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여행기/서울(성북구)

길상사(吉祥寺)

Lesley 2011. 6. 11. 00:25

 

  지난 5월 하순에 갑자기 간송미술관에 가게 되었는데, 이왕 그 쪽으로 발걸음 한 거 아예 그 근처에 있는 길상사(吉祥寺)까지 다녀왔다.

  ☞ 간송미술관 - 사군자대전(http://blog.daum.net/jha7791/15790813)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 이라 하여, 군사정권 시절에 삼청각 및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라 불릴 정도의 고급 요정이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유명한 기생으로 이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 1916 ~ 1999)이 대원각을 통째로 시주하여 사찰이 되었다.  원래 김영한는 작년에 열반에 든 법정스님에게 직접 시주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소유를 평생의 철칙으로 삼은 법정스님이 10년 동안이나 거절하는 통에, 결국 조계종 산하 송광사에 시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원각은 송광사 소속 사찰이 되었고, 김영한의 법명인 '길상화(吉祥華)' 에서 이름을 따와 '길상사' 라 하게 되었다.

 

 

 

 길상사의 정문 격인 일주문

 

  서울에 이렇게 고즈넉한 절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같은 서울의 절이라도 경복궁 근처 조계사 같은 경우는, 시내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다.  하지만 여기는 시내버스도 안 다니는 언덕배기 주택가에 위치한 통에(성북동이 워낙 부자 동네라 지나가는 승용차는 죄다 외제 승용차였음. 평생 가야 버스 이용할 일 없는 사람들만 사는 이런 곳에 버스 운행하는 운송회사가 있다면, 틀림없이 적자로 망할 것임. -.-;;), 산 속에 위치한 절을 찾았을 때와 비슷한 평화로움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사찰 안 풍경

 

  길상화 김영한은 북한의 시인 백석(白石)과의 열렬하고 애닲은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김영한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가난 탓에 16세의 나이로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미모에, 춤과 노래 솜씨도 뛰어나고,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학적인 재능까지 있어서, 인텔리 기생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2살 때, 함흥에서 여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백석(白石)과 만나게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김영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는 시까지 쓸 정도로 김영한을 사랑했다.

 

  하지만 백석이 기생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백석의 집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백석의 부모는 아들을 김영한과 떼어놓기 위해 강제로 결혼시켰다.  하지만 백석은 결혼 첫날밤 도망을 쳐서, 김영한에게 만주로 함께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기생과의 야반도주가 백석의 앞날에 큰 문제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 후로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했다.  해방 후 백석이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곧 남북이 갈리게 되어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백석 역시 김영한처럼 장수하여 1995년까지 생존했었다고 하니, 두 사람이 1930년대에 이별을 하고 그 긴 세월을 살면서 한 번도 못 만난 것이 더욱 안타깝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영원히 이별했지만, 김영한은 평생 백석을 사랑했다.

  김영한이 조계종에 그 당시 시가로도 1,000억원대였던 대원각을 시주하자, 어떤 기자가 1,000억이나 되는 재산을 내놓고도 후회하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그 때 김영한의 대답이 '무슨 후회요? 1,000억의 재산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 합니다.' 였다고 하니, 절개와 기상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여러 종류의 수목 사이에 서있는 범종

 

  처음 일주문을 들어서서 좀 의외였던 것이, 사찰 내부의 수목과 돌들이 너무 잘 꾸며져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범종과 범종각만 봐도, 그 주위를 둘러싼 멋진 나무들 덕분에 다른 절의 범종과 범종각보다 훨씬 격조있게 느껴진다.  겨우 20년도 안 된 절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게 너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많은 돈을 들이고 안목이 있는 사람이 꾸민다면야, 정원을 예쁘게 꾸미는 게 뭐가 어렵겠나...  하지만 아무리 돈을 들이고 세련된 안목을 지닌 사람이 애써도, 세월의 힘이라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즉, 화려하게 꾸밀 수는 있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는 그런 분위기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가해지지 않으면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상사는 역사가 20년도 안 되는 절이건만, 사찰 내의 모든 정원수와 정원석이 다 제자리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며 생각해보니, 이 절의 역사가 짧을 뿐, 절의 건물과 정원은 50년이라는 제법 긴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더군다나 대원각이 군사정권 시절 최고의 요정이었다니, 당시 잘 나가는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 눈높이에 맞추려면, 얼마나 공을 들였겠나...  그냥 덮어놓고 비싼 물건으로 덕지덕지 붙이는 것으로는 안 되었을테고, 품격이니 분위기니 하는 것을 많이 고려했을 것이다.

 

 

 

길상사의 정전 격인 극락전

 

  대학 때 '한국 문화와 전통' 이란 교양과목을 들으며, 절의 구조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절의 정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이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대웅전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전각이다.  그 때 특이하게 대웅전 없이 극락전이 절의 정전 역할을 하는 몇몇 절과 그 이유를 배웠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ㅠ.ㅠ  왜 여기는 대웅전은 없고 극락전만 있단 말인가...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로 설명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이 극락전을 보면 알겠지만, 다른 절과는 달리 길상사는 단청을 칠한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요정이었던 시절의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서 쓰느라 가급적 손을 대지 않은 듯 하다.  처음에는 다른 절과 달라 좀 낯선 느낌이었는데, 자꾸 보니 오히려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하는 수수한 멋이 느껴져 좋았다. ^^ 

 

 

 

극락전 옆 법고와 목어 

 

  극락전 오른쪽으로 가면, 극락전 지붕 아래 저렇게 법고와 목어가 매달려있다.

  법고는 그렇다치고, 목어는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본 듯 하다.  마치 승천하는 용의 입이나 발톱에 여의주가 있듯이, 저 목어 입에도 둥근 구슬 모양이 나무공이 물려있던데 이건 또 어떤 의미인지...  가끔 철없는 짓을 하는 관람객들이 있는지 '법고와 목어는 불사에 쓰는 물건이니, 치지 마세요' 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정말 왜들 그러셔~~ 제발 관람문화 수준 좀 높입시다...! )

 

 

 

아마... '침묵의 방' 이었던 듯? ^^;;

 

  다녀오자 마자 포스팅을 했어야 하는데, 벌써 전각 이름들이 가물가물하다.

 

  전각 주위에 대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있는 것이, '침묵의 방' 이 맞는 듯 하다.  안에 침묵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밖에서도 조용히 해달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긴 건물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에게 그보다 중요한 건, 저 건물과 건물 주위의 수목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

 

 

 

길상사 경내의 꽃과 약수

 

  저 꽃은 간송미술관에도 피어있던데, 도대체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

  간송미술관에는 2미터는 훌쩍 넘길 키의 꽃나무가, 여기 길상사에는 내 키보다도 작은 아담한 꽃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  마치 저 새하얗고 작은 꽃들을 일부러 한 자리에 모아붙여 공 모양을 만든 것 같은, 특이하고 재미있는 모양새다. ^^

 

  그리고 극락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저 약수...

  절에 가서 저렇게 나무로 된 바가지로 약수 떠마실 때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 '피해자'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년만에 우연히 만난 첫사랑 요한을 따라 경주까지 간 명숙이가, 석굴암 근처의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서 그 물을 그대로 요한에게 건네주어 마시게 했던 부분이다.  서로 좋아했지만 맺지 못 한 남자에게, 자살하기 직전 자신이 마신 물을 마시게 했던 것은 어떤 뜻일까?  다음 생에서는 꼭 사랑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합환주 비슷하게 나눠 마신 건지...

 

 

 

  '참선의 집' 아래편에 있는 예쁜 문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문이다.

  아기자기한 느낌도 들고, 운치 있고...  이 곳이 대원각이었던 시절, 이 곳을 열심히 드나들었을 정치인들이나 그 밖에 상류층 인사들의 꿍꿍이를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뭔가 까다로운 문제 때문에 거물을 접대할 필요있을 때 이런 곳으로 데려온다면, 그 거물은 이 운치 있는 풍경에 절로 마음이 느긋해져 자기도 모르게 순순히 해달라는대로 해줬을 것만 같다. ^^

 

 

 

승려들의 처소.

 

  승려들이 쓰는 작은 방들이 각각 독립되어 '계단식 밭'(표현이 참... -.-;;) 같은 모양새로 흩어져있다.

  그런데 저 방들은 원래는 대원각 시절 기생들이 손님들 접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인 밀실정치가 이루어졌던 곳이며 성의 상품화가 이루어졌던 곳이인데, 이제는 수도에 정진하는 승려들의 처소가 되었다니...  분명 좋은 쪽으로 진화(?)한 게 맞긴 한데, 기분 참 묘하다. ^^;; 

 

 

 

승려 외에는 출입금지라는 구역. ^^

 

  이 곳은 무엇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다만 길상사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라고 써뭍여놓았다.  내가 직접 가본 곳이 아니라면, 이 사진만 보고서 절이라고는 생각 못 하고 안동 하회마을 등 전통가옥이 잘 보존된 곳의 가옥 풍경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문득 이미 더워지고 있는 지금, 저 곳에서 며칠 한가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며 그 말을 했더니, 친구 왈 '한옥에 벌레가 얼마나 많이 꼬이는 줄 알아? 특히 여름에는 벌레 천국이야~~' (오, 벌레는 절대 사절...! ㅠ.ㅠ) 

 

 

 

서비스 컷으로 올리는 성북동의 담쟁이덩굴.

 

  길상사도 한 번 꼭 가볼만한 곳이었지만, 길상사 가는 길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부촌이라 깔끔하게 단장된 저택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고, 오가는 차량이 많지 않아 한적하다.  혼자서 또는 마음에 맞는 동행 딱 한 명만 끌고서 발길 닿는대로 이리저리 걷기 좋은 길이다.  비록 이 동네 저택들의 담이 하도 높아 안을 구경할 수는 없지만, 초여름을 맞아 담에 무성하게 퍼진 싱그러운 담쟁이덩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

 

길상사(吉祥寺)의 단풍 구경하세요!(http://blog.daum.net/jha7791/15790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