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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의 발견(1) - 패왕별희(覇王別姬)

Lesley 2008. 6. 7. 02:04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당연히 좋아하는 영화배우도 여러 명이다.
  하지만 그 중에 가장 좋아했고, 좋아했던 기간이 가장 오래 되었고,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던 배우는 몇 년 전에 자살로 생을 끝낸 장국영이다.

 

 

  내가 처음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가 다음넷인데, 그 다음넷에서 쓰는 ID가 Lesley다.

  이 ID를 사용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장국영 때문이다.  장국영의 팬이라면 알겠지만, 장국영은 Leslie란 영어이름을 썼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졸업하고 몇 년 후까지 장국영에 미쳐있던 나는 Leslie를 나의 ID로 삼고 싶었지만, Leslie가 '드물게 여자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는 남자이름'이기 때문에('동아 프람임 영한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 차선책으로 Leslie와 발음이 같은 여자이름 Lesley를 선택했다. 한참 후에야 Leslie란 이름을 가진 여자들도 꽤 많다는 걸 알게 되어, 하마터면 동아 프람임 영한사전에 불지를 뻔했다. ㅠ.ㅠ (그러고보면 양성애자 또는 동성애자로 알려져있던 장국영이 남녀 모두의 이름으로 쓸 수 있는 Leslie란 이름을 택한 건 그냥 우연일까?)

 

 

 

 

  나는 장국영을 영화 '패왕별희'에서 발견했다.

 

 

  1993년 깐느영화제 그랑프리는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와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가 공동수상했다.

  이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영화제 이외의 영화제 수상작은 사람 잡는 예술성으로 지루하기만 한 영화다' 라는 내 선입견을 부순 작품들이다. (그런 선입견을 나에게 심어준 영화가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를 통해 봤던 장예모 감독과 공리 주연의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임. 지금처럼 영화 볼 수 있는 경로가 많았더라면 절대로 안 봤을 영화들임. ^^;;)

  특히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가서 패왕별희를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 엄청났다. 그리고 패왕별희에서 발견한 장국영에 대한 강렬한 느낌은 더욱 더 엄청났다.

 

 

  물론 고등학교 1학년이 되기 전까지 장국영을 아예 몰랐다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홍콩영화 덕분에, 동네방네 전봇대와 담벼락에 붙은 포스터에서 장국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초딩, 중딩들이 홍콩영화를 접하는 수단인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었다. (영화에 대한 검열이 지금보다 심했던 때라 유치찬란한 '강시' 시리즈 등의 아동물을 빼고는 대부분 액션물 -그것도 어둠의 세계 사나이들의 의리를 다룬 액션물 - 이나 도박물이었던 홍콩영화는 극장에서 초등학생, 중학생 관람 불가였을 것으로 생각됨) 그래서 위에서도 쓴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 등 주로 할리웃 영화를 방영해줬던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아직 어린 나는 '영화=미국영화', '배우=미국배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 시절의 나에게, 홍콩영화는 영화가 아니었고, 그런 홍콩영화에 출연하는 장국영은 배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패왕별희를 보고나니, 그 전까지 '그냥 장국영' 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배우 장국영' 으로 다가왔다...! 
  경극 속에서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 항우지만 현실에서는 평범한 남자인 사형과는 달리, 항우를 사랑한 우희의 역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현실에서도 사형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장국영... 사형을 찾아와 당돌하게 혼인하자고 요구하는 공리 앞에 신발을 내던지며 대놓고 적대감을 표현하던 모습... 사형과 공리의 혼인날, 배신감과 절망감으로 다른 남자에게 몸을 내주고 그 대가로 얻은 보검을 사형에게 혼인선물이라고 던져주며 이별을 고하던 모습... 아편에 찌들어 금단현상에 몸부림 치다가 쓰러져 어린 시절 헤어진 엄마를 찾던 모습... 문화대혁명 때 조리돌림을 당하기 전, 홍위병의 강요로 불안에 떨며 경극 분장을 하는 사형에게 다가가 경극을 할 때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태연히 정성을 다해 분장을 도와주던 모습... 홍위병의 협박으로 공포에 질린 사형이 얼떨결에 장국영이 과거에 남자에게 몸을 팔았다고 폭로하자, 사형에게 광기 어린 태도로 악을 쓰며 기생인 공리와 혼인했다고 비난을 퍼붓던 모습...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사형과 단 둘이 선 마지막 무대에서 눈물 어린 눈으로 사형을 바라보다가, 경극에서 우희가 항우의 칼로 그러했듯이 사형의 칼로 자살하며 경극을 현실에서 완성시키던 모습까지...
 
  그런데 이 글에서 장국영과 공리는 배우의 실제 이름을 쓰면서, 어째서 장국영의 사형 역을 맡은 배우는 그냥 '사형'이라고만 하느냐?

  사형 역을 맡은 배우는 공리처럼 대륙 출신 배우인데, 성은 장국영과 같은 장씨이다. 아니, 아마도 장씨였던 것 같다. -.-;; 영화 팜플렛에서 이 배우의 이름도 분명히 봤는데, 기억도 안 나고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미안하이, 장씨, 자네와 부인 사이를 질투하는 사제의 애틋한 심정도 모르고, 행여나 자네 마음이 사제에게 옮겨갈까 불안해하는 부인의 심정도 모르는, 즉 자신이 삼각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초특급슈퍼울트라 둔탱이인 자네의 이름을 내가 알아 무엇하겠나?   - 많은 영화를 봤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눈치없는 캐릭터는 처음 봤다 -   하긴 자신이 초패왕 항우 역을 맡을만한 사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툭하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식하게 이마로 벽돌 깨뜨리기를 해댔으니, 머리가 나빠져 둔탱이가 되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

 

 

  하여튼 이 패왕별희 덕분에 남들은 홍콩영화 전성기 때 좋아했던 장국영을, 나는 홍콩영화 쇠퇴기에야 비로소 열광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국영(张国荣)의 당애이성왕사(当爱已成往事) - 영화 '패왕별희' 의 주제곡 (2)(http://blog.daum.net/jha7791/15790863)
장국영의 발견(2) - 아비정전(阿飛正傳)(
http://blog.daum.net/jha7791/14823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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