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서예와 나의 인연

Lesley 2011. 6. 19. 00:08

 

  최근에 중국 친구 진쥔이 서예 작품 사진 몇 장을 보내줬다.

  원래도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서예에 관심이 많은데, 최근에는 서예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중국인은 다들 어느 정도는 서예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던데, 젊은이들이 서예에 그다지 관심 없기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마찬가지임. ^^;;)  원래 수강과목이 아닌 서예수업을 청강까지 하고, 저녁마다 정작 공부해야 하는 것은 미뤄두고서 열심히 서예만 쓰고 있다 한다.

 

 

  하여튼, 그렇게 서예 작품 사진 몇 장 받은 김에, 서예에 관련된 내 기억을 되살리자면...

 

 

  중학교 몇 학년때였는지, 하여튼 중학교 때 서예학원을 1년 정도 다닌 게 서예와의 첫 만남이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내가 왜 서예를 시작했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의 가장 큰 의무는 대학 합격이라는 게, 우리나라 학부모 대부분이 절대진리(!)처럼 믿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학교 공부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서예를 배우게 되었던 게 부모님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그 나이에 딱히 서예에 관심이 있었나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것 참,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끼워넣어야 하는 건지 어떤 건지... -.-;;

  하여튼 서예학원을 1년 다니면서, 적어도 붓 다루는 법과 해서(楷書 : 보통 한자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적이고 단정한 서체)와 궁체(宮體 : 설마 궁체를 모르는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의 기초 정도는 배웠다.  덕분에 한자를 거의 그리다시피 하는 같은 반 학생들 틈에서 한문 선생님 눈에 띄여, 수업시간에 앞에 나가 본보기로 칠판에 글을 쓰는 영광(?)도 누려봤고... (대부분의 학생이 한자획 중 갈고리 같은 건 완전히 무시하고 썼음.)

 

 

  그렇게 1년 배우다가 말았던 서예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하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건교 이념이  '전통 여성의 내훈(內訓)' 일 정도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보수적인 학교였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참 고풍스럽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마침 부모님 주위에 서예학원을 운영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우리 학교 이름을 듣고서 '그 학교 교장 집안이 한국 서예계에서 알아주는 가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라니, 말 다 했다.  또 내가 그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그리고 나중에 대학에 진학해서도, 신문에 교장 선생님의 누님(당시 우리 학교의 가정 선생님이셨음. 정말 딱이다~~ -.-;;)의 인터뷰가 실린 것도 보았다.  무슨 전통음식 관련한 기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집안이 왕실의 음식과 양반가의 음식의 맥을 잇고 있는 몇 안 되는 집안 중 하나라나? 

  하지만 21세기를 바라보는 시기(그 때가 1990년대였으니 아직 20세기였음.)에 '전통 여성의 내훈(內訓)' 이라니, 이게 도대체 웬말이냐... -.-;;  그나마 내훈 정도로 그쳤으니 망정이지, 좀 더 구체화되어 여필종부(女必從夫)니 삼종지의(三從之義)니 하는 말까지 나왔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ㅠ.ㅠ

 

 

  하여튼 이런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 온 가족이 한 실력하는 서예가들인 교장 선생님 집안 내력까지 겹쳐서, 우리 학교의 1학년 학생들은 1주일에 한 번씩 교장 선생님의 부인이 하시는 서예강습을 들어야 했다.

  그 부인께서도 만만찮은 서예 실력자이시긴 했는데, 결정적인 흠이 하나 있었으니 학생들을 전혀 다룰 줄 모르셨다는 점이다. -.-;;  고등학교 여학생하면 순수하고 꿈많고 감성이 풍부한, 한 마디로 천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잔머리 굴리는데는 도가 텄고 강한 선생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며 약한 선생님 앞에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악마(!) 같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첫 수업 때 그 분이 심약한 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고, 그 후로는 아예 그 분 머리 위에 눌러앉았다.

  손에서 놓았던 서예를 다시 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도 들고 해서 붓 좀 다시 잡아보려 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예는 무슨 서예...  망아지처럼 제멋대로인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전혀 통제 못 하는 교장 선생님 부인 사이에서, 서예강습은 서예를 빙자한 수다떨기 및 연예 기사 읽기(서예 연습용으로 신문지를 가져오게 했는데, 상당수 학생이 연예인 관련 기사가 실린 부분만 들고 왔음.)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

 

 

  그리고 대학에 입학해서 학생회관에서 우연히 서예 동아리를 발견하고, 잠시 마음이 동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다른 동아리에 가입한 뒤라, 두 개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사실 이 부분이 정말 아쉽다.  그 때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결정했지만, 사실 내가 가입했던 동아리는 나와 잘 안 맞는 곳이었다. (에잇, 그 때 과감히 서예 쪽으로 방향 틀었어야 하는데...! ㅠ.ㅠ)

 

 

  그 뒤로 오랫동안 서예를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재작년에 중국 하얼빈 흑룡강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으며 서예를 다시 접할 기회가 생겼다.

 (☞ 1일 서예 강습회 참가기 (http://blog.daum.net/jha7791/15790513) 참조) 

  그러다가 마지막 학기에는 비록 10회 밖에 안 되는 짧은 수업이기는 하지만, 서예수업을 신청해서 다시 접하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다시 손 놓게 된 게 무척 아쉽다.  사실 집에서 혼자 하라면 못 할 것도 없는데, 역시 혼자서는 안 하게 된다. ^^;;

 

  아, 하얼빈에서 서예수업 들을 때 있었던 좀 웃긴 사건 하나...

  그 곳에서 서예 선생님이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서체가 구양순(歐陽詢)의 해서(楷書)였다.  구양순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이었는지 대학의 중국역사 시간이었는지, 하여튼 당나라 시절의 유명한 서예가라는 것 정도는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구양순의 성이 구(歐), 이름이 양순(陽詢)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서예수업 마지막 날, 어찌어찌하여 성이 구양(歐陽) 이고, 이름이 순(詢)인 걸 알게 되었다. (이게 뭥미~~ -.-;;) 

 

 

 

PS.  이 포스트 맨 위에서 말한, 친구가 보내준 서예작품의 사진을 서비스 차원에서 올리겠다.

 

 

 

 

 

 

  여러 장을 보냈는데 이 두 장만 올리는 이유는, 이 두 장의 사진에 실린 서체가 가장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서체가 미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글씨 쓴 사람들이 이미 유명한 서예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내가 문외한이기 때문일까...  만일 나 같은 사람이 저 두 장의 사진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역시 왕초보라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비뚤비뚤 써놓았군.' 이라는 소리 밖에 못 들을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