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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 2

Lesley 2010. 11. 13. 20:16

 

  연정을 불태우는 어린 연인들,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친구

 

  구리광산에서 사고가 일어났는데, 촌장은 그 와중에도 하늘(!)과도 같은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구하다가 크게 다친다. (새삼스레 느낀 건데,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은 지금의 북한과 비슷함. -.-;; )

  항상 공산당의 시책을 따를 것을 강조하며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고 깐깐히 굴던 촌장이 두 달이나 몸져누웠으니, 마을 사람들 모두 해방감을 느끼며 확 풀어져버린다.  이런 분위기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주인공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에 재주가 있는 마는 방앗간 노인을 찾아가 그 지방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민요를 채록한다.  그 민요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앞뒤 상황 봤을 때 성애(性愛)를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는 노래가 분명하다.  즉,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에서는 반동적이고 퇴폐적인 곡으로 간주될만한 민요인데, 감시자(촌장)가 제 역할을 못 하는 틈에 그 민요를 악보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루어와 소재봉은 마보다 더 크게 일을 저지른다.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가진 것이다. (방앗간 노인이 부르는 민요가 배경으로 깔리며 물 속에 든 루어와 소재봉의 모습이 비춰지는 연출이 괜찮았음. ^^) 

 

  그리고 머지않아 어린 연인들이 젊음과 본능이 이끄는대로 행동한 결과가 나타난다.

  소재봉이 임신을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루어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잠시 집으로 간 상황이다.  그래서 루어가 떠난 동안 소재봉에게 대신 소설을 읽어주고 온갖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일로 소박한 행복을 느끼던 마가, 졸지에 이 일처리를 떠맡게 되어 버렸다.  

 

  마는 읍내의 의사를 찾아가 낙태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때 마가 도움을 청하는 대가로 내민 것이, 몰래 보던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옮겨 적은 양가죽 조끼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문화의 암흑기였던 시절이다.  그러니 아직 어린 두 청년 뿐 아니라, 명색이 의사라는 사람조차 읽을거리에 굶주려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가 내놓은 양가죽 조끼는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하는 뇌물인 셈이다. 

 

  마는 낙태수술 문제로 애를 쓴 것도 모자라, 울적한 소재봉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한다.

  자신의 소중한 바이올린을 의사에게 팔아 돈으로 바꾼 것이다...!  자신을 친구로만 대하는 여자에게 돈을 쥐어주며 읍내에 나가서 뭐든지 원하는 것을 사서 기분 전환하라는 마... (남자나 여자나 벙어리 삼룡이과에 속하면, 오히려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못 얻는 모양임... ㅠ.ㅠ) 

 

 

 

  예상 결말, 그리고 30년 후... 

 

  루어가 집에서 돌아와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루어와 마는 소재봉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소재봉의 무지를 고치겠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니?  넌 성공한 거야."

  "그래, 이제 말투도 많이 좋아졌어.  소설을 읽어준 게 큰 도움이 된 거지."

  자신이 소재봉을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루어의 뿌듯한 웃음.  그런 루어의 성공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마의 다정한 표정.

 

  상영시간이 20분도 안 남은 이 시점에서, 영화의 결말은 둘로 좁혀진다. 

  1.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 루어와 소재봉은 결혼에 골인하고, 마는 가슴 한켠이 시린 것을 참으며 조용히 축하해준다.

  2. 언제나 그림자처럼 자신 옆에 있어줬고 자신이 가장 힘든 시기에 모든 위험을 함께 무릅써준 마에게, 소재봉이 뒤늦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갑자기 30년을 건너뛰어, 2000년대의 마와 루어를 보여준다.

  마는 프랑스에서 바이올린 연주가로 지내고 있는데, TV를 통해 중국 싼사(三峽 : 삼협)댐 건설에 관한 보도를 접하게 된다.  싼사댐이 완공되면 마가 루어와 함께 하방되어 지냈던 봉황산의 마을도 수몰된다.  그래서 마는 그 전에 그 마을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 곳에서 소재봉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 한다.

  그리고 루어를 찾아 상하이로 간다.  루어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유명한 치과의사 겸 치대교수로 자리잡은 상태다.  거의 30년 만에 해후한 두 친구는 뜨겁게 포옹한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친구는 마가 봉황산 마을에서 찍어온 동영상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긴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든거니?",  "발자크."  

 

  두 친구가 회상하는, 예상된 결말을 뒤집는 소재봉과 두 청년의 마지막 만남.

  어느 날 늙은 재봉사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손녀가 도시로 가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말한다.  놀란 두 청년이 쫓아가 겨우 소재봉을 따라잡는다.  차마 가까이 가지도 못 하고 멀찍히 떨어져서 소재봉과 루어를 쳐다만 보는 마의 안타까운 표정.  소재봉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니?" 라고 묻는 루어의 절망적인 표정.  그리고 루어의 질문에 "발자크" 라고 대답하는 소재봉의 결연한 표정...

 

  이 부분은 발자크(Balzac)란 인물과 그의 소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발자크란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 장면을 볼 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분위기를 보면 분명히 "발자크"라는 소재봉의 대답이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듯 한데,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보니 발자크라는 프랑스 작가는 출세지향적인 소설을 여러 편 썼고, 또 스스로도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발자크의 작품 중 상당수가 별 볼일 없는 시골 태생의 인물이 화려한 도시로 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 명성, 권력을 쌓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즉, 오지 수준의 산골짜기에서 할아버지의 재봉일을 도우며 살던 소재봉은, 두 청년이 읽어준 책 때문에 바깥 세상에는 훨씬 더 화려하고 다양한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더구나 발자크의 책을 보면서, 자신처럼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는 시골 태생의 사람도 일단 도시로 나가기만 하면 출세할 가능성이 있다는 꿈을 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소재봉은 두 청년의 삶에서 떠나간다.

  소재봉을 깨우쳐주겠다면서 책을 읽어주었던 루어의 열정도, 그저 소재봉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며 책을 읽어주었던 마의 순정도, 소재봉을 그들 곁에 잡아두지 못 했다.  두 사람은 소재봉을 정말 사랑했기에 책을 읽어주었는데, 그렇게 읽어준 책이 오히려 소재봉을 두 사람 곁에서 떠나가게 만든 것이다...!

 

  같은 첫사랑의 아픔을 지닌 두 친구는 서로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던 사실을 30년만에 털어놓는다.

  "너도 소재봉을 사랑했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어."

  "아마 그랬을거야.  우리는 둘 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재봉을 사랑했던거야." 

  그리고 그 옛날 마가 자주 연주하던 모짜르트의 소나타가 울려퍼지며, 세 사람의 옛 추억은 그 추억이 어린 산골짜기 마을과 함께 수몰된다...

 

 

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 1(http://blog.daum.net/jha7791/15790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