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2011년도 달력을 꺼내며 - 탁상달력에 얽힌 이야기

Lesley 2011. 1. 2. 21:12

 

 

 

  2011년의 두번째 날인 오늘(1월 2일), 2011년도 탁상달력을 꺼내 책상 한 구석에 놓았다.

  그러고보면 전에는 해가 바뀌는 시점(즉 12월 31일 자정)에 맞춰, 무슨 장엄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비장한(?) 마음으로 헌 달력을 치우고 그 자리에 새 달력을 놓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해 둘째날이 다 저물어가는 때에야 달력을 바꾸다니,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낭만의 감성이 세월따라 저 멀리 떠나려고 하나 보다. ㅠ.ㅠ

 

 

  내가 달력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굳이 책상 위에 탁상달력을 올리진 않았지만, 대신 해가 바뀔 때가 되면 대형서점에 가서 잔뜩 쌓인 온갖 다이어리를 살펴보고 한 개를 고르곤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다이어리란, 예쁘장하게 생긴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매일 벌어진 온갖 자잘한 일과 앞으로의 계획이나 약속을 적어놓기 때문에, 안에 달력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게 디자인 되어 있고 달력의 날짜 부분에 뭔가를 쓸 공간도 넉넉해야 했다. 

  별의별 것을 다 써놓았기 때문에, 가까운 친구들은 무슨 일이 언제 생겼었나 기억이 안 나면 나에게 물었다.  그 일이 나와 상관있는 일이기만 하면, 틀림없이 내 다이어리의 달력 부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장난으로 내 다이어리를 '네 지식의 보고'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매일의 기록과 '지식'은 별 상관없는 얘기인 듯 한데? ^^;;)

 

 

  그러다가 다이어리 쓰는 게 시들해진 재작년(2009년)부터는 탁상달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도 탁상달력이 있긴 있었지만, 보험회사의 이름과 로고 찍힌 달력 따위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음...!)

  시청률이 거지 같았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푹 빠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사실 드라마 전개되는 꼴을 보면 시청률이 그 모양인게 당연했음. -.-;;)  비록 중반부터 드라마 캐릭터들이 제멋대로 변신(!) 했고 내용은 전혀 개연성 없이 안드로메다로 치닫다가 결국 욕나오는 수준의 결말을 보인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초반까지는 꽤 잘 만든 드라마였다.  내용 전개도 괜찮았고, 캐릭터들도 정신줄 제대로 잡고 있었고, 동양화라는 독특한 소재도 제대로 살렸었고... 

  그래서 팬들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드라마 달력 공동구매에 참가하여 탁상달력을 하나 장만했다.  처음으로 돈(그것도 5000원씩이나...!) 주고 달력을 사서는, '알리안츠 생명' 에서 나온 달력 대신 자리 잡고 앉은 새 달력 보고 뭐냐고 물어보시는 엄마한테 '음... HJ(대딩시절 친구)가 방송국에서 하는 무슨 이벤트 응모해서 당첨됐대.  나 중국 간다고 선물로 줬어.' 라고 둘러댔다. ^^;;  그 사연 듣고 막 웃던 고딩 시절 친구 YK에게 '어쩔 수 없잖아.  무슨 달력을 5000원이나 주고 사냐고 뭐라 하실텐데~'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 왈 '5000원이 문제가 아니지. 엄마들은 달력을 돈 주고 산다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하시겠지~~' 라고 했다.  음... 사실 그 친구 말이 맞긴 맞다.  우리 엄마에게 달력이란 물건의 정의는 '날짜와 요일을 알기 위한 일종의 책자로서, 보험회사나 새마을금고 같은 곳에서 연말에 무료로 나눠주는 물건' 이니까... ^^

 

 

  그리고 작년(2010년을 작년이라 표현하는 게 아직은 어색함. ^^)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기념 달력을 썼다.

  아직 하얼빈에 머물던 2009년 12월에 '내년에는 또 무슨 달력 쓰나?' 하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노 전 대통령의 사진과 어록이 실린 달력을 판매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이 그 해 세상을 떴고 달력도 한정수량인 탓에 겨우 하루 만에 동이나 버렸다는 사실... -.-;;  덕분에 이게 분명 책이 아닌 달력일 뿐인데,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기까지 하고...

  달력 못 구한 사람들의 성화에 급하게 2차 제작 들어가면서 예약을 받는다 해서, 귀국해서 쓸 생각으로 하얼빈에서 예약주문을 했다.  당시만 해도 그 다음달인 1월에 완전 귀국 예정이었는데, 2월에 하얼빈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그 달력도 하얼빈까지 들고 갔다. ^^ 

 

 

  그런데 이번 2011년 한 해 동안 쓰게 된 탁상달력은 신한생명에서 나온 무료 달력... ㅠ.ㅠ

  사실은 새해에도 특별한 주제가 있는 달력을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 들어가봐도 마땅한 게 눈에 안 띄던 차에(어마어마한 인기를 끈 무한도전 달력은, 내가 무한도전을 안 보는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라서 패스~~), 엄마가 무료로 얻어오신 신한생명 달력 하나 주셔서 얼떨결에 쓰게 되었다.  

  개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저 달력이랑 1년 살아갈 생각하니, 어째 좀...  어쩌면 이번에 책상 위의 달력을 바꾸는 게 좀 늦었던 건, 새 달력이 특별한 달력이 아니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

 

 

 

PS.

  이 포스트 쓰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서점에 다시 들어가봤더니, 2011년도판 노무현 달력도 판다. -.-;;  이게 뭥미~~~ 좀 일찍 판매하면 안 되는 거니...  나 이미 달력 새로 바꿨다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