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하얼빈에 갈 때는 기대와 걱정이 뒤범벅된 복잡한 기분이었는데, 오늘(2월 20일) 하얼빈으로 출발할 때에는 이미 1년 살다왔다고 다소 시큰둥한 기분이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서울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의 마트에 라면 사러 가는 기분 정도? ^^
하지만 나의 하얼빈 생활이 그냥 평범할리 없는 법...! 파란만장 하다고 말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몇 일들이 있었다.
1. 내가 원하는 기숙사방을 배정받지 못 했다. ㅠ.ㅠ
내가 기숙사에 들어서자, 기숙사 프론트 데스크의 매니저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맞아주었다.
매니저는 4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인데, 얼굴 표정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깐깐한 편이라 기숙사 직원들과 유학생들이 이 매니저를 대하는 걸 어려워한다. 하지만 첫 학기 때 나와 친하게 지냈던 B는 특이하게 이 매니저와 친하게 지냈고, 덕분에 이 매니저는 B와 함께 다니던 나한테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매니저에게 높은 층(9층과 10층)의 방을 달라 부탁했더니, 그쪽 방은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줄 수 없다면서 6층의 방을 배정해주었다.
9층과 10층 방은 욕조가 있어서 욕조 없는 다른 층 방보다 좀 비싸다. 내가 무슨 거품목욕 같은 걸 즐기는 고급스런 사람이 아닌데도 굳이 9층이나 10층을 원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다른 층 방보다 좀 비싸기 때문에 그 층에는 사는 사람 숫자가 적다. 그러면 층별로 물탱크를 놓고 하루 쓸 수 있는 물의 양을 제한하는 기숙사 특성상, 툭하면 물이 끊기는 다른 층보다 불편을 덜 겪는다. 둘째는 욕조 있는 방의 샤워기는 움직이는 샤워기(우리나라 일반 가정의 샤워기처럼 코브라 모양으로 생겨 움직이는 샤워기)라 씻을 때 편한데, 욕조 없는 방은 샤워기가 벽에 고정되어 있어 불편하다.
그런데 결국 욕조 없는 6층을 배정받았으니, 그냥 물통 하나 사서 수시로 벌어지는 단수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나 보다. ㅠ.ㅠ 또 단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샤워기를 쓰느니 물통에 물 받아놓고 바가지로 떠서 쓰는 게 편리할 듯 하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예술학원(음대, 미대 등이 소속된 단과대) 맞은편의 방을 달라'고 부탁한 것은, 매니저가 들어줬다는 점이다.
예술학원 맞은편 방을 원한 이유도 역시 두 가지이다. 첫째, 먼저번 기숙사 생활할 때도 예술학원의 동그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살았는데(☞'출국, 하얼빈 생활의 시작(http://blog.daum.net/jha7791/15790480)' 참조), 경치가 좋다. 나중에 그 반대편 방에 가보니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너무 달랐다. 중국학생 기숙사와 학교 밖 도로 밖에 안 보였다. -.-;; 어차피 똑같은 돈 내고 사는 거면, 이왕이면 멋진 광경 보며 사는 게 좋지 않나...^^ 둘째, 예술학원 맞은편이 남서향이라 새벽잠 자기가 편하다. 반대편은 남동향이라, 위도가 높은 하얼빈에서는 해가 너무 일찍 떠서 새벽잠 설치기 딱이다. 5월만 되어도 한국에 비해 해가 일찍 뜨는 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7월에는 새벽 3시부터 슬슬 밝아져서 3시 반이면 환해질 정도니 말 다 했다. -.-;; 그렇다고 햇살 막으려고 두꺼운 커텐 치고 자면, 아침에도 깜깜하니 몸이 그 시각을 밤으로 인식해서 일어나야 할 때에 못 일어난다. (그렇게 늦잠 자서 지각하는 사람 또는 아예 결석하는 사람 여러명 봤음. -.-;;)
내가 예술학원 맞은편이 경치 좋으니 그 방 달라 했더니, 매니저가 웃었다. ^^
이번에 배정받은 방에서 내려다 본 예술학원 광장.
확실히 9층에서 내려다 본 광경보다는 덜 멋있는데, 그래도 나름 운치 있다. ^^
2. 돌아온 첫날 저녁식사를 나 홀로 빵 뜯어 먹는 걸로 때웠다. ㅠ.ㅠ
원래 빵이나 분식으로 밥을 대신하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돌아온 첫날인데 근사한 식사까지는 아니어도 학생식당 밥 정도는 먹고 싶었다. 그러나... ㅠ.ㅠ
짐을 잘 챙긴다고 챙겨왔건만 짐 풀어 정리하며 보니 칫솔을 서울에 두고 왔고, 기숙사 방에서 쓸 화장지도 필요해서, 첫 학기 기숙사에서 살 때 자주 간 C취의 슈퍼마켓을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설날을 우리보다 더 길고 요란하게 쉬는 중국이라는 걸 깜빡했다. 학교 안의 슈퍼마켓이란 슈퍼마켓은 죄다 문을 닫았다. 슈퍼마켓 찾으며 보니 C취 학생식당 역시 24일까지 쉰다고 공고 붙여놓았다. 그러니 어쩌겠나... 추운 날씨에 왕복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중양홍에 가서 칫솔, 화장지, 빵, 우유, 물 등을 사왔다. ㅠ.ㅠ
내일은 A취와 B취의 학생식당에 가봐야겠다. 설마 학교 안의 모든 학생식당이 다 문닫은 것은 아니겠지...
3. 중양홍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사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든 느낌이 정말 묘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아니라 '텅빈 세상에서 나 홀로 살아남다'는 느낌이었다. -.-;;
겨울방학인데다가 설연휴까지 겹쳐서 학교가 텅 비다시피 한 통에 그 많은 학교 건물이 불이 다 꺼져 있었다. 게다가 사람이 없어 전기를 아끼려 그랬는지, 평소에는 9시 넘어서까지는 켜놓는 가로등마저 전부 꺼놨다. 덕분에 돌아올 때는 인적도 없는 캄캄한 넓은 학교 교정을 혼자 가로질러야 했다. 무섭다기 보다는 정말 적막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중양홍에서 물건 사는 사이, 핵폭탄이라도 터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 남은 기분이었다. -.-;;
그리고 이번에 서울에 갔을 때 뭔가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데도 어째서인지 몰랐는데, 오늘 캄캄한 교정을 혼자 가로지르며 그 이유를 알았다.
큰 건물들이 서로 어느 정도 공간 두고 있는 흑룡강대학에서 지내다가, 건물들이 너무 밀집해있는 서울에 가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똑같이 30분을 걸어도 서울에서는 더 많이 걸은 느낌이다.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통에, 같은 거리를 걸어도 더 많은 건물들을 보게 되어 그리 느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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