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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발견(2) - 아비정전(阿飛正傳)

Lesley 2008. 6. 7. 02:25

 

 

 

 

 

 

장국영을 두번째로 발견한 영화는 패왕별희보다 몇 년 전에 제작되었던 '아비정전'이다.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 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발 없는 새가 태어날 때부터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 새는 이미 처음부터 죽어있었어. 
 난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아.
 이미 때는 늦었지만...

                                                    -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의 대사 중 -

 

 난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냥 한번 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 봐주지 않았으니, 나도 보여주지 말아야지...

 

 

                                                     -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의 대사 중 -

 

 

 

  내가 '아비정전'이란 영화를 보게된 것은 웃기게도 우리나라의 변덕스런 대입제도 덕분이었다. 


  교육은 百年之大計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一年之小計가 아닌가 싶다.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씨가 정식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오렌지가 아니고 아륀지' 하면서 영어몰입교육이 어쩌구 하며 전국을 들썩이게 하더니, 결국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지금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10년도 전,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무슨 놈의 대입시험제도가 1년마다 바뀌는지 학생들이나 교사들이나 다들 꽤나 골탕 먹었다.

  내가 고2 때만 해도 서울 시내의 어지간한 대학 가려면 내신과 수능성적만으로는 안 되고 본고사를 반드시 치러야 했다. 그런데 막상 1년이 지나 고3이 되고 보니, 일류대에 지원할 성적 좋은 학생들이나 본고사 준비하면 되고, 나머지는 본고사의 변형인 논술시험만 준비하거나 아예 논술시험조차 안 치러도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

  그러니 강남쪽 학교야 소위 SKY라는 대학에 가기 위해 본고사 준비하느라 수능시험 후에 더 야단법석이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우리 학교의 고3 학생들 대부분은 수능시험이 끝난 후에 공부할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학교 입장에서는 꽤나 골 아픈 상황이었다.

  겨울방학 시작 전까지는 학생들이 학교에 계속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사실상 내신과 수능성적으로 지원할 대학이 결정난 대다수 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들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 안 나와도 된다고 하면, 철없는 나이의 학생들이, 더구나 수능시험 끝난 해방감까지 겹친 학생들이 어디 가서 무슨 말썽을 피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학생들을 일단 등교는 시키되, 일찌감치 낮 12시쯤 하교시키기로 했다. 

  그 12시까지 학생들의 무료함도 달래주고 학생들이 뭔가 사고 칠만한 시간적 여유도 안 주기 위해, 하루에 비디오 2편씩 보여줬던 것이다. 비디오는 학교에서 정해주는 게 아니라, 각 반에서 돌아가며 적당히 누군가 가져왔다.  대부분은 액션물이었는데, 어느 반의 누구였는지 좀 특이한 비디오 한 편을 가져 왔다.

 

 

 

  바로 '아비정전'이었다.

 

  보기만 해도 끈적끈적한 더위와 습기가 느껴지는 영상, 느린 전개, 음울한 분위기, 역시나 우울하다 못해 축축 처지는 대사...

  과연, '열혈남아'로 성공한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라는 말에 극장으로 갔다가 너무 다른 스타일에 열받은 관객들이 극장문을 깨부수며 환불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올 법한 영화였다. 그리고 열혈남아와 같은 대박을 꿈꾸며 아비정전 제작에 투자했던 흑사회(중국 조폭)쪽 거물이, 흥행실패로 대박은 커녕 쪽박 찰 상황이 되자 왕가위를 죽이려 킬러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돌만한 영화였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소문에 의하면, 왕가위는 중경삼림과 타락천사의 성공으로 그 거물과 화해하게 되었다나? -.-;;)

 

  '천장지구', '인디아나 존스' 등 눈요기거리 많고 전개가 빠른 비디오를 한동안 신나게 봤던 학생들에게 그런 영화를 보여줬으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자거나, 옆의 친구들과 떠들었다. 심지어 교실에 잔소리 할 선생님도 안 계시니(선생님들은 교실 비운 채 학생들의 대입원서 쓰느라 교무실에 베이스캠프 차린 상황) 아예 다른 반 친구를 찾아 옆 반으로 마실까지 가버렸다. -0-;;

 

  그 와중에서도 나는 열심히 아비정전을 봤다.
  그렇다고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영화 속에 녹아있는 홍콩의 중국 반환을 목전에 둔 홍콩인들의 우울함을 이해했다든지, 장국영이 영화 속에서 읊조리는 '발 없는 새의 전설'에 감명을 받았다든지, 자신을 모르는 척 하는 생모 앞에서 돌아서며 '나를 봐주지 않았으니, 나도 봐주지 않아야지'라고 했던 장국영의 독백에 가슴이 울렸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조금 더 세월이 흘러 대학에 가서 다시 아비정전을 봤을 때에 비로소 느꼈던 감동이고, 그 때는 그저 '패왕별희'의 장국영이 나온다는 점 하나 때문에 지루한 걸 참아가며 열심히 봤다. 그 당시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이라고는 혼자 맘보춤을 추는 장국영을 보며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고 혼자서 뭐 하는 짓이래?'했던 게 전부다. -.-;; 

 

 

  어쨌거나 장국영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천녀유혼', '종횡사해' 등의 영화를 아직 못 본 상태에서 먼저 보게 된 아비정전은, 패왕별희와 함께 '장국영은 오빠부대가 꺅꺅 거리며 쫓아다니는 아이돌 스타가 아니야, 장국영은 진정한 배우야'라는 생각을 굳게 만든 영화이다.

 

 

장국영의 발견(1) - 패왕별희(覇王別姬)(http://blog.daum.net/jha7791/14823020)
장국영의 발견(3) - 동사서독(東邪西毒)(
http://blog.daum.net/jha7791/14827437)
장국영의 발견(4) -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1(
http://blog.daum.net/jha7791/15375506)
장국영의 발견(5) -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 2 : 천하무적(
http://blog.daum.net/jha7791/15375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