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생활기/'09~'10년 흑룡강대학 어학연수기

얼떨결에 들은 마르크스 철학 수업

Lesley 2009. 4. 27. 02:54

 

 

  여기 흑룡강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있어서, 한국어과 다니는 중국 학생들이 한국인 유학생들과 후쉐(후샹쉐시(互相學習)의 줄임말인데, 서로 다른 언어 쓰는 사람들끼리 상대방에게 자기 언어를 가르쳐주고 상대방 언어를 배우는 방법으로, 서로의 학습에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함.)를 하며 서로의 공부에도 도움을 주고 우정도 쌓는다.

 

  

  여기에서 친하게 지내는 무리 중 한 사람인 S가 지난 화요일에 한국어과 2학년 학생인 '환'과 처음으로 후쉐를 하게 되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려 전화통화를 하던 중 환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한다.  자신이 듣는 수업에 함께 가자는 것이다.  S의 말인즉슨, 그 수업이 한국어과 학생들이 듣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한국철학 수업이라는 것이다. (자, 여기에서 'S의 말인즉슨'이라는 부분을 유념하시기를....!) 

  그 말 듣고 호기심이 동해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흑룡강대 한국어과 학생들의 한국어 수준은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직 2학년 학생들인데, 한국어로 진행되는 한국철학 수업까지 듣는다니 도대체 어느 수준의 수업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수업 참가해서 한국어과 학생들과 친분 좀 쌓자는 욕심도 있었고...

 

  약속시간이 다가오는데 공교롭게도 S가 감기가 심해져서 그 수업 갈 수 없다고 해서, 결국 나 혼자서 환이라는 중국 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환은 자신과 같은 반 친구라는 남학생과 함께 약속시간 맞춰 유학생 기숙사 1층 로비로 왔다.  서로 간단히 인사 나누고 서둘러 강의실로 가면서 얘기를 나눴다.  역시나 흑룡강대학 한국어과 학생들은 죄다 능력자들이라서, 내가 조금 느리게만 말하면 한국어로 대화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나 : 그런데 이렇게 외부인이 수업 들어가도 돼요?
  환 : 괜찮아요.
  나 : 교수님한테 허락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환 : 정말 괜찮아요. 지난 번에 페이조우(非洲 : '아프리카'를 말함)에서 온 얼굴 검은 외국인(즉, 흑인)이 왔는데도 교수님이 모르셨어요.
  나 : (으잉? @.@ ) 페이조우 사람은 중국인하고 다르게 생겼잖아요. 어떻게 몰라요?
  환 : 사람이 아주 많아서, 교수님이 몰라요.
  나 : 수업 듣는 사람이 몇 명인데요? (설마 한국어과 학생이 한 학년에 수백명 정도 된다는 말인가? -.-;;)
  환 : 한국어과, 아랍어과, 일본어과... 아주 많아요.
  나 : (어라, 한국철학 수업에 웬 아랍어과와 일본어과...? 이거 뭔가 이상하다... -.-;;) 이거 한국어과 수업 아니에요? 한국철학 수업 아니에요?
  환 :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한국철학 아니에요. 마커스(馬克思)철학이에요.
  나 : 마커스철학이요? 마커스가 뭐에요? 어, 마커스, 마커스면... 마르크스요? 공산주의 만든 그 마르크스 말하는 거에요? (허걱...! -0-;;)
  환 : 네, 맞아요.
  나 : 아, 네... (ㅠㅠㅠㅠ) 

        저기요... S가 이거 한국철학 수업이라고 했어요. 한국어로 하는 수업이라고...

  환 : 아니에요, 마커스철학이에요. 그리고 중국어 수업이에요.

  나 : 아, 네... ^^;;  (이봐요, S...! 이거 한국어로 진행되는 한국철학 수업이라면서...!!  >_< )

 

 

 

  그렇게 얼떨결에 강의실 들어가서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기독교 재단 소속 대학들이 모든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채플 수업 듣게 하는 것처럼, 중국의 대학에서는 모든 학생이 마르크스철학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부분 채플 수업에 집중 안 하는 것처럼(채플 수업 있는 대학 다닌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제대로 수업 듣는 애들은 극소수고 대부분 딴 짓 한다고... ㅋㅋㅋ), 여기도 다들 다른 짓 하느라 바빠보였다.  전공 과목도 아니고, 자신이 골라서 듣는 교양 과목도 아니고, 그저 반강제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니 흥미가 있을 리가 없다.  교탁 바로 앞자리에 앉은 소수의 모범생들 빼놓고는, 다들 교수님이 혼자 떠들거나 말거나 다른 짓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옆자리 친구랑 떠드는 애, 누군가에게 부지런히 핸드폰으로 문자 보내는 애, 다른 책 가져와서 공부하는 애,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애, 그냥 멍하니 있는 애... (불쌍한 교수님... ㅋㅋㅋ)
 

  환은 처음에는 내 중국어 교재를 여기저기 살펴보며 신기해하더니, 갑자기 나에게 '흥부전'을 얘기해달라고 하고... ^^  이미 전에 한국인 친구에게 흥부전 내용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다 잊었다면서 다시 얘기해달란다. 

  나는 환에게 흥부전 얘기해주랴, B에게 황당하게 마르크스철학 수업 듣게 된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문자 보내랴(좀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황에 들뜨고 흥분했던 모양이다. 2번이나 엉뚱한 사람에게 문자 보내고 3번째에야 겨우 B에게 보냈다... ^^;;), 어차피 못 알아듣는 수업이니 내 숙제 하랴, 딴 짓 하는 중국 학생들 구경하랴...  나름 바쁘게 1시간 반을 보냈고... ^^

 

  마침내 수업이 끝나 책가방 챙기면서 환과 얘기를 했다.
 
  나 : 그런데 교수님이 좀 불쌍해요. 학생들이 아무도 수업을 안 듣잖아요.
  환 : 괜찮아요, 그는 이미 익숙해졌어요. (흑룡강대 한국어과 학생들을 보면, 아무리 한국어를 잘 한다 해도 결국은 외국인이어서, 한국인들은 잘 안 쓰는 '그' 또는 '그들'이라는 대명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혼자 수업해도 외롭지 않고 즐거울 거에요. (아놔~~~~ 이 부분에서 빵 터져 버렸다... ㅋㅋㅋ)

 

 
  비록 원해서 들은 수업이 아니었고, 또 중국어 실력이 일천해서 알아듣지도 못 한 수업이었지만, 그래도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개혁개방정책으로 사회 각 방면에서(특히 경제 부문에서) 사회주의식 제도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중국이 앞에다 내건 간판은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했다.  

   또한 한국 대학생들에 비해 훨씬 많은 학업량을 소화해야 하고 토요일, 일요일까지도 온갖 수업을 들어야 해서, 항상 바쁜 중국 학생들도 결국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수업 시간에 딴 짓 한다는 것을 알게도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