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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晚秋, Late Autumn) - 2

Lesley 2011. 3. 6. 00:42

 

  아픈 기억을 더듬고 치유하는 시애틀 투어

 

  그렇게 두 사람은 기묘한 시애틀 투어에 나선다.

  영화에 등장한 내내 느끼하고 경망스러운 짓만 했던 훈이지만, 이제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애나에게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다.  애나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재미있는 행동이나 말로 즐겁게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애나는 그렇게 마음 써주는 사람에게, 하다못해 예의상 억지 웃음 지어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이제는 처음 간 남의 집처럼 어색하기만 한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되도록 늦추기 위해 훈을 따라다닌다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놀이공원에서 한 쌍의 남녀를 보게 된 일로, 애나의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듯한 상황인데, 애나와 훈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훈이 그 남녀가 무언가 말할 때마다 마치 더빙 작업하는 성우처럼 적당한 말을 하면서 '여자를 떠나려는 남자와 그 남자를 붙들려는 여자' 의 사연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나를 찾았지?" (남자)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알 수 있어." (여자)

  "이제 나를 그만 놓아줘." (남자)

  "왜 나를 떠나려는 거지?" (여자)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 (남자)

 

  훈이  그저 재미로 한 이 행동이 애나의 묵은 상처를 욱씬거리게 한다.

  훈이 만들어내는 대사에서 자신과 왕징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린 것이다.  어느 순간 애나가 불쑥 끼여들어 여자의 대사를 맡는다.  자신과 있는 내내 무심했던 애나가 갑자기 나서자, 훈은 깜짝 놀란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애나가 하는 여자의 대사에 맞춰 남자의 대사를 만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니야, 당신도 분명히 나를 사랑했어." (여자)

  "내가 언제 당신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 (남자)

  "말로 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당신이 눈빛으로, 손짓으로 사랑한다고 했잖아." (여자)

  "그렇지 않아." (남자)

  "아니, 맞아. 그런데 이제와서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여자)  

 

  그리고 애나가 자신이 남편을 죽였고 다음날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털어놓은 순간, 기묘한 일이 생긴다.

  말다툼을 하던 남녀가 만화의 주인공처럼 과장된 움직임으로 함께 춤을 추는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꿈 같은 상황은 왕징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 한 애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그리고 그 환상을 훈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훈이 그만큼 애나의 마음에 깊숙히 들어갔기 때문일까?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두 사람은 기다란 벤치 양쪽 끝에 떨어져 앉아 있다.

 

 

 

 

  애나가 불쑥 자신의 사연을 꺼낸다.

  오빠의 친구인 왕징을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일, 의처증을 보이며 자신을 구속하고 때리던 남편, 그런 때 다시 등장해서 자신에게 다가섰던 왕징, 그리고 그 일을 눈치채고 자신을 죽도록 구타했던 남편,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질린 나머지 얼떨결에 남편을 죽이게 된 자신,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왕징이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살고 있는 지금의 상황...  이런 사연을 나즈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격정적인 말투와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는데, 얼마 안 가 갑자기 중국어로 바꾸어 말한다.

  하지만 훈은 당황해하거나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말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온갖 감정으로 번뜩이는 애나의 눈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애나가 하는 말 중간 중간에 자신이 아는 단 두 개의 중국어 단어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 를 번갈아 쓰며 맞장구를 쳐준다.

  훈이 애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 하기에, 슬픈 대목에서 '하오' 라는 추임새를 넣기도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  하지만 애나는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이기에, 그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사연과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훈 역시, 지금 애나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그냥 아무 말 없이 들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과거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애나, 그런 애나를 지켜보는 훈

 

  다음날 치러진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에, 뜻밖에도 훈이 조문을 온다.

  장례 후 유족들과 조문객들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훈, 애나, 왕징 부부가 한 테이블에 앉는 어색한 상황이 펼쳐진다.  왕징의 부인은 애나와 자기 남편의 과거를 모르는데다가, 애나가 오랫동안 그 동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게 중국에서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애나 가족들이 주위 사람들한테 애나가 살인죄로 교도소에 갔다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중국에 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임.)

  왕징 부인의 오해에, 정체를 솔직히 말할 수 없는 훈의 거짓말까지 겹쳐서, 훈은 중국에서 번듯한 레스토랑를 운영하고 있으며 조만간 애나와 결혼할 사람으로 둔갑(!)해 버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왕징 부인이야 잘 됐다며 애나와 훈에게 축하의 말을 해주지만, 애나의 사정을 뻔히 아는 왕징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훈을 노려본다. 

 

  애나와 왕징 부인이 자리를 뜨자, 왕징은 본격적으로 훈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애나한테서 떨어지라고 경고한다. 

  '이미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애나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라' 라고 훈에게 말했듯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이 수상쩍은 이방인에게서 애나를 보호하려는 의도도 분명 있기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왕징의 눈빛에서 애나와 훈 사이를 질투하는 마음도 새어 나온다. (내가 갖는 것도 싫지만, 남 주기도 아깝다는 건가? -.-;;)

  그 일로 시비가 붙어서, 이 두 남자는 남의 장례식이 막 끝난 자리에서 기어이 요란한 몸싸움을 벌인다.   애나가 뭐하는 짓이냐고 불같이 화를 내자, 훈은 당황한 나머지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들어보이며 '저 사람이 내 포크를 허락도 없이 쓰고는 사과도 안 한다.' 는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한다. -.-;;

 

  하지만 애나는 황당해하기는커녕, 훈에게 화를 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왕징에게도 화를 내며 '왜 남의 포크를 썼느냐? 왜?' 하며 따지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왕징은 애나가 책망하는 게 단순히 포크에 대한 게 아니라, 과거에 애나와 함께 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왜 무책임하게 애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느냐는 원망이라는 것을 알아듣는다.  애나와 재회한 후로 계속해서 태연하게 애나를 대했던 왕징이, 처음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미안하다' 고 말한다.

  그렇게 훈은 자신도 모르게 애나가 속에 꾹꾹 눌러놓았던 응어리를 밖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애나 역시 자신도 모르게 훈을 매개로 하여,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었던 과거의 껍질을 부수고 밖으로 나온다.

 

 

  이별, 그리고 새로운 기다림

 

  특별외출 마지막날, 교도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 애나 옆자리에 훈이 따라 탄다.

  아마 훈은 교도소까지 배웅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일로 훈의 계획은 틀어져버린다.  안개가 자욱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훈은 애나에게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날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며 키스를 한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훈으로서는 어차피 지킬 수 없는 약속이기에 영원한 작별인사 대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애나에게는, 무거운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버스 안에서 잠시 잠들었던 애나가 깨어났을 때, 훈의 코트와 시계만 남아있을 뿐 훈은 안 보인다.

  애나는 버스가 다시 떠날 시간이 되어서야, 훈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손에 든 종이컵에서 커피가 넘치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훈을 찾지만, 사방에는 짙은 안개만 가득할 뿐 훈은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출소한 애나가 그 휴게소에서 훈을 기다리고 있다.

  휴게소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유리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다.  막연히 출소하는 날 만나자고 했을 뿐, 정확한 약속 날짜와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라(정확히 시간을 정했어도 어차피 훈은 못 왔겠지만...), 기약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하지만 애나의 얼굴에는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초조함이나 지루함이 없다.  오히려 어제도 만났던 친구를 오늘 다시 만나려고 기다리는 것 같은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마치 훈을 다시 만났을 때를 대비해 연습하 듯이 중얼거려본다.  "오래간만이에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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