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생활기/'09~'10년 흑룡강대학 어학연수기

하얼빈의 능력자 할머니들

Lesley 2009. 4. 8. 17:59

 

 

  중국에서 뵙게 된, 비록 연세는 많으시지만 능력은 넘쳐나시는 할머니들에 대해 쓸까 합니다.

 


  1. 태극권 수업과 할머니 선생님들

 

  흑룡강대학 언어연수 과정에는 비정규과목으로 태극권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비정규과목이라 최대 이수학점과 상관없이 수강 가능함)

  원래 저는 태극권 수업은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올 때 흑룡강대학에 중국전통음악 수업도 있다기에 얼후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태극권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중국전통음악 과목은 개설되지 않음. ㅠ.ㅠ)

 

  그런데 3월 25일에 있었던 첫 태극권 수업 때, S와 함께 태극권 수업 장소(A취 기숙사 1층 로비에서 수업함.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어 좀 어수선한 분위기임.)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수강생 중 B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처음 하는 사람들이라 자세가 안 잡혀 어색하게 흐느적 거리고 있었는데, B는 그 중에서도 유독 심하게 흐느적 대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적극적인 B는 가장 못 하면서도 가장 열심히 하고 있었음. ^^)  우리는 너무 웃겨서 킬킬 대며 옆에서 구경했는데, 태극권을 가르치시는 두 할머니 선생님 중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태극권에 관심 있냐?'고 물으시더군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당장 명부를 내미시며 우리 이름, 국적, 전화번호를 적으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길거리 캐스팅...이 아닌 길거리 수강신청으로, 태극권 수업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이 날은 첫 날이기도 하고 우리가 수업 다 끝나갈 무렵에 등록한 통에, 태극권을 가볍게 맛보는 수준으로만 수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4월 4일)에 두번째 수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태극권 수련에 들어갔는데...
  먼저번 수업 때는 저를 포함해서 겨우 6, 7명 밖에 안 되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건지 갑자기 한국인 학생들이 떼로 몰려와 20명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 보아하니 태극권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인지 할 수 없이 수강한 것 같음.  관심이 없다 보니 집중을 안 하고 산만하게 구는 편들인데, 특히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설명하실 때나 시범 보이실 때 어찌나 떠드는지 짜증스러울 정도였음.  제발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임. ㅠ.ㅠ)


  그 많은 인원들이 흐느적 대며 선생님들의 동작을 따라하는데...
  역시 세상일이라는 것이 옆에서 지켜볼 때와 직접 할 때가 완전히 다른 법입니다.  선생님들의 시범을 지켜볼 때는 아주 느린 동작이라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고, '태극권 동작이 저렇게 느리니 할머니 선생님들이 하시기에도 그다지 힘들지 않겠군'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따라하려고 들면 도무지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계속 몸의 힘을 빼라고 하시는데, 자세가 제대로 안 나오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어깨와 다리에 힘을 주게 됩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달랑 두 동작을 배웠건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니...  ㅠ.ㅠ
 
  그리고 먼저번에는 우리가 TV에서 흔히 보는 느릿느릿한 태극권만 선보이셨는데, 이번에는 다른 두 종류의 태극권을 더 시범 보이셨습니다.
  오, 두 할머니 선생님, 알고보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림고수셨나 봅니다...! @.@  부채를 폈다 모아 쥐었다 하시며 빠른 동작의 태극권을 선보이시는데, 우리는 놀라서 입만 헤 벌리고 쳐다보고...  부채를 펼칠 때마다 크게 나는 '쫙~~'하는 소리와 두 선생님의 절도 있으면서 속도감 있는 동작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했습니다. 

 

  시범 보이시기 전에 그 다른 종류의 태극권의 유래를 설명하시는데, '청나라 건륭황제 시대'라는 말 이외에는 죄다 팅부동(못 알아듣는다)한 상황... ㅠ.ㅠ

  마침 공교롭게도 제가 선생님과 마주보는 자리에 서있었고, 어떻게든 하나라도 알아듣겠다고 선생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더니만, 저에게 눈을 맞추고 열심히 설명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저한테 뭐라고 질문을 하시는데...  제가 당황해하자 그제서야 제가 당신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 채시고는 '이워칸 니 팅부동(보아하니, 너 알아듣지 못 하는구나)'라고 하시며 웃으시더군요. (아, 민망해라~~~ ^^;; )

 

 

 

  2. 영어와 할머니 전직 교수님

 

  위에서 쓴 태극권 수업이 끝나고서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B와 함께 태극권 수업의 반장(일본인 유학생인데 일본에서 중국 무술을 10년, 그 중 태극권을 5년간 수련했다는 고수임. 다른 학생들과 자세와 눈빛부터 다름.)에게 언제 어디로 가야 태극권을 연습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반장이 말하기를, 날씨가 따뜻한 때는 학교 운동장 근처에서 태극권 수련하는 중국인들이 있는다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추워서 요즘도 태극권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반장 이야기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고...
 
  어찌되었건 시도나 해보자 하는 무대뽀 정신으로, 다음날인 일요일에 태극권 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섰습니다.

  태극권 수업 등록한 나, B, S는 물론이고, 등록하지 않은 J까지 청일점으로 끼여서, 휴일임에도 6시 15분에 기숙사 로비에 집합하는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
  학생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7시 조금 넘어 운동장 근처에서 무작정 태극권 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는데...  휴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운동장에서 온갖 종류의 운동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니, 역시 태극권 선생님들과 반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날씨가 추워 태극권 하는 사람들이 있나 모르겠다고...

 

  이왕 나온 거 태극권 하는 사람들 못 찾아도 산책 삼아 한 바퀴 돌자며 좀 걷다보니, 어떤 자그마한 할머니가 혼자서 태극권을 하고 계시더군요.
  모두들 '저기 태극권이다, 태극권 하는 사람이다'하며 흥분해서 몰려갔습니다. ^^;;  하지마 막상 할머니 근처에 도착하고 보니,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태극권 수련 중이신데 끼여들어 질문 드리기가 좀 어색해서, 그저 멀뚱히 지켜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져 죽어도 적극성과 친화력만은 물 위에 둥둥 뜰 B가 할머니 곁으로 가더니, 대뜸 할머니의 동작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  우리는 '허락 없이 저래도 되나?', '좀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하며 걱정했는데, 우리가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혼자서 꿋꿋이 할머니 동작을 따라하던 B...! ^^  결국 할머니께 뭐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시고... (정말이지, B의 친화력은 거의 농촌부녀회장 수준임. ^^)


  할머니가 B와 대화 주고받느라 태극권 멈추시자, 우리도 할머니 곁으로 가서 대화에 끼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말씀하셨는데 중간 중간에 영어 단어가 섞이기에 B가 영어 할 줄 아시냐고 여쭈었더니만, "Yes, but a litte."이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젊은이라면 모를까 그 연세의 분이 영어를 하시자, 우리는 모두 "오오오~~~"하고 감탄하고... ^^  그 뒤로는 계속 영어로 말씀하시는데, 속도는 다소 느린 편이지만 더듬거리는 일 없이 어찌나 또박또박 말씀하시는지...
  지금 78세란 말씀에 우리는 또 다시 "오오오~~~"를 부르짖었습니다. ^^  굉장히 정정하고 깨끗하게 늙으셨기에 60대 중반 정도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은퇴했지만 전에 하얼빈공업대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기에, 우리 입에서는 또 다시 "오오오~~~"하는 합창이 튀어나오고... (이 날 할머니와의 대화 중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이 "오오오~~~"인 듯...^^)
  할머니는 우리에게 얼마나 중국에 머물 것인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전공이 무엇인지, 어째서 중국어를 배우려 하는지, 예의 그 느릿하면서도 또박또박한 영어로 물어보시더니, "너희 젊은이들은 정말 에너지가 넘쳐나는구나"하며 청춘예찬을 하시고... ^^


  "I have to go now."란 말을 남기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깨끗하게 늙었으면 좋겠다고 재잘거렸습니다. ^^

  물론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이 나라 중국, 아니 중국은 고사하고 이 하얼빈이란 도시의 900만 인구 중 몇 사람이나 만나봤겠느냐만은...  그래도 우리가 뵌 몇몇 중국 노인분들을 보니, 참 활기차고 멋있게 사시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습니다.  휴일 이른 아침 학교 근처에 나가보면, 부채춤이나 사교댄스를 추며 인생의 황혼기를 보람차게 보내시는 노인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뒤떨어지지만 마음은 더 여유롭다는 느낌입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너무 시간에 쫓기듯 사는 것 같습니다. ^^;;)

 

 


  PS.

  평소 운동 안 하던 굳은 몸으로 토요일에 너무 열심히 태극권 했나 봅니다. 
  요즘 갑자기 기온이 오르면서 그렇잖아도 건조한 하얼빈 공기에 먼지가 잔뜩 끼여, 목이 칼칼하다 했습니다.  그런데다가 태극권을 했더니 태극권 한 토요일부터 계속 몸 여기저기 뻐근하더니만, 결국 화요일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고... ㅠ.ㅠ 
  어제 저녁도 안 먹고 5시 반에 두어시간 눈 붙인다고 침대에 누웠는데, 한 번도 안 깨고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눈 떠보니 아침 5시 반... ㅠ.ㅠ  어떻게 12시간 동안 한 번도 안 깨고 스트레이트로 잘 수 있단 말인가...!  밤에 열공하리라 마음 먹었던 건 다 날라가버려 허무했고, 그 전날 못 한 숙제 하느라 5시 반에 세수도 안 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진땀 뻘뻘 흘렸습니다.

  그래도 12시간이나 자고 나니 몸은 어찌나 개운하던지, 감기가 싹 달아난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