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생활기/'09~'10년 흑룡강대학 어학연수기

모든 중양홍 직원을 사랑하리라...!

Lesley 2009. 7. 30. 00:56

 


  지난 7월 28일은 하얼빈에 온 뒤로 가장 엄청난 날이었다.
  언제나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한 하얼빈 생활이지만, 이 날 벌어진 일은 정말로 '큰 일'이었다.

 

 

 

  나중에 따로 카테고리 만들어 새로운 포스트 올릴 때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어찌어찌 하여 이번 방학에 갑작스레 쓰촨성을 여행하게 되었다.

  문제는 쓰촨성, 그 중에서도 내가 쓰촨성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삼을 청두가 위치한 곳이 분지지형이라, 우리나라 대구만큼이나 사람 숨 턱턱 막히게 하는 고온다습한 동네라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더위 많이 타는 나다.  그러니 한국보다 한참 남쪽인 그 곳에 가기 위해, 일단 반바지부터 사기로 했다. 하얼빈이야 기온은 높아도 건조한 지역이라 햇볕만 피하면 견딜만하니 긴바지 입고도 잘 버텼지만, 기분 나쁘게 끈적끈적한 날씨에 긴바지 입는 것은 곤란하니까...

  지난 주에 하얼빈을 떠난 B가 학교 근처에 있는 중양홍(中央紅 : 중앙홍, 흑룡강대학 정문 옆에 있는 마트)에서 비교적 저렴하면서 질도 괜찮은 반바지를 구입한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도 귀찮게 멀리 갈 것 없이 거기에서 사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즉 중양홍에서 반바지를 구입하는데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중양홍 안에 있는 옷가게에서 옷을 고를 때 손에 지갑을 들고 있었는데, 옷을 뒤적이면서 무심코 지갑을 매대 위에 두었던 모양이다. 

  계속 이 옷 저 옷 살펴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갑은 이미 온데 간데 없고... ㅠ.ㅠ  내가 옷에 정신 팔린 사이에 누군가 훔쳐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정말 머리속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막 은행에서 인출한 현금이 400위안(한화 약 80,000원) 넘게 들어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 주민등록증과 국제체크카드, 중국은행 현금카드가 들어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외국에서, 더구나 위조 관련 범죄가 유난히 기승부리는 중국에서 신분증과 카드를 분실했으니...
  당황해서 서둘러 중양홍의 보안직원에게 가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 했더니, 프론트 데스크에 가보라고 했다.

 

  프론트 데스크로 뛰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리속에서는 전에 TV에서 했던 재연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의 시나리오 소재로 쓰면 딱일 것 같은 상황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어떤 나쁜 인간이 내 주민등록증으로 한국의 내 은행 계좌의 돈을 몽땅 인출하는 상황...  누군가 나를 사칭하여 어마어마한 사기를 치는 통에 나한테 수배령이 내려지는 상황...  밀입국조직의 일당이 내 주민등록증으로 여권 분실했다고 영사관에 신고하여 나 대신 새 여권 발급받는 통에, 나는 국제미아가 되어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는 상황...  이미 쓴 저런 상황들로 인해 내가 국제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떤 나라를 가든지 그 나라 출입국관리직원에게 붙들려 범죄자 취급 받는 상황... ㅠ.ㅠ

 

 

 

  프론트 데스크로 갔더니 어떤 아줌마 직원이 내 얘기를 듣고는 일단 나를 진정시켰다.
  이 아줌마한테 '부야오 쟈오지(不要焦急 : 조급해하지 말아라, 초조해하지 말아라)'란 말을 20번은 넘게 듣지 않았나 싶다. 하긴 내가 내 얼굴을 못 봐서 그렇지, 아마도 하얗게 질린 상태였을 거다. 계속 죄없는 머리카락만 손으로 거칠게 흐트리면서 '맙소사... 세상에...'라는 한국어를 반복하는 나에게, 그 아줌마가 지갑의 색깔과 모양을 묻더니 다시 지갑 안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물었다.  내가 '돈이 문제가 아니다. 돈은 못 찾아도 상관없다. 다만 내 신분증과 카드는 잃어버리면 안 된다.'라고 얘기하자, 아줌마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하며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실 일반 중국인들은 외국인을 대할 때, 친절하고 불친절하고를 떠나서 말을 굉장히 빨리 하는 습관이 있다.

  상대방의 중국어 실력이 높든 낮든 간에 중국인들끼리 얘기하는 속도로 말을 해서, 외국인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런 사건사고가 생기면, 외국인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외국인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거나 말거나, '그러기에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했어야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식의 훈계조로 말하는 버릇이 있는 듯 하다. (적어도 내가 이전에 여행 중에 만난 중국인 중에는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음.)

 

  그런데 이 아줌마는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침착하게 달래가며, 자신의 중국어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내가 알아듣기 쉽게 또박또박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알려줬다. 
  일단 사건경위서 비슷한 것을 작성하게 했는데, 머리가 멍해진 상태라 잃어버린 물품란에 써야 하는 '지갑'이란 말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0-;;  지갑은 입문반 시절에 배운 왕초보 단어인데도 전혀 생각이 안 날 지경이었으니, 내 정신줄이 내 머리 밖으로 완전히 뛰쳐나가버린 상태인 게 분명했다. ㅠ.ㅠ  볼펜을 종이에 댄 채 송아지마냥 눈만 껌뻑이고 있는 나를 보다 못 한 아줌마가 대신 지갑이라고 써주더니, 그 밖의 다른 사항에 대해 나에게 묻고는 내 이름 빼고는 몽땅 나 대신 써줬다.
  그 다음에는 가장 가까운 파출소의 위치를 알려주며 가서 신고하라 하고, 또 중국현금카드도 지갑 안에 들어있었다니 중국은행 가서 직원에게 분실신고하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여전히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중양홍을 나오다가, 기대는 털끝만큼도 안 했지만, 그저 혹시나 하여 아까 지갑을 잃어버린 그 옷가게로 갔다.

   그 곳 직원에게 '지갑 하나 봤냐, 내가 여기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라고 했더니, 그 직원이 '혹시 체크무늬 지갑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다...!! (헉...! @.@)  내가 흥분해서 맞다고 했더니, 조금 전에 프론트 데스크에 가져다 줬다고 했다.

 

  정말 눈썹 휘날릴 정도로 뛰어 갔더니, 아까 그 아줌마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들어보이는데, 그 손에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잃어버린 그 지갑이었다...! (아이고~~~~ 지갑아, 너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니... 내가 얼마나 애타게 너를 찾았다고... ㅠ.ㅠ)

  아줌마가 지갑 안에 있는 것들을 확인하라고 넘겨주는데, 살펴보니 신분증이나 카드는 물론이고 현금까지 고스란히 그대로 있었다...! (오~~ 감동... ㅠ.ㅠ )  아줌마가 아까 쓴 사건경위서에 물건 찾았다는 말을 쓰고 서명을 하라고 해서 시키는대로 하고 있는데, 아까 옷가게에서 만난 직원이 와서 그 지갑이 내 지갑 맞는지 물었다.  그 직원의 말인즉슨, 옷더미 속에서 내 지갑을 찾았다 했다. (뭥미~~ 누가 훔쳐간 게 아니라, 내가 이 옷 저 옷 뒤지면서 그 속에 파묻힌 거였어? -.-;;)  나는 그  직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며 허리 숙여 인사하고...

 

  아줌마가 '지갑 잃어버린 사람들은 대부분 못 찾거나, 찾아도 돈은 못 찾고 지갑만 찾게 되는데, 너는 정말로 운이 좋다.'면서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며 나오는데, 좀 웃긴 소리지만 정말로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BGM으로 What a Wonderful World가 흘러나오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ㅠ.ㅠ )  평소에 중양홍의 옷가게 직원들이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있고, 손님들이 뭘 물어봐도 대충 대답하는 것 보면서 좀 한심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사건을 겪고나니 중양홍 직원들이 갑자기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중양홍의 모든 직원들을 격...! 하...! 게...!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