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줄 왼쪽 : '등나무집'의 저자인 성혜랑
뒷줄 오른쪽 :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본명은 이일남)
뒷줄 가운데 : 성혜랑의 딸이며 이한영의 여동생인 이남옥
앞줄 : 김정일과 그의 장남인 김정남
한동안 나에게 '북한 바람'을 일으켰던 '등나무집'이란 책에 대해 쓸까 한다.
('북한 바람'이라는 것은 그 전까지 별 관심 없던 북한의 역사와 실정, 남북통일문제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임. 무슨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어쩌구 저쩌구~~' 하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잠시라도 갖었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람.)
그런데 이 '등나무집'에 대해 쓰자면 서론이 좀 길다. 등나무집의 저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닌 성혜랑이기 때문이다.
성혜랑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다.
성혜랑(成蕙琅, 1935년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가이며, 김정일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 영화배우 성혜림의 언니이다.
1996년에 북조선에서 탈출하여 망명했으나, 망명한 나라가 어디인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경상남도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부부가 함께 좌익 운동을 했던 성유경과 김원주의 맏딸이다. 서울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부모의 월북에 동행하여 1948년 북조선으로 갔다.
월북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전위〉(1974) 등 단편소설 위주의 작품 활동을 했다. 망명한 뒤 남한에서 출간한 수기 《소식을 전합니다》(지식나라, 1999), 회고록 《등나무집》(지식나라, 2000)이 있다.
이들 수기에는 북조선에서 작가 생활을 한 성혜랑이 가까이에서 직접 본 월북 예술인들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어, 소식을 알 수 없던 김용준을 비롯하여 배운성과 이정수 부부 등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알려지기도 했다.
슬하에 1남 1녀로 이일남과 이남옥을 두었으나, 남한으로 망명하여 이한영으로 이름을 바꾼 아들은 1997년 경기도의 집 앞에서 피살되었다.
- 출처 : 위키백과 -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인 1996년 2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에도 대서특필된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 김정일의 처 성혜림과 처형 성혜랑 자매가 해외로 망명했다고 했다. (사실 처, 처형이란 호칭이 정확한 건 아니다. 김정일과 성혜림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으니...)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성혜림은 요양차 머물던 러시아 모스크바에 그대로 남았고, 그 언니인 성혜랑만 탈출한 사실이 밝혀졌다.
먹고 살기 힘든 보통 사람뿐 아니라 호의호식하는 상류층도 탈북하는 걸 보니 머지 않아 북한 정권이 무너질 거라는 둥, 그 자매가 원래는 서울 출신인데 6.25 때 공산주의자인 부모 따라서 월북했다는 둥, 성혜림이 낳은 아들이 김정일의 장남이라는 둥, 알고보니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이 이미 한참 전인 80년대에 남한으로 귀순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둥 한동안 정말 떠들썩했다.
이 와중에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본명은 '이일남'이고 '이한영'은 남한에서 지내며 쓰게 된 이름임)이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남한으로 온 뒤 계속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지냈던 이한영은 북한에서 김정일,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과 함께 지냈던 자신의 생활을 담은 책까지 냈다. 이 책은 한동안 유행했던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라는 말을 살짝 바꿔서 '평양 오렌지족 서울 구경'이던가 '평양 오렌지족 서울 잠행'이던가, 하여간 그런 비슷한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더니, 성혜랑의 망명 사건 1년만에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이 자신의 집 앞에서 피살되어 다시 한번 전국이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언론에서는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밝힌 것을 괘씸해 한 김정일이 간첩을 보내 이한영을 죽였다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용의자도 잡히지 않은 채 사건은 유야무야 되었고(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결상태임), 대학에 막 입학해서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내 머리속에서 그 사건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런데 2003년이었나, 2004년이었나, 속이 안 좋아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지 못 하고 사무실 근처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서 이 책 저 책 훑어보다가 눈에 들어온 게 이한영이 쓴 '김정일 로열 패밀리' 였다.
위에 쓴 '평양 오렌지족 서울 구경'인지 '평양 오렌지족 서울 잠행'인지 하는 책을 제목만 바꿔서 몇 년만에 새로 출간한 것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한영의 부인이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가계에 보태고자 새로 책을 발간했다는 기사를 읽은 듯 하다.
한국사람이라면 다 궁금해하는 김정일의 사생활이 나오는데다가, 읽다보니 음모의 냄새가 솔솔 풍겨 사람의 흥미를 끌었다.
즉, 비록 저자가 노골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80년대 초반 스위스에서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했다는 부분에서 '스스로 망명했다'가 아니라 '남한의 정보기관에 납치됐다'는 것을 행간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덮어놓고 정부의 정책이나 발표에 무슨 거창한 음모가 숨겨져있다고 믿는 음모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한영이 남한으로 올 때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이미 성인이었는데, '미국에 가보고 싶지만 북한 여권으로는 갈 수 없어서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가, 한국대사관의 설득과 권유로 귀순했다'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이건 언젠가 친구가 말해 준 'GO'라는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의 전향 이유와 똑같은 수준으로 황당하다.
※ GO
한국과 일본의 합작 영화인 GO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였던 주인공 가족은 하루 아침에 민단으로 전향한다. 그런데 그 전향 이유는 '북한의 실상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도 아니고, '북한에게 적대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일본인들의 차가한 시선 때문'도 아니다. 다름이 아니라, 주인공 아버지가 꼭 하와이 여행을 가고 싶은데 북한 국적으로는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0-;;
영화는 영화여서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전향한 이유가 그렇게 황당할 수 있다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이한영의 귀순 이유는 완전히 코미디다.
이한영의 어머니인 성혜랑이 아들의 실종된 날에 대해 '등나무집'에 쓴 내용을 봐도 도무지 자진해서 귀순했다고는 생각이 안 되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에서도 정보기관의 납치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기사를 낸 적이 있다. 하긴,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80년대에 남북이 서로 상대방쪽 사람을 납치하는 것 정도는 별 일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아예 폭탄을 이용해 버마를 방문한 남한쪽 부총리, 장관 등 고위인사들을 한꺼번에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한영이 쓴 책 때문에 이한영이란 인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뜻밖에도 이한영의 어머니 성혜랑이 자신의 집안 3대에 걸친 이야기를 남한에서 수기로 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수기가 바로 '등나무집'이다. 문제는 '지식나라'라는 출판사에서 2000년에 출간했다는 이 책이, 내가 찾을 그 당시에는 이미 절판 상태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뭔가에 한번 필이 꽂히면 끝장을 봐야하는 내 성질에 그냥 포기할 수는 없어서, 인터넷의 헌책방을 전부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헌책도 옥션이나 G마켓 비슷한 대형 오픈마켓이 생겨서(예를 들면 '북코아' 같은 사이트) 자신이 찾는 헌책 구하기가 쉽지만, 그 때만 해도 헌책 전문 오픈마켓이 없었다. 포털에 들어가서 '헌책방'이라고 검색어 쳐서 화면에 주루룩 뜨는 헌책방 사이트에 일일이 접속해서 다시 '등나무집'을 검색하는, 정말 단순무식한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그나마 인터넷 헌책방이라는 게 생긴 시절이라 비록 무식한 방법으로라도 손품을 팔아 책을 찾았지, 안 그랬으면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절판된 책을 도대체 어디가서 구했을지 암담하다. 전국의 헌책방 돌아다니며 발품 팔 수도 없고... (정말이지 세상 참 좋아졌다~~)
하여간 손목이 시큰해질 정도로 열심히 마우스 클릭하며 손품을 판 덕에 책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며칠이 지나서 강원도 어디에 있는 헌책방에서 책을 택배로 보내와 드디어 책을 손에 넣었다.
(여기까지가 서론... 본론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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