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내 인생 최초의 주주총회 참석

Lesley 2011. 2. 20. 00:23

 

  토요일인 어제(2월 19일) 오전, 부모님을 대신해서 신협(신용협동조합)의 주주총회에 참석했다.

  물론 나라도 대신 참석하지 않으면 주주총회 개최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부모님이 이 바닥의 거물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주총회에서 특별한 의견을 내놓을 계획이 있다든지 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저 대부분의 소액 투자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주주총회에 가면 기념품을 주기에, 그 기념품 받아오는 사명(!)을 수행하고자 간 것 뿐이다. ^^;;

  어찌된 영문인지 대학 시절부터 어지간한 주주총회는 내가 가는 걸로 굳어져서, 그 동안 이 주주총회, 저 주주총회에 여러 번 가서 각종 기념품을 받아왔다.  보통은 수건, 비누, 치약, 샴푸 등 소액의 생활용품 몇 개를 포장한 것을 준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참치 통조림이나 스팸 통조림 세트 같은 것도 받을 수도 있음. ^^)

  하여튼 총회 참석 확인서를 2장 가져간다고 선물을 2개 주는 것은 아니라, 어차피 내가 못 받을 거라면 인심이나 쓰자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YK을 끌고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이번 주주총회는 그 동안 다닌 주주총회랑 조금 달랐다.

  보통의 경우 소액 주주들은 총회 참석 확인서를 주최측에 넘기고 그 대가(!)로 기념품만 받아, 총회장 안에는 발도 안 들이고 집에 간다.  그런데 여기는 주최측에서 어떻게든 주주들을 총회에 참석시키기 위해, 총회 시작 전 나눠준 기념품 말고도 총회 끝에 별도의 경품행사를 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도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생돈을 쓰나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비록 중소기업이라도 사업의 범위가 전국적인 일반 기업과는 달리, 신협은 각 동네별로 사업을 해서 그런 듯 하다.  즉, 총회에서 의결해야 하는 중요한 안건이 있는 경우, 일반 기업은 주주 숫자 그 자체도 많고 일부 큰손 주주 몇 명의 투표권만으로 쉽게 의결정족수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신협은 '동네 장사'(?)라 주주 숫자도 뻔하고, 대부분의 주주가 소액을 투자한 동네 어르신들이라서 머리 숫자 채우기가 곤란할 것이다.  그래서 기념품만 챙겨 떠나려는 사람들을 붙잡아 경품권 나눠주면서 총회안으로 들어가라고 독려했다.  나와 YK도 기념품만 받고서 그냥 떠나려는데, 어떤 중년의 여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언니들, 어디 가요~~ 경품 행사 있다니까~~ 1등이 김치 냉장고에요~~' 하면서 우리 발걸음을 잡고... ^^;;

 

  주주총회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진행됐다.

  주최측은 그저 빨리 안건 통과시키는 게 목적이었고, 참석한 주주들은 총회 다 끝나고 있을 경품행사가 목적이었으니...  사회자가 안건에 대해 물으면 제발 대답 좀 하라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 대답을 안 한다고, 총회 시작 전에 단단히 일렀건만, '동의합니까?' 란 질문에 묵묵부답인 어르신들... ^^  유치원 아이들 타이르듯이 '자, 대답 좀 하세요~~' 하자 어르신 중 일부가 웅얼거리듯이 '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면 사회자는 '이 안건은 모두 동의했고, 이의 없으므로 통과시키겠습니다.' 하면서 영화 속 재판 장면에서나 봤던 나무 망치로 땅땅땅~~ 하며 통과시키고...  그냥 '총회를 거쳐 통과했다' 라는 구색 갖추기 위한 행사였다. ^^;;

 

  그리고 드디어 이 날의 본론인 경품행사 시작...!

  완전히 코미디였다...!  좀 덩치 있는 전자제품을 상으로 주는 1, 2, 3등 말고도, 150명에게 경품을 준다는데, 앞에서 번호 뽑아 발표하는 사회자는 목이 다 쉬지 않았을까 싶다.  경품행사가 있다고 말했건만, 총회 참석 안 하고 돌아가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당첨번호를 발표해도 안 나타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자는 그 번호를 대신할 다른 번호를 계속 발표해야 하고... (그런데 실제로는 당첨자가 150명이나 되는 것 같지 않던데? ^^;;)

  대부분이 반응이 느리고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이다 보니, 엉뚱한 일들도 벌어졌다.  번호 발표 후에 대답이 없어 이미 떠난 사람인 줄 알고 다른 번호 발표하면 그제서야 아까 번호가 자기 번호라며 손 드는 분도 계시고, 자기 당첨되었다고 흥분해서 손 흔드는데 막상 직원이 경품 들고 가보면 그 번호가 아닌 경우도 있고... ^^

 

  우리는 샴푸니 보온병이니 하는 건 다 필요없다고, 요즘처럼 먹거리 가격 마구 치솟는 때에 쌀포대와 라면 묶음에만 눈독을 들였다.

  다른 허접한(?) 경품 당첨번호 발표할 때 앞부분이 우리 번호와 일치하면 흠칫 하면서 떨기도 하고... (당첨될까봐 흥분해서가 아니라, 당첨 기회는 한 번이라 그 허접한 거 당첨되어 쌀이나 라면 못 받을까봐... ^^)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고가 상품에 우리 둘 중 하나가 당첨되어 '소유권 분쟁'(?) 벌어질까봐 '우리 중 한 사람이 1등 당첨되면 나머지는 반값 내놓으라고 따지기 없기다, 그냥 햄버거 하나 사주고 끝인 거야~~' 하며 미리 합의를 봐놓기도 하고... ^^;;  그러나 결국 우리는 원하던 상품은 물론 허접한 상품조차 당첨이 안 되었다. ㅠ.ㅠ

 

  1등 당첨 발표할 때는 정말 웃겼다.

  사회자가 '이백~~' 까지 말하고 아직 뒤의 두 자리는 발표도 안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총회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즉, 자기가 가진 번호가 이백으로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가 당첨될 일이 없으니, 미련없이 일어선 것이다.  당황한 사회자가 1등 당첨자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가라고 하자, 아직 1등 번호는 끝까지 발표도 안 났는데 다들 자리를 뜨면서 박수치는 황당한 일이... ^0^  박수 소리가 끝나고서야 1등 번호가 전부 발표됐고, 어떤 아줌마가 환한 표정으로 상품인 김치 냉장고 받으러 앞으로 나가시고... ^^ 

 

  함께 간 친구는 총회장이 너무 춥다고 좀 힘들어했지만, 나로서는 비록 아무 것도 당첨 안 되기는 했어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