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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래향(夜來香) : 이향란(李香蘭)/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Lesley 2012. 1. 4. 00:12

 

일제시대 중국, 일본의 톱스타였던 이향란(李香蘭).

 

  이향란(李香蘭 : 리샹란)은 일제시대 중국 및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했던 가수 겸 영화배우다.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큼은 아니어도 조선에서도 이 가수의 노래가 많이 알려졌을 정도로 그 시절 국제적인 스타였다. (다만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중국어판 대신 일본어판 노래로 알려졌던 모양임.) 

 

  이향란이 불러 히트한 노래 중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곡이 있으니 바로 '야래향(夜來香)' 이다.

  이향란이 불러 성공한 노래로는 소주야곡(蘇州夜曲: 소주의 밤),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 님은 언제 다시 오시려나) 등 여러 곡이 있다. ('하일군재래' 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에도 나올 정도임. ^^)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해서 나중에 중국이나 대만의 가수들이 여러 번 리메이크 한 노래가 바로 '야래향(夜來香)' 이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편이다.  먼저 화교 출신의 유명가수 주현미가 이 노래를 불렀고, 몇 년 전에는 영화 '댄서의 순정' 에서 연변에서 온 조선족 처녀역을 맡은 문근영이 영화 속에서 부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 -  이향란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출생지가 중국의 만주 지역이고, 누가 들어도 중국 이름이 틀림없는 이향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주요 활동지가 중국이었고, 저 위에 올린 사진 속에도 보이듯이 중국 전통의상인 치파오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화했고...  이 정도면 누구라도 '이향란은 중국사람이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향란은 일.본.인.이다...!  그것도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일본인이라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이름을 가진 100% 일본인이다. 

  이향란(李香蘭)이라는 중국 이름과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일본 이름이, 두 나라 사이가 최악이던 시절 두 나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이 사람의 인생을 대변하는 듯하다.

 

 

 

 

 

  지금부터 어지간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향란의 일생을 소개하겠다.

 

 

 

일제 시대의 이향란의 모습. (보라~ 저 치파오 입은 모습을 보고 누가 중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는가!) 

 

  본명이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인 이향란은 1920년에 중국 만주의 일본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향란이 태어나던 시기에 만주에는 이미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군사적 침략을 위한 일본군은 물론이고, 경제적 침략을 위한 일본의 각종 국유기업도 만주에 진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만주 점령을 위해 '만주는 왕도낙토(王道樂土 : 왕도로 다스리는 즐겁고 평화로운 땅)다.' 라고 열심히 선전하며 일본인들이 만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고 있었다.

  이향란의 아버지는 과거에 중국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어서 중국어나 중국의 역사 및 문화에 정통했다.  그런 아버지가 일본에 불어닥친 만주 바람을 타고 만주로 건너가서, 남만주 철도국에서 일본인 직원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인 이향란이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중국인 만큼이나 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된 것이다.

 

  13살 되던 해, 이향란은 아버지의 친구이며 심양은행 총재를 지낸 중국인 이제춘(李际春 : 리제춘)의 수양딸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부모끼리 친한 사이인 경우, 한 사람의 아이를 다른 사람의 수양아들 또는 수양딸로 삼아 친분을 돈독히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단, 법적으로 부모가 바뀌는 것은 아님.  천주교의 대부.대모-대자.대녀 관계처럼 정신적, 도의적인 부모-자식이 되어 서로를 챙겨주고 이끌어주는 것임.)  이 때 수양아버지 이제춘의 성을 딴 이향란(李香蘭)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 이향란이라는 이름을 예명 삼아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원래는 폐병을 앓아 나빠진 심폐기능을 건강하게 할 목적으로 성악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차츰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게 드러나면서, 라디오 방송국 사람 눈에 띄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성장하면서 연예인으로서의 가치가 점점 더 높아졌다.  타고난 이국적인 미모에, 훌륭한 노래 솜씨에...  또한 중국 영토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지였던 만주에서 태어난 덕에, 중국어와 일본어는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고 영어와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음반을 낼 때 여러 언어로 된 노래를 수록할 수 있어서 러시아와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는 영화 출연까지 하게 되면서 겨우 18세에 대스타가 되었다.

 

  다만, 이향란의 성공은 본인의 미모와 재능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덕분이기도 했다.

  이향란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국책영화사 '만주영화협회(만영)'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 만영은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중국인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족협화를 내세우며 영화와 노래를 이용한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일본 군부의 산하기관이었다.

('만주국' 과 '오족협화' 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유전의 왕비, 마지막 황제 - 1 (

http://blog.daum.net/jha7791/15790473

))

  그런 일본 군부와 만영 입장에서는, 일본인이면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해 중국인 수준으로 익숙한 이향란은 아주 좋은 선전도구였다.  그들은 정치선전을 위해서 이향란을 '중국어 잘 하고 중국에 우호적인 일본인' 이 아닌 '일본어 잘 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중국인' 으로 포장했다.

 

  이향란이 노래만 부를 때에는 상황이 좀 나았지만, 영화 출연으로 엄청나게 유명해지자 고국인 일본과 출생국인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인 행세를 하게 된 이향란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 중 상당수는 '중국에 온 일본남자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중국여자' 였다.  심지어 '원래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다가 나중에 일본남자를 사랑한 나머지 일본에 협력하게 되는 중국여자'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 이향란의 인기를 치솟게 한 원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중국 내에서 이향란이 친일파라는 비난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도 되었다.

 

  사실, 원래 일본인인 이향란에게 친일파라고 비난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향란이 중국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동포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아래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일본 고위층과 친분을 나누며 일본 남자 품에서 희희덕거리는 영화나 찍을 수 있는가' 라는 욕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향란 스스로도 사람들을 속이며 중국인인 척 해야 하는 상황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도 겪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라 이향란이 일본인이라는 소문이 간간히 돌기도 했고, 그런 소문이 아예 신문기사로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 이향란은 공식적으로는 중국인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연예인으로서 엄청난 성공을 한 것은 한 것이고, 계속해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향란이 25세 되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하면서 이향란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친일파들을 색출해서 군사법정에 세웠다.  이향란 역시 일본 군부의 비호 아래 친일적인 영화에 출연하고 일본군의 위문 공연을 다닌 일로, 상하이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이향란의 혐의가 그대로 인정될 경우 사형을 당할 판국이었다. (이향란의 유죄가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사형 날짜가 잡혔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음. -.-;;)

 

  이향란은 자신이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라고 밝혔지만, 중국 군사법정에서는 믿지 않았다.

  그들도 이향란이 일본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뒷받침해줄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명 연예인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헛소문, 즉 스캔들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향란의 주장을, 일본에 달라붙어 호의호식하던 매국노가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늘어놓는 거짓말 정도로 여기며 무시했다.

  재판부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만일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유명한 배용준 같은 톱스타가 어느날 갑자기 '사실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예요.' 라고 발표한다면,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간에 누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겠는가!

 

  꼼짝없이 죽게된 이향란을 구해준 사람은, 어린 시절 만주에서 친하게 지내며 이향란에게 성악공부를 권했던 러시아 친구였다.

  원래도 교통 사정이 열악한 시절인데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라 모든 게 혼란한 상황이었는데도, 그 친구는 기꺼이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왕복하며 이향란의 출생증명서를 가져다주었다.  이 출생증명서 덕분에 이향란이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이 되어 1946년에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배가 상하이를 출발하던 때에 배에 울려퍼진 노래가, 공교롭게도 이향란의 히트곡인 야래향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향란의 인생은 그 후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귀국한 후에 일본영화에 출연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어와 영어 실력을 무기로 홍콩영화와 미국영화에까지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다가 어떤 조각가와 결혼을 했지만 몇 년 후 이혼을 하고, 나중에 일본 외교관과 재혼하면서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10년 정도 지난 1974년에, 이번에는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데뷔한다!  그 후 두 차례 더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1992년 정계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과거의 경험을 살려 일본과 중국의 외교 부문에서 활약했다.  정치활동을 하면서 간혹 방송국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에는 북한 김일성의 단독 인터뷰를 성사시킨 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왼쪽 위) 2003년에 방영한 '유전의 왕비, 마지막 황제(流轉の王妃, 最後の皇弟)' 의 아마미 유키(天海祐希).(왼쪽 아래) 2007년 방영한 '이향란(李香蘭)' 의 우에토 아야(上戸彩)가 실제의 이향란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있는 모습.(오른쪽) 이향란의 노년의 모습. (아마도 1990년대 모습인 듯.)

 

  일본의 만주 침략시기에서 이향란을 빼놓을 수 없다 보니,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이향란 역도 등장하게 된다. 

  그 중에서 내가 본 것은 두 편이다.  먼저 2003년에 방영한 드라마 '유전의 왕비, 마지막 황제(流轉の王妃, 最後の皇弟)' 를 보면, 아마미 유키(天海祐希)가 이향란 역을 맡아 일본의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파티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이향란이라는 인물이 우정출연 수준으로 잠시만 모습을 비출 뿐이다.  또 하나는 2007년에 방영한 드라마 '이향란(李香蘭)' 인데, 이향란이 쓴 자서전을 각색해서 드라마로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에토 아야(上戸彩)가 이향란 역을 맡아, 이향란이 중국이름을 받게 되는 13살부터 일본으로 귀국하는 26세까지의 삶을 연기했다.

  이향란은 지금도 생존해있다.  우리나라 기사를 검색해보니, 9개월 전 기사 중에 91세로 아직도 생존해있는 것으로 나왔다.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취급받는 게 어떤 기분일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향란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릴 수 밖에 없다.

  일단 중국에서는, 중국인인 척 하면서 중국인을 기망하고 일본의 침략에 협조한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가 높은 것 같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그런 정치적인 평가보다는 남다른 일생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이 훨씬 높고, 또한 일본이 아시아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호령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한 모양이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이향란에 대한 평가도 한 마디로 딱 잘라 말 할 수 없고 이쪽 저쪽 다 살펴서 종합적으로 내릴 수 밖에 없다.

  중국에서 아무리 이향란을 가증스럽게 본다고 해도, 중국 대중음악사에서 이향란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광수가 친일파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현대 문학사에서 이광수의 이야기를 통째로 들어내버린다면 큰 구멍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임.)  이향란의 노래는 당시에도 중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수십 년이 지난 후 대만의 등려군 등 여러 중국어권 가수를 통해 몇 번이나 리메이크 될 정도로 중국어권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일본에서 아무리 이향란을 격동의 시대에 휘말린 가련한 여인으로 본다고 해도, 이향란이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한 일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절에 어떻게 감히 군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라고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이향란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가면서 연예계에 데뷔하고 군부에 협조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중국인인 척 사람들을 속이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느낀 것이고, 일본 군부의 비호를 받아가며 연예계에서 성공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막 연예계에 데뷔했던 10대 초반에야 뭐를 몰라 그랬다고 치더라도, 성인이 된 후 한 행동에 대해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

 

 

 

※ 이왕 이향란에 대해 쓴 김에, 이향란의 노래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야래향도 올려보겠다.

   참고로, 야래향은 달맞이꽃과 비슷한 꽃인데 밤에 짙은 향기를 뿜어낸다고 한다.  그런 특성 때문에 야래향은 남녀상열지사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단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수십년 간 이 노래가 금지되었던 이유는, 과거의 적국이며 당시의 미수교국인 일본인이 부른 노래라는 점도 있지만, 음란한 내용을 은유한 노래라는 점도 있다.

 

 

 

야래향(夜来香)

 

 

 

那南风吹来清凉, 那夜莺啼声凄怆

남풍은 시원하게 불어오는데, 한밤에 꾀꼬리는 처량하게 우네.


月下的花儿都入梦, 只有那夜来香, 吐露着芬芳

달 아래의 꽃들은 모두 꿈 속에 들었는데, 오직 야래향만이 향기를 뿜어내고 있네.


我爱这夜色茫茫, 也爱这夜莺歌唱

나는 이 밤의 아득함을 사랑하고, 또한 이 밤의 꾀꼬리 노래도 사랑하네.

 

更爱那花一般的梦, 拥抱着夜来香, 吻着夜来香

(그러나) 꿈과 같은 그 꽃을 더욱 사랑하여, 야래향을 끌어안고, 야래향에 입을 맞추네.

 

夜来香, 我为你歌唱
야래향, 나는 그대를 위해 노래하네.

 

夜来香, 我为你思量,

야래향,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네.
 

啊~~ 我为你歌唱, 我为你思量

아~~ 나는 그대를 위해 노래하고, 그대를 그리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