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고려가요(1) - 쌍화점(雙花店)

Lesley 2011. 1. 24. 01:09

 

  얼마 전에 한국영화 '쌍화점' 을 봤다.

  내가 중국 가기 직전에 개봉했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정작 개봉 당시에는 별 관심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으로 어학연수 떠날 준비하느라 정신 없기도 했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 중 '수위 높은 베드씬 빼고는 별볼일 없는 영화다' 식의 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확 낮아졌기 때문일까...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은 줄 수 있을 정도로 괜찮게 봤다. ^^

 

 

  하지만 이번 포스트의 주요소재는 '영화 쌍화점' 이 아니라, 주인공 중 하나인 주진모(공민왕 역)가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불렀던 고려가요(高麗歌謠)인 '쌍화점(雙花店)' 이다.

  내가 이 영화를 흥미롭게 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려가요 '쌍화점'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고려가요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바로 쌍화점이기 때문이다. ^^  흔히 쌍화점의 내용이 그 당시의 자유분방(또는 타락한) 성의식을 잘 드러낸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파격적인 내용이 무척 해학적이며 통쾌하게 느껴진다. 

 

 

  먼저 쌍화점과 나의 첫만남(?)에 대해 설명하겠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교과서에 쌍화점이 실려있지 않았다. (지금도 안 실려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음.)  다만 참고서 등을 보니 고려가요(그 중에서도 속요)에 대하여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것이 많아 나중에 조선 건국 후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고 설명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쌍화점 등이 있다고 해서, 쌍화점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대학에 진학해서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소설을 읽으면서, 쌍화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영희라는 작가가 쓴 '달아 높이곰 돋아사'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여성이 나오는데, 이 세 사람은 비록 나이와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우리 역사와 문학에 대해 관심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교양강좌를 수강하며 서로 알게 되면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 대한 사연을 풀어나가는 매개체가 소서노, 알영왕비, 선화공주, 수로부인, 처용의 아내 등 역사와 고전시가에 등장하는 여인들이다.  당연히 그 여인들이 등장하는 역사서의 내용 또는 고대시가가 소개 된다.  그렇게 쌍화점의 내용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쌍화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악장가사에 실린 원문(갈색 글씨)과 현대어 해석(검은색 글씨)을 함께 올리는데, 솔직히 원문은 그냥 지나치기 그래서 한번 올려본 것 뿐이니, 엄청난 관심 있으신 분 아니면 패스하시고 현대어 해석만 보시면 될 듯... ^^;;

 

 

 

쌍화점(雙花店)

 

 

 

샹화점(雙花店)에 샹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싸미 이 店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워 워(偉偉) 다로러 거지러 다로러
긔 잔 데가티 더마거초니 업다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회회 : 회족, 위구르족 등 이슬람권 사람)
이 말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즉, 소문이 퍼지게 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만 어린 광대 네가 소문낸 것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워 워(偉偉) 다로러 거지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난잡한 곳이 없다)

 

 
三藏寺(삼장사)애 블 혀라 가고신댄 
그 뎔 社主(샤쥬)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삿기 上座(샹좌)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듸 가티 덤거츠니 업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즉, 소문이 퍼지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조그만 어린 상좌 네가 소문낸 것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난잡한 곳이 없다)

 

 

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댄 
우믓 龍(룡)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 우물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듸 가티 덤거츠니 업다.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즉, 소문이 퍼지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조그만 두레박 네가 소문낸 것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팔 지븨 수를 사라 가고신된 
그 짓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삼미 이 집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간 싀구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듸 가티 덤거츠니 업다.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즉, 소문이 퍼지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시궁 박아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조그만 시궁 바가지 네가 소문낸 것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난잡한 곳이 없다)

 

 

 

  유학자들의 말을 빌면 음란하기 그지 없는 쌍화점이건만, 내가 쌍화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곳곳에 깃들어 있는 해학 때문이다.

  마지막 4절에 나오는 술집 주인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방인인 회회아비나 수행에 정진해야 할 승려와 엮인 것만으로도 파격적인데, 심지어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영물인 용조차 이 여인의 손목을 못 잡아 안달내는 상황이라니...!  소설 '달아 높이곰 돋아사'에서 쌍화점을 처음 접했을 때, 이 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그만 빵 터져버렸다.  그 정도로 나에게는 이 부분이 기막히게 해학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이 용을 왕 또는 왕만큼이나 강력한 권력을 가진 어떤 권력자로 보는 해석이 유력한 모양이다.  분명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그냥 상상 속 영물인 용 그대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신성한 용조차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나설 정도의 고려시대판 퀸카라니...! ^^ 

 

 

  과연 쌍화점은 근엄하다 못 해 벽창호 같았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질색할만한 파격적인 내용이다.

  이 노래의 화자는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든 남자들의 눈길을 끌만한 대단한 미인인지, 아니면 속된 말로 헤프기 짝이 없는 여인인지, 아니 어쩌면 양쪽 모두에 해당이 되는지...  하여튼 가는 곳마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즉, 1절에서는 외국인인 회회아비, 2절에서는 금욕해야 하는 승려, 3절에서는 용(또는 지체가 아주 높은 세력가), 4절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백성을 대표하는 술집 주인...  그렇게 각계각층의 사내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고려시대 남녀관계가 후대의 조선시대와는 다르게 얼마나 자유분방했나 알 수 있다. 

  게다가 매 절에서 반복되는 후렴 부분에서는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라고 하며, 또 다른 화자를 등장시켜 역시 후렴구로 반복되는 '그 잔데 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는 요란한 향락의 자리에 자신도 가서 자고 싶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그런 남녀문제 이외의 면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매절의 후렴구에 '소문이 나면 새끼 광대 네 탓이다', '소문나면 상좌 아이 네 탓이다',  '소문나면 우물의 두레막 네 탓이다', '소문나면 시궁 바가지 네 탓이다' 하여, 이 아슬아슬한 만남이 남의 눈에 띌까 걱정하는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만 소문났을 때 일을 저지른 자신들을 탓하는 게 아니라, 아무 힘 없는 새끼 광대, 상좌 아이, 심지어 생명이 없는 우물의 두레박과 시궁 바가지 탓을 하겠다고 아주 작정을 했다.  '잘되면 내 탓, 잘 못 되면 조상탓' 인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다니...

 

 

  보통 사람들 입에서 나오면 그저 음담패설 밖에 안 되는 내용인데, 이렇게 다른 이에게 깊은 인상 주는 노래로 만든 것을 보면, 시와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게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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