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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이스(Paradise) - 수명과 젊음조차 사고 파는 세상

Lesley 2024. 4. 26. 00:10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독일 영화 '패러다이스' 는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호불호가 갈린다.

  일단 영화의 주제는 좋다.  '과학의 발전을 무제한 허용해야 하는가' 와 '경제적 대가만 치른다면 무엇이든 허용해야 하는가' 를 화두로 잡고 있다.  AI니 인간복제니 하는 것들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과학의 발전 속도가 눈부시다 못해 아예 우리 인간들이 과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매몰되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든다.  게다가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태에 걸맞는 주제를 선택해서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설정이나 전개에 구멍이 뚫려 있다.  원래 SF 영화에 나오는 기술은 현대에는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상상력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그 상상력으로 점철된 설명조차 해주지 않는다.  이 사람의 수명을 저 사람에게 옮겨주는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굵직한 호스를 사람 옆구리에 꽂으면 수명을 빼낼 수도 수명을 넣어줄 수도 있다. (너무 한 거 아니니...)   

 

 

 

 

 

  이 영화 속 세상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사고 파는 게 가능하다. (수명에는 젊음도 당연히 따라옴.)

  '조피 타이젠' 이라는 노년의 여성 과학자가 한 사람의 수명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대단한 기술을 개발하여, 인간의 수명을 사고 파는 일을 중개하는 '에온' 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물론 돈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수명을 내다 팔 일은 없다.  수명을 파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 밖에 없는 저소득층이고, 그 수명을 사서 회춘(!)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은 부유층이다.

 

  당연하게도 이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인간 생명의 상품화, 빈곤층에 대한 수명 착취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거부감 수준을 넘어서 증오심을 드러내며, 에온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에온의 기술 덕분에 수명을 연장한 사람들까지 죽이려는 '아담' 이라는 테러단체도 생겼다.

  그러나 조피는 다음과 같이 에온의 사업을 정당화한다.  뛰어난 과학자나 훌륭한 예술가가 원래의 수명을 뛰어넘어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으니,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도 수명을 팔면 돈을 벌 수 있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잠깐...!

  조피는 처음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상하다.  조피 자신이 수명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이니  인간의 수명을 사고 파는 것에 윤리적인 딜레마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리 없다.  또한 그 기술로 대기업을 세워 운영하는 CEO이니 남의 수명을 살 돈이 없을 리도 없다.  그런데 왜 젊은 모습이 아니라 늙은 모습인 걸까?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을 위한 복선이다.

 

 

 

  '막스' '엘레나' 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부부다.

  막스는 에온의 에이스급 영업직 직원이고 엘레나는 시립병원의 의사인데, 이 부부는 좋은 아파트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 아파트는 두 사람의 수입으로 사기에는 매우 비싼데, 막스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엘레나를 너무 좋아하는 은행 직원' 덕분에 은행 대출을 쉽게 받아서 구입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이상했음.  은행 직원이 불리한 조건의 고객을 좋아해서 거액의 대출을 턱 내준다고?)

  그런데 두 사람이 엘레나 부모의 집에 다녀오는 사이 화재가 나서 아파트가 타버렸다.  그래도 화재보험에 가입했으니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찰 조사 결과 엘레나가 외출 전에 촛불을 안 끈  탓에 불이 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보험회사에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다.

 

  아파트가 없어져버린 와중에 거액의 아파트 대출금 갚을 일도 까마득한데 더 큰 불행이 닥친다.

  막스는 은행 대출 조건이 아파트를 담보로 잡는 것 하나 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담보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두 번째 담보란 바로 엘레나의 수명 38년...!!!  에온의 기술력과 사업으로 사람의 수명이 사고 파는 물건이 되었으니, 그런 수명을 은행 담보로 내놓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엘레나도 처음에는 38년의 수명을 두 번째 담보로 제공하라는 제안에 망설였다.  하지만 은행 직원이 그럴듯한 말로 꼬드겼다.  수명을 담보로 잡는 건 형식적일 뿐이라고. (뭐라고? 사람 목숨을 담보로 잡겠다는 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은행 담보가 형식적이라는 더욱 황당한 말을 믿으라고?)  설사 사정이 생겨 대출금을 못 갚게 되더라도 아파트가 있으니, 그 아파트를 팔아서 대출금을 갚으면 엘레나의 수명이 위험해질 일은 없다고.  그런데 이제 아파트는 불타버렸고, 은행에서는 첫 번째 담보인 아파트가 없어졌으니 두 번째 담보인 엘레나의 수명 38년을 당장 가져가겠다고 난리다.

 

  결국 엘레나는 38년의 수명을 빼앗긴다.  

  막스가 어떻게든 아내의 수명을 지키겠다며 변호사를 쓰는가 하면, 자기가 다니는 에온의 회장 조피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범죄자처럼 끌려가서 수명을 빼앗기고 그 부작용으로 임신 초기의 태아까지 잃는다.

  38년의 수명을 빼앗겼다고 해서 순식간에 38년의 세월을 건너뛰는 것은 아니다.  새로 이사한 허름한 숙소에서 지내며 며칠에 걸쳐 서서히 늙어간다.  30대 초중반 정도의 여자가 며칠 후에는 70대의 노인으로 변한다.

  엘레나는 이 모든 것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며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변한 자기 모습에도 힘들어 하지만, 무엇보다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을 못 견뎌해서 결국 막스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막스는 포기하지 못한다.

  에온을 매개로 수명을 합법적(!)으로 거래하면 비용이 많이 드니, 법의 테두리 밖에서 수명을 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조직이 생겨난다. (이건 뭐 암표 거래도 아니고 암수명 거래인가...)  막스는 그 불법적인 조직과 접촉해서 엘레나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 한다.

  그런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잃어버린 38년의 수명을 다시 받아야 하는데, 아무나 데려다가 수명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장기 기증처럼 수명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유전자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엘레나의 38년짜리 수명을 가져간 사람, 즉 엘레나와 유전자가 맞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에온의 회장 조피다...!  막스는 조피를 납치해 엘레나와 함께 불법 조직에게 가서, 조피가 엘레나에게서 받아간 38년의 수명을 다시 엘레나에게 돌려줄 생각을 한다.

  그래서 20대로 회춘한(!) 조피를 납치했는데...  뜻밖에도 납치당한 여자는 자기가 조피가 아니라 조피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그 여자의 말을 믿어야 할 지 말 지, 그리고 정말 조피의 딸이라면 풀어줘야 할 지 말지를 두고 부부가 여러 차례 입씨름을 벌이는데... 

 

  인간 수명 매매를 반대하는 테러 조직 '아담' 이 이들을 급습하여 붙잡는다.

  아담은 이 부부가 겪은 일에 숨겨진 비밀을 폭로한다.  막스와 엘레나는 조피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린 것이다.  엘레나의 수명 38년을 조피가 받은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조피는 자기에게 수명을 줄 수 있는 사람, 즉 자기와 유전자가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오랫동안 찾아헤매었고 마침내 엘레나를 찾아냈다.  그래서 이온의 일류 영업직 직원인 막스를 엘레나에게 보내 수명을 팔도록 설득하게 했으나(단, 막스는 조피의 의도를 몰랐고 평소 하는 영업활동이라고만 생각했음.),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고 엉뚱하게도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그러자 조피는 두 사람이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도록 유도해서 엘레나의 수명 38년을 담보로 제공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의 경호팀에게 화재를 내게 하고 엘레나의 잘못으로 몰아서 엘레나의 수명을 빼앗아간 것이다. (즉, 조피의 회사 에온은 은행과 경찰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

 

 

  조피의 음모를 안 후 막스와 엘레나의 태도가 뒤집힌다.

 

  먼저 막스...

  원래 인간의 수명을 사고 파는 일을 중개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니만큼, 아내 엘레나만큼 도덕심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라며 납치도 감행하고 불법 조직과 거래할 생각도 한다.  자기가 납치한 여자가 조피가 아니라 조피의 딸이라도 조피와 유전자가 비슷해서 엘레나에게 수명을 주는 게 가능할테고, 조피의 딸은 나중에 자기 어머니인 조피에게서 다시 수명을 받으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막스는 엘레나와 다르게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소 무리한 수단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네 부부가 조피의 음모에 걸려든 것을 알고서 갑자기 개과천선한다.  자기가 당연시 했던 일, 즉 영화 초반부에서처럼 아직 소년티 벗지 못한 18세의 젊은이에게 가족을 위해 15년의 수명을 팔라고 설득했던 일, 당사자의 동의만 받는다면(그 동의가 진정에서 나온 것이든 주위 상황에 떠밀려 나온 것이든) 수명을 사고 파는 일도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엘레나에게 조피의 딸을 풀어주자고 말한다. (사실 막스가 개과천선한 부분은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함.)

 

  그리고 엘레나...

  엘레나는 처음부터 조피를 납치해서 강제로 38년의 수명을 되돌려받는 일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데 납치된 여자가 조피도 아니고 조피의 딸이라니 더욱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남편을 설득해 조피의 딸을 풀어주려고 했다.  영화 앞부분에서 막스는 의사인 엘레나가 시립병원에서 봉사활동에 가깝게 낮은 임금만 받고 일한다고 말했다.  물론 과장 섞인 말이기는 하겠지만,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엘레나가 돈벌이보다는 사명감 차원에서 의사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도덕적인 엘레나로서는, 아무리 자신이 70대의 노인이 된 일이 절망스러워도 남을 해쳐가면서까지 젊음을 되찾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엘레나가 갑작스레 닥친 비극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인 것에는, 든 게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38년의 수명을 은행 담보로 내놓으라는 은행 직원의 제안에 동의한 것도 자기의 안일함 때문이고, 경찰 수사 결과 자기가 촛불을 제대로 안 꺼서 아파트에 불이 났다고 했으니 그 일도 자기의 부주의함 때문이고...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조피의 치밀한 음모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태도가 확 바뀐다.  자기가 음모의 희생자라는 사실에 큰 충격과 분노를 느끼며 이제는 자기가 앞장 서서 조피의 딸에게서 수명을 받으려 하고, 자기를 말리는 남편에게 화를 내다 못해 협박까지 한다.

 

 

  

  영화는 씁쓸하면서 열린 결말로 끝난다.

 

  먼저 조피의 딸...

  조피의 딸은 엘레나에게 수명을 빼앗긴 채 조피에게로 돌아가, 전에 엘레나가 그러했듯이 힘들어하며 점차 늙어간다.  자기를 달래는 조피를 붙잡고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서 수명을 받으면 된다고 했어요." 라고 한다.  아마 엄마가 하나 남은 자식인 자기에게(딸이 하나 더 있었으나 희귀병으로 사망했음.) 기꺼이 수명을 줄 것이라 여긴 것 같다.  하지만 조피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딸과 유전자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아볼테니 그때까지 견디라고 한다.

  딸이 납치당했을 때는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가며 애타게 딸을 찾으려 했지만, 막상 돌아온 딸이 수명과 젊음을 달라고 부탁하자 거절한 것이다.  씁쓸하지만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조피가 인간의 수명을 사고 파는 일을 한다는 것만 봐도, 그리고 엘레나의 수명을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일을 봐도, 조피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그리고 엘레나...

  다시 젊어진 엘레나가 임신하여 배가 부른 채 바닷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바다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장면을 보고 젊음을 되찾은 후 막스에게 돌아가 재결합하여 임신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다가와 키스하는 남자는 막스가 아니다.

  좀 뜻밖이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막스와 서로 사랑하여 결혼했고, 막스가 조피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막스와의 만남 자체가 조피가 기획한 음모라는 것을 안 이상, 그 험난한 일을 겪은 후에 다시 막스와 합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스는 잘못이 없더라도 막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막스...

  이 부분이 가장 의외이며 이 영화의 개연성 구멍을 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산위에서 엘레나와 엘레나의 새 연인(또는 새 남편)을 내려다보던 막스가 일행인 듯한 사람들과 차를 타고 떠난다.  그 사람들은 아담의 조직원이다.  한때 인간 수명 매매를 중개하는 일을 했던 막스가, 이제는 인간 수명 매매를 막기 위해 테러까지 감행하는 아담에 가담한 것이다...!

  막스가 일련의 일로 자기가 당연시했던 과거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것과 별도로 조피의 딸을 풀어주자 했던 부분에서부터 내 머리 속에 물음표가 몇 개씩 떠올랐다.  그 상황에서 조피의 딸을 풀어주자는 것은 엘레나의 젊음을 되찾는 것을 포기하자는 소리 밖에 안 되니까.  자신은 전혀 몰랐다지만 엘레나가 수명을 빼앗기는 데에 자기가 한 몫 한 셈인데, 아담에 가담하든 엘레나와 같이 외딴 곳에 은둔하든, 하여튼 일단 엘레나의 수명부터 되찾으려 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 아닐까 싶은데...  

 

 

  

  이 포스트 앞머리에 썼듯이 개연성 측면에서는 구멍이 숭숭 나있지만 그래도 주제는 좋았다.

  이 영화에서는 수명, 나아가 젊음을 얼마나 누리느냐가 빈부에 따라 결정된다.  사실 지금도 그렇기는 하다.  부유층일수록 균형잡힌 음식을 섭취하고, 적당한 수준의 운동을 할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으며, 병이 났을 때 보다 빨리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살더라도 부유층이 빈곤층보다 더 오래, 더 젋게 살 수 있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는 그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마침 지난 번 포스팅 한 일본 영화 '플랜 75'에서는 급속한 노령화 문제를 다루며, 빈곤한 노인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라는 압력에 받는 상황이 나왔다.  자연사가 자연사인 이유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맞는 죽음' 이기 때문일텐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을 권리도 사라진다.

  수명과 건강으로 대표되는 삶의 질도 빈부에 따라 결정되고, 죽음의 형태도 빈부에 따라 결정되고...  두 영화 속 상황이 마냥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뻥튀기(!)하는 방식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며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