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유우석(劉禹錫)의 죽지사(竹枝詞)

Lesley 2011. 5. 25. 00:24

 

  최근에 우연히 당나라 때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의 죽지사(竹枝詞) 중 일부(전부가 아닙니다~~ ^^;;)를 알게 되었다.

  유우석은 혁신파 관료들과 친하게 지내며 정치 개혁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지방직 관원으로 좌천되었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는데, 이 죽지사가 원래는 모두 아홉수로 이루어진 장편이다.  하지만 아홉수는 너무 길어서(^^;;) 내가 알게 된 제 이수의 첫번째 부분만 포스팅하겠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시는 분명히 유우석이 지은 것이지만, 그 원본이랄 수 있는 노래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유우석이 좌천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던 곳은 지금의 충칭(重慶 : 중경), 쓰촨(四川 : 사천) 일대였다.  그런데 이 곳은 고대에는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 다른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가 있었던 곳이다.  충칭에서는 파(巴)라는, 쓰촨성에서는 촉(蜀)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다.  이 두 고대국가에서는 민요가 발달했는데, 이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와 남녀간의 애정을 자유롭게 노래한 내용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詩)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당나라 시절의 여러 시인들이 이 지방의 민요를 인용 또는 개작하여 자기 시에 사용했다고 한다.  장한가로 유명한 백거이 역시 그렇게 파(巴)와 촉(蜀)의 민요를 즐겨 사용했고, 유우석 또한 이 죽지사에 파의 민요를 사용한 것이다.

 

 

 

죽지사(竹枝詞)

                                                        유우석(劉禹錫)

 

 

 

楊柳靑靑江水平 (양류청청강수평)  버드나무는 푸르고 강물은 잔잔한데


聞郎江上唱歌聲 (문랑강상창가성)  강물 위 님의 노랫소리 들리네


東邊日出西邊雨 (동변일출서변우)  동녘에서 해 뜨고 서녘에서 비 내리니


道是無晴還有晴 (도시무청환유청)  궂은 날씨야말로 오히려 맑은 날씨라네

 

 

 

  그런데 이 죽지사는 나와 재미있는 인연이 있다.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한국의 케이블 TV에서 '금지욕얼(金枝欲孼)' 이라는 2004년판 홍콩 드라마를 무척 재미있게 봤다. (이 드라마의 한국 제목은 '황제의 여자' 였고, 영어 제목은 'War And Beauty' 였음.  작명 센스하고는... -.-;;)

  한국 보도자료에서는 '홍콩판 여인천하' 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솔직히 이 드라마가 우리나라 드라마 여인천하보다 100배는 낫다. ㅠ.ㅠ  여인천하가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는 용두사미와 질질 끌기의 결정판으로 변했던 데 비해, 이 금지욕얼은 처음부터 끝까지 짜임새 있었다.  줄거리가 개연성 있는데다가, 제대로 된 몇 차례의 반전도 갖추고 있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입체적이었으며, 배우들의 연기마저 좋았다.

 

  그래서 하얼빈에서 어학연수 하던 중 아예 이 금지욕얼의 VCD를 구입했다.

  그런데 한글 자막 없이 보려니, 한국에서 볼 때는 몰랐던 의문점이 생겼다.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안천'이라는 궁녀가 의남매 관계인 내관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면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안천에게, 내관이 신랑감을 찾을 생각이 있는지 넌지시 떠본다.  안천은 관심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지만, 내관은 안천이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그 때 그 내관이 하는 말이 바로 위에 쓴 죽지사 중 아랫부분 두 구절이다.  즉, '東邊日出西邊雨 (동변일출서변우) / 道是無晴還有晴 (도시무청환유청)' 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볼 때는 우리말 자막을 어찌 해놨기에 내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어 자막으로 보려니, 신랑감 이야기 하다가 왜 뜬금없이 날씨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  

 

  알고보니 그 드라마에 나온 이 구절은 유우석의 죽지사 중 일부로, 남녀간의 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아주 유용한 중국어 관용어구다.

  '동녘에는 해가 떠있는데 서녘에는 비가 온다는 것(東邊日出西邊雨 : 동변일출서변우)' 은, 상대방의 태도가 애매해서 그 상대방이 나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밀땅? 아니면 어장관리? ^^)  '궂은 것이 오히려 맑은 것이라는 말(道是無晴還有晴 : 도시무청환유청)' 은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것이야 말로 사실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보통 누군가를 좋아하면, 처음에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 한다.  쑥스럽기도 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느라, 무관심한 척 하곤 한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시와 이 시의 원본이 된 민요는 연애감정을 세밀하게 살리고 있는 셈이다. ^^

 

  그리고 중의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도 상당히 세련되었다. 

  마지막 구절 道是無晴還有晴(도시무청환유청) 중 '맑다, 개이다' 라는 의미의 晴(청)은 공교롭게도 '사랑, 애정' 을 뜻하는 情(정)과 발음이 같다.  물론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晴(청)과  情(정)은 분명히 다른 발음이지만, 중국어 발음으로는 晴(qíng)과 情(qíng)으로 완전히 같다.  그래서 道是無晴還有晴은 '날씨가 궂은 것(無晴)이야말로 오히려 날씨가 맑은 것(有晴)이다' 라는 뜻도 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無情)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사랑하는 것(有情)이다' 라는 뜻도 된다. 

  즉, 금지욕얼에서 그 내관은, 안천이 신랑감 찾는 일에 무관심한 듯 말하지만 속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기다린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東邊日出西邊雨 (동변일출서변우) / 道是無晴還有晴 (도시무청환유청)' 라는 시구를 적절히 사용한 것이다. (그 내관이야말로 낭만을 아는 사람인 듯... ^^ )

 

 

 

  그리고 보너스로 올리는 푸이야오(傅益瑤)의 유우석시의도(劉禹錫詩意圖)...!

 

 

푸이야오(傅益瑤 : 부익요)의 유우석시의도(劉禹錫詩意圖).

 

 

  푸이야오는 중국의 유명한 여류 수묵화가라고 한다.

  그 부친도 역시 유명한 화가라고 하니, 대를 이어 중국 화단에서 큰 활약을 한 셈이다.  푸이야오는 1979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졸업 후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스위스 등 해외에서도 전람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고 한다.

  위 그림은 유우석의 죽지사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동쪽)은 해가 선명히 보이는 맑은 날씨인데, 그림 왼편(서쪽)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  역시 옛 시에는 채색화보다는 수묵화가 제격인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