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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 1

Lesley 2010. 11. 11. 21:41

 

 

  '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은 2002년도 영화로, 칸느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영화 제목부터가 특이하고 재미있는데, 발자크는 19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Balzac)를 말하고, 소재봉은 '작은 재봉사' 또는 '재봉사의 조수'라는 뜻으로 영화의 세 주인공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감독인 다이스지에(載思杰 : 대사걸, 그런데 이 이름을 '다이시지에'라고 표기한 우리나라 언론들과 출판계는 도대체 뭥미? -.-;;)는 이 영화 원작소설의 작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태어난 다이스지에 감독은 1980년대 프랑스로 유학을 간 후, 그 곳에 계속 머물며 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이스지에는 문화대혁명 때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산골로 하방(下放 : 반혁명분자으로 지목된 또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도시 젊은이들을 오지로 보내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사상 교육을 받게 했던 것)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발자크와 소재봉' 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프랑스에서 좋은 평을 받았고, 나중에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를 제작했다.

 

 

'발자크와 소재봉'의 세 주인공인 유엽(劉燁), 주신(周迅), 진곤(陳坤) 

 

  

  마오쩌둥(毛澤東 : 모택동)을 찬양하는 홍위병들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험준한 산길을 힘겹게 오르는 두 청년의 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두 청년은 이제 겨우 소년티를 벗은 19세의 '마(유엽)''루어(진곤)' 다.

  중국의 역사를 100년은 후퇴시켰다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 전체를 휘감던 1970년 초반...  도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들도, 부모가 반혁명분자로 찍히는 통에 하루아침에 하방된 것이다.

 

  그나마 평범한 시골로 하방되기나 했으면 좀 나았으련만...

  마와 루어가 하방된 곳은 말 그대로 깡촌(!)이다.  명색이 촌장이라는 사람조차 까막눈인데다가, 마와 루어가 가져온 자명종과 바이올린이 뭔지 몰라 신기해 할 정도로 바깥 세상에 깜깜절벽인 사람들만 우글거리는 산골짜기 마을이다.

  도시에서 곱게 자랐을 두 청년은 봉황산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생전 안 해 본 험한 일(재래식 화장실의 분뇨를 길어다가 논밭에 거름으로 주기, 구리광산에서 광부일 하기)을 하며 지내게 된다.  한 번 하방된 이상, 언제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고사하고, 과연 돌아갈 가능성이 있긴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다.

 

 

 

  마을의 이야기꾼으로 자리잡은 두 청년

 

  어느 날 깐깐한 촌장이 두 청년에게 임무를 하나 준다.

  그 무렵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를 보고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줄거리를 전해주라는 임무다.  활발한 성격의 루어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영화 내용을 실감나게 말하고, 세심한 성격의 마는 영화 속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쌀겨를 지붕 위에서 사람들에게 뿌려 눈 내리는 광경을 연출한다. (이 봉황산이 쓰촨성이던가, 윈난성이던가... 하여튼 중국 남쪽지방에 있는 곳이라 눈을 거의 구경할 수 없는 동네임.)

  한창 감수성 예민한 나이의 마을 처녀들은, 마가 연출한 분위기에 젖어들고 루어가 생생하게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홀려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무뚝뚝한 산골 마을 아저씨들마저 그 다음은 어찌 되느냐고 이야기를 재촉할 정도로 영화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다. 

 

  그렇게 외지에서 들어온 두 청년은 마을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이야기(그냥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대표되고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를 알려주는, 일종의 문화 전달자가 된 것이다.  

 

 

 

  암담한 현실에서 두 사람의 숨통을 터주는 소재봉과 책

 

  소재봉(주신)은 이 산골짜기의 유일한 재봉사인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조수 노릇을 하는 18세의 처녀다. (그래서 원래 이름이 따로 있겠지만, 사람들이 재봉사 조수란 뜻의 '소재봉' 이라고 부름.)

  다른 시골 처녀들과는 달리 깨끗한 피부에 반짝이는 눈을 가진 이 소재봉을 보고, 마와 루어 모두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활발한 루어가 먼저 소재봉에게 다가섰기에, 사려 깊지만 내성적인 마는 그냥 친구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 곁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문화적인 것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답답한 깡촌에서 살게 된 두 청년에게, 책은 최고의 보물이다.

  공산주의 서적, 마오쩌둥 어록, 각종 실용서 말고는 몽땅 불온서적으로 금지되어버린 암울한 시절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두 사람은 뜻밖에도 발자크,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뒤마 등 서양 작가들이 쓴 소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찌든 책' 과 홍루몽 같은 이른바 '봉건사상과 계급사상이 농후한 중국 고전' 을 한가득 얻게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얻은 게 아니라 훔친 거다. ^^;;  자신들처럼 하방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던 청년이 운 좋게도 도시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그 동안 이런 금서(禁書)를 상자에 꼭꼭 숨겨 두고 있었음을 알고 훔쳐낸 것이다.

 

  두 청년과 소재봉, 그렇게 세 사람은 훔쳐낸 책을 남들이 모르는 동굴에 숨겨두고 한 권씩 꺼내어 탐독한다.

  심지어 마는 자기가 입고 다니는 양가죽 조끼 안쪽에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적기까지 한다. (오죽이나 읽을거리에 목 말랐으면...! ㅠ.ㅠ)  마와 루어에게 이 책들은  답답한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위안거리이며, 사랑스럽지만 일자무식인 소재봉을 깨우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특히 적극적으로 소재봉에게 다가서던 루어는, 우리나라의 계몽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들 만큼이나 자기가 소재봉을 잘 가르쳐보겠노라며 의지를 불태운다. (그리고 이런 순진한 생각은 나중에 두 청년이 상상도 못 한 결과를 낳게 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전부 바꿀 수도 있다.

 

  소재봉의 할아버지는 두 청년이 손녀에게 남 몰래 책을 읽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한다.

  늙은 재봉사는 루어를 찾아와서 '한 권의 책이 인생을 전부 바꿀 수도 있다' 면서, 손녀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일을 그만 두라고 말한다.  그렇잖아도 머리에 먹물이 들었고 가방끈이 길다는 사실만으로 반동분자로 몰리는 무서운 세상이다.  그러니 재봉사 입장에서는 손녀가 정부에서 금지한 책을 읽다가 큰 화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할 수 밖에 없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전부 바꿀 수도 있다' 라는 재봉사의 말은 나중에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영화 끝부분에서 소재봉의 인생은 한 권의 책 때문에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다만, 인생이란 언제나 예측불가라, 할아버지가 걱정했던 그런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이 서양 문학책들은 소재봉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록 인생을 전부 바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꽃 파는 처녀'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들어서, 그 후로 두 청년에게 다른 영화 이야기도 해달라고 조른다.  그러면 루어와 마는 몰래 읽은 책의 내용을 마치 전에 봤던 영화 줄거리인 것처럼 들려준다.  그런 식으로,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정부의 정책을 위반(?)하며 바깥 세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심지어 책이 손녀에게 해를 끼칠까봐 두려워하는 재봉사조차, 자신도 모르게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서양 문화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어쩌다 보니, 한동안 재봉사와 두 청년이 한 곳에서 살게 되었다.  당연히 몰래 책 읽는 데 방해가 된다.  그래서 한밤에 루어가 재봉사 몰래 동굴에 가서 책을 꺼낼 수 있도록, 마가 재봉사의 주의를 돌리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때 마가 쓴 방법이 '몽테 크리스토 백작' 의 줄거리를 재봉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이 영감님이 그 이야기에 흠뻑 취한 것이다.  낮에는 바쁘게 바느질 하느라 못 쉬고 밤에는 이야기 듣느라 못 자는 생활을 무려 9일이나 했으니...  마침내 다크써클(!)까지 생겨버린 재봉사 할아버지... ^^


  늙은 재봉사는 책에 실린 삽화를 보지 못했음에도, 마의 이야기만 듣고서 마을 사람들의 옷을 죄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 에 나오는 18세기 프랑스풍으로 만들어 버린다...!

  덕분에 온통 공산당식 인민복 아니면 중국 전통 복장 일색이던 마을 처녀들 옷이, 리본 달린 블라우스와 하늘거리는 원피스로 바뀐다.  게다가 이 옷 저 옷 할 것 없이 해군들이 흔히 팔에 문신으로 새겨넣는 배의 닻 모양이 들어가게 된다. (이 영감님, '몽테 크리스토 백작' 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선원 출신이라는 게 어지간히 인상 깊으셨던 모양임. ^^)  열심히 옷을 만드는 늙은 재봉사 근처에 몰려들어 줄을 선 마을 사람들, 변변한 거울도 없어서 새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강물에 비춰 보는 처녀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재봉사가 만든 새로운 옷이 산골짜기 마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결국, 마와 루어가 소재봉과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준 것은, 그냥 단순한 소설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산골짜기 말고도 더 넓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째로 부정당한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마와 루어가 이야기를 통해 전해준 바깥 세상의 문화 덕분에, 정부가 시키는대로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던 이 산골짜기 동네 사람들 마음에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 것이다.

 

(스크롤바의 압박으로 줄거리 뒷부분은 다음 포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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