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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발견(4) -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1

Lesley 2008. 8. 23. 23:43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역시 장국영에게 한참 미쳐있을 무렵 비디오방에서 봤던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장국영'과 '임청하'다. 그런데 두 주인공이 다른 영화에서 맡았던 역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의 역은 꽤 특이하다.
  장국영은 주로 '여리고 섬세한 역'('종횡사해'나 '영웅본색' 같은 액션물에서조차 장국영은 터프한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운 남자였음) 또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세상을 등진 역'('아비정전', '동사서독')을 맡았었는데, 백발마녀전에서는 특이하게 '불량기와 반항기가 넘쳐흐르는 터프가이 역'을 맡았다.
  그리고 임청하는 70년대 홍콩과 대만에서 아이돌 스타로 유명했다가 유부남 동료배우와의 스캔들을 겪으며 다소 침체기를 겪던 중, 80년대 중반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알다시피 '동방불패'에서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부활(!)했다. 하지만 동방불패에서 맡은 역이 너무 인상이 강했는지, 그 후로도 비슷비슷한 남장여인역 또는 아예 남자역만 줄줄이 맡으며 이미지 변신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런 역으로 출연했던 많은 영화가 '동사서독' 하나 빼고는 다 그렇고 그런 '시간 때우기'용 영화였음. -.-;;) 그러다가 1993년에 만든 이 백발마녀전에서 모처럼 여성미 넘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동방불패에서 보여줬던 엄청난 카리스마는 백발마녀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됨 ^^)
 
  이 영화는 아무래도 한참 전에 만든 영화라 화면이 좀 거칠기는 하지만, 화면의 색감이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번갈아가며 화면을 채우는데, 화면톤만 봐서는 마치 '붉은 수수밭', '홍등'(붉은색)과 '천녀유혼'(푸른색) 수준으로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그리고 무술하는 장면에서는 왕가위 감독의 전매특허인 스텝프린팅도 사용한다. 아마도 감독인 '우인태'가 왕가위만큼이나 감각적이고 화려한 영상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우인태 아저씨는 미국으로 진출한 뒤로는 '처키의 신부',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프레디 대 제이슨' 등 제목만 들어도 싸구려 공포영화임을 짐작할 수 있는 영화만 줄줄이 만들고 계심. ㅠ.ㅠ  그래도 작년이던가, 이연걸 주연의 '무인 곽원갑'도 찍었다고 함. 비록 그 영화를 안 봐서 괜찮은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진짜 저녁놀이 아닌 것이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붉은색으로 화면을 꽉 채워 강렬한 인상을 줬던 장면. 

 

 

푸른색 수면과 빛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냈던 장면.

 


  그리고 영화음악도 훌륭했다.

  장국영이 직접 작곡했다는 주제곡 홍안백발(紅顔白髮)은 정말 멋졌다. 홍콩의 또 다른 가수이며 배우인 여명이 이 홍안백발의 곡에 가사만 바꿔 일생최애(一生最愛)라는 제목으로 다시 불렀는데, 내가 최초로 좋아했던 '중국어권 노래'(정확히 말하자면 광동어 노래)이다. ^^

  또한 어린 장국영이 저녁놀을 배경으로 꽃잎을 날리며 검술을 펼칠 때 흐르던 웅장한 배경음악과 임청하가 목욕하는 모습에서 흐르던 조금 애잔한 느낌의 배경음악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90년대 홍콩영화가 '질'보다는 '양'을 중요시했던 탓에 스토리가 엉망진창인 영화가 너무 많았는데, 다행히도 이 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한 편이다.

  탄탄한 스토리에 연기력 뛰어난 스타급 주인공들이 나선 덕에 영화의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장국영이나 임청하 모두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배우이건만, 이들이 출연하고도 영화같지도 않게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많던가...! 배우의 연기력도 중요하지만, 역시 일단은 대본이 튼실하고 볼 일임.)

  이 영화를 흔히 '무협영화'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무협을 소재로 한 멜로영화'라 할 수 있다.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피자에 비유한다면, 무협적인 요소는 피자 위에 뿌리는 타바스코 소스 정도? ^^

 

 

 

  영화는 절벽에 핀 꽃을 지키며 눈보라 속에 앉아있는 탁일항(장국영)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청나라 초기, 황제가 중병에 걸리자 조정에서는 천설봉에 20년만에 한번씩 피며 죽은 사람도 살리고 흰 머리도 검은 머리로 변하게 한다는 꽃을 구하러 사자를 보낸다. 사자 일행은 그 꽃이 피기를 10년째 기다리며 지키고 있는 탁일항에게 꽃을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지만, 탁일항은 딱 잘라 거절해버린다. 실력행사로 꽃을 빼앗으려던 사자 일행은 모두 탁일항에게 죽는다. 사자가 '누가 황제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라는 말을 남기고 죽자, 탁일항은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한 여인이다.'라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황제의 병이 나으면 황제가 큰 상을 내릴 것이라며 꽃을 달라고 부탁하는 사자들에게

'꽃은 줄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탁일항.


  명나라 말기에 무림은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파의 어른을 조롱할 정도로 당돌한 성격인 무당파의 어린 제자 탁일항은, 무당파 장문인인 사부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혼자서 늑대에게 쫓기다가 비슷한 또래의 랑녀(狼女:늑대와 함께 자라 이런 별명이 붙음. 훗날의 연예상-임청하-)가 피리를 불어 늑대를 불러들여준 덕에 목숨을 구한다.

 

 

피리 부는 신비한 소녀를 바라보는 탁일항.

(그런데 어린 탁일항 역을 맡은 이 녀석, 곱상하게 생긴 게 아무래도 여자애인 듯...)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쓰러졌다가 아직 무명 장수이던 오삼계에게 구조된다.

  그리고 어린 탁일항은 이 날 밤에,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나 부귀공명 같은 것들과 상관없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길을 가고자 하는 오삼계와 나이차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는다.

 

 

'술은 벗과 마셔야지'라면서 미성년자와 술항아리 가운데 놓고 대작하는 오삼계 장군... -.-;;

그리고 술을 주는 오삼계의 행동에 전혀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이게 웬 떡이냐는 식으로 즐겁게 퍼마시는 우리들의 탁일항 군... -0-';;

 

 

 

 ※ 여기서 잠깐, 오삼계(吳三桂)는... 

 

  영화 속 가공인물이 아니라, 명말청초에 살았던 실제인물이다.

  명나라 말에 북쪽의 만주지방에서 막 건국된 청나라가 북경을 노리자, 오삼계는 만주에서 북경으로 가는 요충지인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워낙 뛰어난 장수라 산해관을 공격하는 청나라 군사들을 번번히 물리쳐서,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발이 묶인 채 허송세월 해야 했다.

  하지만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북경이 함락되자, 오히려 이자성의 무리를 진압한다는 명복으로 청나라에 투항해 청나라 군사를 북경으로 끌어들였다. 덕분에 자신은 청나라로부터 높은 관직과 왕(王)의 지위을 수여받았지만, 조국인 명나라는 멸망했고 동족인 한족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오삼계를 4대 한간(매국노) 중 한 명으로 꼽는다 함.)  나중에 운남성 등지에 번국을 만들어 청나라 조정의 통제력이 닿지 않을 정도로 세력을 키웠는데,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에서 번국을 없애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이유가, 북경에 남겨뒀던 애첩을 이자성의 부하 중 한 명이 빼앗아 자기 여자로 삼자 이자성의 무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런데 그렇게 매국행위까지 하면서 애첩을 되찾았건만, 정작 그 애첩은 오삼계가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데 너무 실망하여 오삼계의 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사람이 사랑에 눈이 멀어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조차 잃게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음. -,.- )  

 

  그런데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자막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너무한 것 같다.

  10년 전쯤 이 영화를 비디오로 봤을 때에는 자막에 분명히 '오삼계'라고 제대로 표기되었던데, 그대로 '오삼계'라고 하든지, 아니면 중국식 발음으로 '우산구이'라고 하든지... 도대체 '무삼귀'는 어떻게 나온 이름인 거냐...? -.-;;

 

 

 

  어른이 된 탁일항은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권위나 규칙에 반항하며 생활하다가, 우연히 재회한 랑녀를 몰래 따라가 랑녀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반한다.

  하지만 랑녀가 급히 돌아오라는 마교의 전갈을 받고 자리를 뜨는 통에 이번 만남도 짧게 끝난다.

 

 

랑녀의 목욕하는 자태에 넋이 나가서 입을 못 다무는 우리들의 탁일항...  -.-;;

     
  사부는 탁일항을 사파인 마교와의 싸움을 위한 정파 연합의 통령으로 삼고, 장차 무림의 맹주 자리까지 물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사부의 기대와 달리, 탁일항은 정파와 사파로 갈라져 피를 봐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품고 무림을 떠나고자 한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는 말 그대로 사나이다운 기백 하나로 출세에 연연해하지 않고 옳은 길을 가고자 했던 오삼계가, 이제는 권력에 맛을 들여 함께 힘을 합쳐 권력을 잡자고 충동질하는 상황에 맞닥뜨려 더더욱 우울해진다.

 

  사파가 랑녀를 앞세워 정파를 습격해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와중에 다시 랑녀와 만난 탁일항...
  그렇잖아도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 싸워야 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던 탁일항은 싸움을 포기하고 자신을 죽이라고 하는데, 차마 탁일항을 못 죽이고 망설이던 랑녀가 독침에 맞아 부상당한다. 탁일항은 랑녀를 전에 랑녀가 목욕했던 곳으로 데려가 상처를 치료한다.

 

 

캡쳐한 화면질이 안 좋은 게 유감임.

푸르스름한 화면 속에서 탁일항이 입으로 랑녀의 독침을 뽑아주고 상처에서 피를 빨아내는 장면이 무척 감각적임. 

 

 

  그리고 이어지는 그 유명한 폭포에서의 러브신...!!!

  93년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장면이었고, 지금 봐도 요즘 영화의 러브신보다 절대로 뒤쳐지지 않는 장면이다. 두 주인공도 촬영 후에 모니터하면서 '정말 우리가 저렇게 한 거냐?'라고 놀랐다고... *^^*
  그런데 저 폭포와 호수 세트에 새 물을 공급하는 게 여의치 않아서 고인 물을 오랜 시간 동안 쓰고 또 써서 배우들이 폭포장면을 찍을 때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도 오래 고인 물이라 상했던 모양이다. (하긴 영화 화면으로 봐도 물이 꽤 더러워 보이기는 하더라... -,.- ) 냄새 풀풀 나는 물 속에 들어가 살갗이 간질간질하는 상황에서 감정이입도 잘 안 되었을텐데, 저런 격정적(!)인 장면을 찍다니 역시 장국영이나 임청하나 훌륭한 배우다.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될 때, 폭포에서의 러브신이 나오자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 해~'를 연발하는 사람이 수두룩 했다고 함.^^;;   

 

  탁일항은 랑녀에게 '연예상'이라는 이름도 붙여주고, 자신이 늙어 머리가 하얗게 세면 어쩌겠느냐는 연예상에게 그렇게 되면 천설봉의 꽃을 가져다 주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믿어달라는 연예상에게 그렇게 하겠다며 하늘에 맹세까지 한다. (연예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아가서 칼 뽑아들고 요란하게 맹세할 때, 그 맹세 깨뜨리게 될 줄 알아봤음...) 그리고 두 사람은 무림을 떠나 자기들끼리 조용히 살기로 약속한다.

 

 

'어떤 경우라도'라는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말이건만,

'어떤 경우라도 연예상을 믿겠으며 그 맹세를 깨뜨리면 천벌을 받아 죽을 것'이라고 하늘에 맹세하는 탁일항.


  그런데 임청하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가 누군지는 몰라도, 폭포에서의 러브신에 나오는 임청하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어찌나 간드러지던지, 괜히 등줄기에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는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 

  (중국어권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같은 배우라도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목소리가 다르게 나옴을 알 것임. 표준어를 못 하는 배우도 많고, 설사 할 줄 안다 해도 제대로 발음하는 배우가 드물어서, 대부분의 경우 성우가 별도로 목소리를 녹음하기 때문임.),  
  
  별 볼일 없는 조폭에서 빠져나오려 해도 손가락 하나는 잘라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마교 같은 무시무시한 조직에서 그냥 곱게 내보내 줄 리 없는 법...!

  연예상은 마교에서 탈퇴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기어이 탈퇴하는데 성공한다.

  그 동안 탁일항은 자신을 찾아온 무당파 사람들에게 이끌려 사부에게 가게 된다. 그런데 사부와 사부 곁에 남아있던 무당파 사람들은 이미 도륙당한 뒤고, 겨우 숨이 붙어있던 한 사람이 죽으면서 연예상의 짓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연예상을 가장한 마교 우두머리의 짓임.) 마침 그 때 연예상이 나타나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연예상이 사부를 죽였다고 믿는 탁일항은 연예상을 추궁하며 때리기까지 하고...  결국 연예상은 배신감과 충격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다.

 

 

마교에서 탈퇴하기 위해 끔찍한 고초를 겪었건만,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탁일항으로 인해 변한 연예상.  

 

  연예상이 떠나고나서 나타난 마교 우두머리를 보고서야, 탁일항은 연예상이 결백함을 알게 된다.

  탁일항은 마교 우두머리와 싸우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연예상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그렇다고 연예상이 탁일항을 용서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놈의 정 때문에...

 

 

처음에는 연예상이 돌아온 것이 기뻐 웃음을 짓지만, 연예상의 싸늘한 눈빛에 금새 굳어져버린 탁일항.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마교 우두머리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연예상은 싸움에 지쳐 쓰러진 탁일항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탁일항은 그렇게 떠나는 연예상을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떠나는 연예상과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탁일항.

 

  어떤 경우라도 믿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머리가 하얗게 되면 천설봉의 꽃을 꺾어다 주겠다는 약속만은 지키기 위해, 그 후로 10년간 연예상에게 줄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탁일항의 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작 장면과 같이 회한 속에서 꽃을 지키는 탁일항.

 

 

장국영의 발견(1) - 패왕별희(覇王別姬)(http://blog.daum.net/jha7791/1482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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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발견(3) - 동사서독(東邪西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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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jha7791/15375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