무슨 이런 기구한 팔자가 다 있나...! ㅠ.ㅠ)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시동생 영조와 여러 번 갈등을 빚었다. 남편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비가 된 선의왕후는 영조가 왕으로서 주재하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몇 번이나 거부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영조는 영조대로, 대비전에 배당되는 각종 물품을 팍팍 깎아내는 방식으로(요즘으로 말하자면 보복성 예산삭감...!) 자기보다 훨씬 어린 형수에 대한 악감정을 드러냈다. 그렇게 인간적인 외로움과 정치적인 고립 속에서 지내던 선의왕후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했다.
지엄한 왕릉도 안기부에게 수난을 겪다.
내가 의릉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 시내에 왕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하고(실제로는 의릉 외에도 서울 시내에 몇 개의 왕릉이 더 있음.), 의릉이라는 이름도 제대로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어린 시절부터 의릉 가까운 곳에서 살았지만 대학 시절에야 의릉에 대해 겨우 알고 가봤다.
의릉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의릉에 옛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청사가 있었던 탓이다...!!! 안기부가 아직 '중앙정보부' 라는 이름을 썼던 1962년,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 김종필(자민련 당수였고 국무총리를 지낸 그 김종필을 말함.)이 의릉을 중앙정보부 청사 부지로 선택했다. 그래서 1995년에 안기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해가서 1996년에 의릉이 개방될 때까지, 일반인들은 의릉을 드나드는건 고사하고 의릉 근처를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다.
사람들 머리 속에, 이 지역은 고귀한 신분이지만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경종 부부가 묻힌 땅이라기 보다는,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머무는 곳이라는 인식이 훨씬 강했다. 그래서 지금도 의릉에서 가까운 우리 동네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의릉 옆 00' 라고 하면 못 알아들으시고 '안기부 옆 00' 라고 해야만 알아들으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이 포스트에서 군사독재 시절에 안기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줄줄이 읊지는 않겠다. (그러다가는 포스트 내용이 완전히 산으로 가버리는 수가... ^^;;)
하지만 어떻게 왕릉 부지 내에 정부기관 청사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해야겠다. 그 시절 한 끗발 했던 인물들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여전히 과거의 죄악에 대한 반성은 안 하고 자신들은 그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다는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그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했다고 떠들어대는 작자들이 소중한 역사 유적지를 멋대로 훼손했다니, 정말 기가 막힐 뿐이다.
하긴, 달리 생각해보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누명 씌어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기를 밥먹듯이 했던 무리인데, 그런 무리가 이미 죽은 사람의 무덤에 대해 약간이나마 경외심을 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같으면 왕릉을 훼손하는 행위는 역모죄 수준의 중대한 범죄였을텐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안기부 사람들에게는 '흥, 그깟 권력도 없었던 왕의 무덤 따위가 무슨 대수냐~~~' 정도였나 보다.
옹색한 의릉의 위치
이렇게 옛 안기부와 얽힌 악연 때문에, 이 의릉은 그 위치부터가 다른 왕릉과 다르다.
그래도 명색이 왕릉이건만,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두 캠퍼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앉아 있는 궁색한 모습이다. ㅠ.ㅠ
이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는 내가 이 포스트를 쓰고 있는 지금도 계속 확장공사 중이다. 원래는 의릉을 마주보고 선 상태에서, 오른쪽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고 왼쪽은 국방대학원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인지 국방대학원은 어디론가 이전해가고(3, 4년 전에 갔을 때는 분명히 아직 국방대학원이 있었음.) 그 자리에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안기부, 국방대학원,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번갈아가며 의릉의 본모습을 해치고 있는 셈인데, 그나마 의릉을 훼손하는 범인(!)이 불법행위나 일삼던 집단에서 합법적이고 착한(?)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껴야 하는 건지 어떤건지...
추석에 의릉 관리사무소에서 나눠준 송편
추석 연휴기간, 의릉에서 방문객들에게 나눠준 다섯가지 색깔의 송편 세트.
추석 연휴를 맞아, 의릉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한 사람 당 저 다섯가지 색깔의 송편 세트를 받았다.
덕분에 의릉 입장료 1,000원을 뽑고도 남았다. ^^ 나로서는 명절을 맞아 역사 유적지에서 저렇게 전통 음식을 나눠주는 게 참 괜찮은 생각이구나 싶었는데, 부모 따라 온 꼬맹이들 중에는 먹기 싫다고 징징거리거나 아예 안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으니... (이것들이 배가 불렀구나...!!!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 -.-;;)
의릉 내부 경관
의릉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앞에 있는 금천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의릉 경내 탐방이 시작된다.
(위) 금천교(禁川橋)와 그 너머로 보이는 신문(神門)과 그 뒤편으로 보이는 정자각(丁字閣).
(아래) 신문과 정자각 사이에 뻗은 신도(神道)와 어도(御道).
금천교(禁川橋)는 궁궐 안에 있는 다리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살아서 왕이었던 사람은 죽어서도 왕이니, 왕이 묻힌 곳도 궁궐과 비슷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신문(神門)은 능에 묻힌 사람의 영혼이 출입하는 입구인데, 홍문(紅門) 또는 홍살문이라고도 한다.
정자각(丁字閣)은 위에서 본 건물 모습이 정(丁)자 모양이라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능묘에 대한 각종 제례를 이 정자각 안에서 치른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이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다.
신도와 어도는 신문에서 정자각까지 나란히 함께 뻗어있는 길인데, 신도가 어도보다 5, 6센티미터 정도 더 높게 되어 있다. 신도는 신문을 통과한 왕과 왕후의 영혼이 지나가는 신성한 길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밟으면 안 되는 곳이다. (그런 신성한 길이라 그 옆의 어도보다 높게 만든 모양임.) 어도는 왕이 제례에 참석할 때 영혼을 영접하여 함께 정자각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이다. 몇 년 전 의릉에 들렸을 때는 신도와 어도를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 그 동안 복원한 게 아닐까 싶다. (현재도 의릉 복원공사는 진행 중임.)
2003년 12월 복원공사 이전의 의릉 모습.
(현재 신도와 어도가 있는 위치에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중심으로 연못이 있었음.)
위의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한 출처불명의 사진인데(^^;;), 대학 시절 처음으로 가봤던 의릉의 모습이 바로 저랬다.
현재 신도와 어도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연못이 하나 있고, 그 주위로 온갖 종류의 수목과 화초를 심어놓았었다. 경복궁에 있는 향원정과 그 주위 연못 모습에 일본풍을 가미한 느낌이랄까?
친구들끼리 또는 연인들끼리 저 아기자기한 연못 주위에서 사진도 찍는 등 데이트를 즐기고, 어른들이 아이들 데리고 와서 자리 깔고 김밥 먹으며 소풍 분위기도 내고, 의릉 부지 안의 매점에서 파는 물고기 먹이 사다가 연못 속에 붕어들에게 뿌려주기도 하고... 간단히 말해서 완전히 동네 공원 수준이었다. ^^;;
위에 이미 썼듯이 안기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1996년부터 일반인들에게 의릉을 개방하기 시작했는데, 안기부가 제멋대로 연못 파고 일본식 정원으로 꾸민 모습 그대로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의릉은 '가장 예쁜 조선시대 왕릉' 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고 한다. -.-;;
정자각 앞에 파놓았던 저 연못이 언제 만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며느리도 모른다...!)
그저 이런저런 소문만 있을 뿐이다. 안기부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건축허가도 안 받고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연못 공사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안기부의 높으신 양반들은 저렇게 예쁜 정원 꾸며놓고는, 자기들을 이태백으로 착각했는지 가끔 달밤에 연못 위에 배를 둥둥 띄어놓고는 술잔치 벌이며 즐겼다고 한다. 나 같으면 무덤 속에서 귀신 나올까봐 무서워서, 감히 그 앞에서 달밤의 뱃놀이 즐길 생각은 못할 것 같은데... (역시 안기부 놈들은 사악한 놈들이라 몽땅 간덩이가 부었던 모양임. -.-;;)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친구가 의릉에 다녀와서 '네가 의릉에 연못이 있다고 했는데, 가보니까 없더라.' 라고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알고보니, 2003년 12월에 문화재청에서 연못을 없애고 의릉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훼손된 의릉를 뒤늦게나마 원상복구하겠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인데, 여기에 또 황당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의릉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연못 없애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예쁘게 잘 꾸며놓아서 산책 코스로 좋은데 왜 없애냐고 그냥 두라고 했단다. -0-;;
누가 '그 동네 주민들이야말로 안기부 놈들보다 더 나쁜 놈이다.' 라고 했다는데, 슬프게도 맞는 말 같다. '우리 역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 훼손된 문화재를 복원하자.' 는 거창한 명분은 접어두더라도, 만일 자기 가족의 무덤이라면 그 앞에 연못 파놓은 걸 그대로 두라는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ㅠ.ㅠ
정자각의 측면 모습.
신문에서 쭉 뻗은 신도와 어도는 정자각 측면으로 이어지는데, 정자각 위로 올라서는 돌계단도 신도용 돌계단과 어도용 돌계단으로 나눠진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 온전히 보이는 돌계단이 신도의 끝과 이어지는 돌계단이다. 물론 여기도 살아있는 사람이 밟아서는 안 되는, 영혼이 올라가는 돌계단이다. 그리고 그 신도용 돌계단 뒷편으로 일부만 보이는 돌계단이 왕도용 돌계단이다.
정자각 측면에서 바라본 신문과 신도.
왕릉 옆 천장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두 개의 봉분.
(정자각 가까이 있는 것이 선의왕후가 묻힌 봉분이고, 그 뒷편의 것이 경종이 묻힌 봉분임.)
의릉은 특이하게 두 봉분을 양옆으로 나란히 두지 않고 상하로 둔 왕릉이다.
왕과 왕후가 한 곳에 합장되는 경우, 보통 양옆으로 나란히 묻힌다. 하지만 이 곳은 그렇게 양옆으로 봉문을 만들 경우 풍수지리상 안 좋다고 해서, 일부러 위아래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 안기부의 회의실 및 강당의 외관.
(아래) 유리문 안으로 들여다 본 광경.
이 건물은 1972년 7월 4일, 그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이후락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이 안기부 건물과는 인연이 안 닿는 듯하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일반인의 내부 관람이 아직 허용 안 될 때라 안에 들어가보지 못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부 관람이 허용된다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간 날 누수 때문에 내부 수리 중이라 일시적으로 관람이 불가능했다.
원래 이 건물은 의릉 복원공사를 하면서 철거할 예정이었는데...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곳이라는 역사성 때문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게 되었다. 결국, 의릉은 앞으로도 옛날 안기부 건물과 동거해야 할 판국이다. -.-;;
이 건물 이외의 다른 안기부 건물들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학교 건물로 쓰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안기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할 때 문화관광부는 안기부 건물을 철거하거나 또는 당장 철거는 못 해도 의릉 관련한 시설로 쓰지 않고, 엉뚱하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무상으로 임대해줬다고 한다.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확장공사가 끝나면, 학교측에서는 안기부 건물을 더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 때 가서 안기부 건물들을 철거하게 될지 또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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