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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황조(宋家皇朝) - 송씨 가문의 세 자매 (上)

Lesley 2008. 6. 29. 23:20

 

 

 '송가황조(宋家皇朝)' 는 '가을날의 동화'와 '유리의 성' 등을 만들었던 여감독 장완정의 작품으로, 중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송씨 가문의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세 자매 중 첫째인 송애령(宋靄齡) 역은 무협물에서나 현대물에서나 멋진 액션을 보여주는 양자경이 맡았다.  그리고 둘째인 송경령(宋慶齡) 역은 베를린 영화제와 칸느 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뿐 아니라, 작년에는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까지 맡았던 대배우 장만옥이 맡았다.  마지막으로 셋째인 송미령(宋美齡) 역은 '마지막 황제'에서 부의의 후궁인 문수 역으로 출연했던 오군매가 맡았다. (오군매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하늘과 땅'에도 출연했었다는데, 분명히 그 영화를 봤건만 이 배우를 본 기억이 도통 없음.  그저 '지나가는 사람 1' 같은 수준의 단역이었나? -.-;;) 

 

 

                         (위) 실제 송씨 가문 세 자매의 모습. 왼쪽부터 첫째 송애령, 둘째 송경령,

                              셋째 송미령 

                         (아래) 영화 '송가황조'에서의 송씨 가문 세 자매의 모습.

                                  양자경(송애령 역), 장만옥(송경령 역), 오군매(송미령 역) 

 

 

 

 

 먼저 영화의 배경 설명을 하자면...

 

 

  이 세 자매는 19세기 말의 중국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물들이다.

  당시로는 정말 드물게 미국 유학을 다녀와 기독교를 믿는 대부호인 아버지와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덕분에,  대다수의 여성들이 기초교육조차 못 받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돌아와 각자 중국 현대사의 이름을 남긴 이들과 결혼을 하고, 드라마 '여인천하'식의 베갯머리 송사가 아닌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들이다. 오죽하면 당시 중국 사람들이 '송가황조 일문천하(宋家皇朝 一門天下)'란 말을 했을까... 

 

 

  세 자매의 아버지인 송가수(흔히 '찰리 송'으로 알려짐)는 어린 시절에 미국에 가서 감리교단의 도움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돌아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 머물렀던 시기에 미국에서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박해 사건이 일어났고, 중국으로 돌아와 선교사로 일할 때에도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급여문제 등에 있어서 선교단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차츰 민족주의적, 반외세적인 성향을 갖게 되고 갖게 되었다. (반대로 송가수를 후원해줬던 감리교단 지도부에서는, 송가수가 선교사가 될 의향이 없으면서도 미국에서 감리교단의 도움으로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열렬한 기독교인 척 했다고 의심했음.   진실은 저 너머에... -.-;;) 

  결혼한 후 선교일을 그만 둔 송가수는 인쇄업에 손을 대어 주로 성경을 출판하며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이 무렵 손문을 알게 되었다. 송가수는 손문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조정(당시는 청나라 시절이었음) 몰래 자신의 인쇄소에서 혁명에 관련된 책자를 인쇄하도록 도왔다. 

 

 

  송가수는 부인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자신이 미국에서 교육받았던 것처럼 자녀들도 모두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과거의 불쾌했던 경험 때문인지 자녀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냈으면서도, 자녀들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원했지 서구적으로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춘기 때 미국유학을 간 언니들과는 달리, 겨우 8세에 유학을 간 막내딸 송미령은 스스로 "나에게 동양인스러운 곳은 얼굴 밖에 없다" 등의 말을 할 정도로 서구화되었다. (이에 대해 송가수는 친구에게 "자식들을 외국으로 보내지 말게. 자식들이 돌아와도 하나도 좋은 게 없다네. '아버지, 왜 우리는 더 큰 집이 없어요?', '아버지, 왜 현대식 욕실이 없어요?'라는 불평만 한다네. 내 충고를 받아들이게."라고 한탄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음. -.-;;)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지금보다 훨씬 낮은 시절이었음에도, 세 딸은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런 활약이 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또는 원래 대단한 인물이기 때문인지,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각각 어떻게 평가되느냐에 상관없이, 중국의 격동기에 세 사람 모두 큰 족적을 남긴 건 사실이다.

  그에 비해, 세 자매와 친동기간인 세 아들은 존재감조차 희미하다.  사실은 세 아들도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을 나와 장개석 정권에서 경제쪽 고위관료로 활동하는 등 꽤 출세한 인물들인데, 누이들에 비하면 영~~~ 아니다. (혹시 음기가 센 집안인가? -.-;;)  심지어 이 송가황조라는 영화에서는 세 아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아서, 마치 송가수한테 세 딸만 있고 아들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온다. -0-;; 

  그만큼 이 세 자매가 유명하다는 말인데,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중국에는 세 자매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돈을, 한 사람은 권력을,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다.'라고 회자되고 있다. 영화 송가황조은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된다.

 

 

옛날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다... 

 

 

  영화는 중국 북경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송경령과 미국 뉴욕에서 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송미령이 각각 자신들의 어린 시절부터 국공내전에서 결국 공산당이 승리하여 대륙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시절까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영화 줄거리''영화 이외의 이야기'를 합쳐서 쓰도록 하겠다.

 

 

 

 

 1. 나라를 사랑한 송경령(宋慶齡)

 

  세 자매 중 둘째인 송경령(宋慶齡)은 대륙과 대만 양쪽에서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손문(孫文)의 아내로, 겨우 10년 밖에 안 되는 결혼기간 동안 손문의 아내이자 비서로 손문을 보필했고, 손문 사후에도 손문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원래는 송경령의 언니 송애령이 손문의 비서였는데 결혼으로 비서직을 그만 두게 되자, 마침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던 송경령이 대신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살이나 연상이었던 손문과 망명지 일본에서 결혼했다.

  중국에서 처음 생산한 비행기의 성능과 안전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직접 시승하면서, 위험하다고 말리는 남편에게 '저도 중국산이에요. 당신 중국산에 자신 없어요?'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데 웬지 말 많고 탈 많은 현재의 made in China 논란이 떠오르는... -.-;;)

 

 

  손문이 세상을 뜬 후에는 국민당을 장악한 장개석과 동생 송미령의 결혼 문제에 대해, 언니 송애령과는 달리 반대하고 나서서 자매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송애령은 친정인 송씨가문의 명성, 남편 공상희가 속한 공씨가문의 엄청난 재력, 손문이 가진 권위와 명예가 합쳐진 상황에서, 장개석의 군사세력까지 합쳐진 강한 연합체를 만들고 싶어했다. 이렇게 송미령-장개석의 결혼을 적극 지지했던 언니와는 달리, 송경령은 "차라리 동생 미령이 죽는 것을 볼지언정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장개석의 인간성과 야심을 싫어했다. 

  그래서 장개석과 대립하며 중국 공산당 및 소련과의 연합을 추진하는 등 국민당 좌파 지도자 중 하나로 활약했다. 

 

 

  대륙이 공산화 된 후에도 다른 송씨 가문 사람들과 달리 대륙에 남아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며 여성 및 아동 문제와 외국과의 친선에 힘썼다.

  문화대혁명 때는 송경령의 집안이 대부호라는 이유로 홍위병들에게 비난을 받고 상해에 있던 송경령 부모의 묘가 파헤쳐지는 일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주은래의 배려로 위험한 시기를 넘겼고, 1981년 국가 명예주석의 칭호를 받고 얼마 안 되어 북경에서 88세로 세상을 떴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던 세 자매였지만, 모두 장수했다는 점만은 똑같음)  

 

 

  그런데 송경령에 대한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첫째, 송경령의 유언에 의해, 송경령의 시신은 남편인 손문과 함께 묻히지 않고 상해에 있는 부모의 묘 근처에 함께 묻혔다. 그런데 송경령의 묘 바로 옆에는 무려 50년 넘게 충심을 다해 송경령을 시중들었던 이연아라는 하녀의 묘가 있다.

  송경령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이연아를 단순한 하녀가 아닌 친구로 생각했고, 이연아가 자신보다 불과 몇 달 전에 세상을 뜨게 되었을 때 이연아에게 자신의 묘자리 옆에 이연아의 묘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의 묘로부터의 거리까지 똑같이 하도록 했다. 50여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끈끈한 애정이나 동지애를 생각하더라도, 한 나라의 부주석 및 명예주석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사람이 평생 일자무식에 하녀로 지냈던 사람을 자신의 가족묘지에 받아들여 자신과 나란히 묻히도록 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둘째, 공산화된 중국에서 30년 이상을 살았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정부에서 국가 부주석의 지위까지 올랐건만,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야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아시는 분은 설명해주시기를...)  

  

(위) 일본에서 송경령과 손문이 결혼식 올리는 장면

(아래) 중국에서 만든 비행기에 시승하는 장면

 

 

 

 

 2. 권력을 사랑한 송미령(宋美齡)

 

  셋째인 송미령(宋美齡)은 미국과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펼쳤으며, 가장 최근(2003년)까지 생존했던 송씨 집안 사람이다.

 

 

  형부인 손문이 세상을 뜬 후 국민당의 당수가 된 장개석(蔣介石)과 결혼했는데, 큰 언니인 송애령이 이 결혼을 적극 지지한데 반해, 작은 언니인 송경령은 반대했기 때문에 자매간의 사이가 나빠졌다.

  송경령은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를 어기고 국민당을 자신의 권력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며 이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송경령이 나이 많은 손문과 결혼할 때 가족 중 유일하게 찬성하고 축하해줬던 송미령은, 그러한 언니의 반대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작은 언니 송경령이 남편의 비서 및 통역을 맡았던 것처럼, 송미령도 남편 장개석의 비서 및 통역으로 활약했다.

  특히 유명한 서안사변(西安事變) 때 장학량(張學良)에게 감금된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서안으로 가서 장학량과 공산당인 주은래(周恩來)를 만나 담판을 지은 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나중에는 미국 국회에서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연설을 하여 중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고, 카이로 회담 때 남편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미국 타임지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으로 꼽히기도 하고 타임지 표지에 두 번이나 장식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중국이 동맹관계이기도 했고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가 송미령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끼기도 해서, 송미령이 병을 치료하려고 미국에 갔을 때 대통령 부부가 특별히 백악관에 머물게 배려했던 적이 있음. 처음에는 대통령 부부가 송미령을 '사랑스러운 중국 여인'이라며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나중에는 송미령의 거만하고 과격한 태도에 질린 나머지 송미령이 하루 빨리 백악관을 떠나기만 바랬다고... -.-;;)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해 대만으로 물러난 후에도 대미외교에서 활약했지만, 남편이 세상을 뜨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전처 자식인 장경국이 집권한 뒤로 미국으로 이주해서 여생을 보냈다.

  영화에서는 중국 정부로부터 작은 언니 송경령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송미령이 언니를 만나기 위해 북경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북경으로 출발하기 전에 언니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송경령이 위독하다는 전보와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해달라는 중국 정부의 요청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 개인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대륙과 대만 사이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공산당과 교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킨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이 송미령을 장례식에 초청했다는 사실에 노발대발한 장경국이 가지 못하게 해서 못 갔다는 설도 있음.)

 

 

  1995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 기념으로 98세의 나이로 미국 국회에서 기념연설을 해서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송씨 자매 중 가장 장수하여 미국 뉴욕에서 106세에 세상을 떴다. (106세...!! 1897년에 태어나 2003년에 세상을 떴으니 무려 3세기에 걸쳐 살았다...!! @.@)

 

 

(위)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식 장면

(중간) 서안사변 때 서안으로 가서 장학량과 남편을 만나는 장면 

(아래) 서안사변 때 공산당과 연합할 수 없다는 남편을 설득하는 장면

 

 

 

 

 3. 돈을 사랑한 송애령(宋靄齡)

 

 

  세 자매 중 첫째인 송애령(宋靄齡)는 두 동생처럼 정계에서 직접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두 동생이 정치 노선의 차이로 대립할 때 막내동생 송미령의 편이 되어 막후에서 활동했다.

 

 

  송애령은 동생 송경령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손문의 비서로 일하다가, 공자의 직계후손이며 자신처럼 미국 유학파인 대부호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했다. 공상희는 나중에 산업부장관도 역임하는 등 장개석 정권의 재정쪽 일을 맡았다.

  송애령-공상희 부부는 송경령과는 달리 장개석의 집권을 지지했고,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을 추진해서 성사시켰다.

 

 

  송애령은 영화 속에서는 송미령-장개석 편에 서긴 하지만, 송경령을 죽이려는 장개석을 노련하게 구슬려 송경령의 목숨을 구해낸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생 송경령이 자신들과 정치적으로 갈라서고 기자회견 등 공식석상에서 자신들을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하자, 송경령을 죽이려 킬러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 정도로 동생과 사이가 나빴다. -0-;;  송경령은 재물욕이 강한 언니에 대해 "야심을 가졌으면서도 겉으로는 도덕적인 언동을 하는 동생 미령보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감추려 하지 않는 솔직한 언니 애령 쪽이 차라리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 말이 액면 그대로 '애령이 미령보다는 낫다' 라는 말로 들리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애령이 돈에 환장했는 말로 들림... -.-;;)

 

 

  공상희-송애령 부부는 자신들의 지위와 인맥을 이용해서 정부의 공금을 횡령했다든지 주가를 조작했다든지 하는 추문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다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시 되자, 같은 편인 장개석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미국으로 이주해버려(-.-;;) 장개석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미국이 중국에 제공했던 원조금 중 상당액을 송애령-공상희 일가가 가로챘다는 혐의로 내사를 받았지만, 막강한 로비(!)로 혐의를 벗고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어쩐지 세 자매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듦... -.-;;)

 

 

  두 동생이 모두 자식을 낳지 못했던 데 비해(송경령은 한번 임신을 했지만 반란사건 와중에 유산을 했고, 송미령은 아예 임신을 하지 못 했음), 송애령은 여러 자녀를 두었고 송애령과 가깝게 지냈던 송미령은 이 조카들을 무척 사랑했다.

  송애령은 송미령이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계속 가깝게 지내다가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위) 송애령과 공상희의 결혼식 장면

(중간) 송미령과 장개석의 결혼 문제를 두고 송경령과 다투는 장면 

 

 

송가황조(宋家皇朝) - 송씨 가문의 세 자매 (下)(http://blog.daum.net/jha7791/15025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