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박지원(朴趾源)의 원조대경(元朝對鏡)

Lesley 2023. 1. 1. 00:01

  열하일기로 유명한 조선 시대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의 원조대경(元朝對鏡)을 소개하려 한다.

  원조대경은 '설날 아침에 거울을 본다' 는 뜻이다.  이 시에서 설날이란 우리 전통 설날인 음력 1월 1일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집은 특이하게 신정을 쇠니 이 블로그에는 신정을 기념하여 올리기로 했다.  

 

 


 元朝對鏡
(원조대경)
설날 아침 거울을 보며  
 


                                  - 朴趾源(박지원) -



 忽然添得數莖鬚
(홀연첨득수경수)
홀연히 몇 가닥 수염이 늘었건만


 全不可長六尺軀
(전불가장육척구) 
육척 키는 더는 자라지 않네.


 鏡裏容顔隨歲異
(경리용안수세이)
거울 속 얼굴은 세월 따라 달라지나


 稚心猶自去年吾
(치심유자거년오) 
유치한 마음은  작년의 나와 같구나.


 

  박지원은 우리가 '조선시대 선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박지원의 대표작으로 나왔던 책이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 다.  열하일기 자체는 읽은 적이 없지만 '축약본 + 평전' 형식으로 된 책은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책 속 박지원을 보면 확실히 근엄한 선비상과는 거리가 먼 장난꾸러기가 맞다.

 

  그런 박지원의 기질이 이 시에도 드러난다.

  보통의 경우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수염이 늘었네, 얼굴 모습이 변했네' 식으로 읊조리는 시에는, 자신이 어느새 이렇게 늙었는가 하는 씁쓸함과 처연함이 묻어난다.  그런데 웬걸, 이 시에는 얼핏 한탄이 나오는 듯하면서 사실은 '내가 이 나이 되어서도 이렇게 젊다니까...!' 하는 근자감(!)이 뚝뚝 흐른다.

 

  먼저 앞부분을 보면...

  '홀연히 몇 가닥 수염이 늘었건만 / 육척 키는 더는 자라지 않네.' 라고 나온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수염은 늘어날지 몰라도 키는 작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지원은 수염은 늘었는데 키는 '자라지 않네' 라고 말한다.  남들은 키가 쪼그라든다고 한숨 쉴 때 자기는 키가 오히려 자라지 않았다고 투덜댄다. ^^;;

  여담으로 박지원의 초상화를 보면 풍채가 무척 좋다.  초상화만 봐서는 키를 알 수 없지만, 초상화 속 느낌으로는 어깨도 떡 벌어지고 키도 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잖아도 남보다 한 덩치 하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 왜 키가 더 자라지 않느냐며 툴툴거리니, 남들이 보기에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뒷부분을 보면... 

  '거울 속 얼굴은 세월 따라 달라지나 / 유치한 마음은  작년의 나와 같구나.' 라고 한다.  얼굴이야 가는 세월 못 이겨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라고 우기고 있는 셈이다.  박지원이 요즘 사람이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라고 큰소리 쳤을 것이다.   

 

  친구가 이제는 한 살 더 먹는 게 무섭다며 설날이 반갑지 않다고 했다.

  나 역시 친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체통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던 조선시대 선비가 '그까짓 나이...!' 하고 호기롭게 외치는 것 같은 시를 읽고 나니, 나 역시 '에이, 나이 좀 들면 어때.' 라는 초연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