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의 고문(古文)

이규보(李奎報) 시문(22) - 치통(齒痛)

Lesley 2021. 7. 15. 00:01

  오래간만에 이규보의 시를 한 수 올린다.

  푹푹 찌는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시(폭염이 지겹다는 내용)가 있지 않을까 찾아 봤지만, 그런 시는 예전에 올려서 밑천(!)이 떨어졌다.  다른 것은 없을까 하고 뒤지던 중에 치통 관련한 시를 발견했다. (오, 이것도 딱이네~~!)

 

  작년 여름과 올해 봄을 치통으로 고생하며 보냈다.

  치과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치과 치료라는 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드릴 비슷한 기구로 치아를 갈 때 나는 소리와 느낌(공포의 그 느낌...!)도 싫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팔다리에 힘을 주게 되니, 치과 문을 나설 때면 이만 아픈 게 아니라 몸살이라도 앓은 듯 온몸이 피곤하다.

  무엇보다 이번 치통은 이전에 겪었던 것들보다 훨씬 심해서, 처음에는 이만 아프다가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되고 나중에는 눈알까지 아팠다.  전에는 치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이야기가 과장 섞인 말로 들렸는데, 처음으로 '아, 정말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치과 치료 받는 와중에 드는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치과라는 게 없던 시절, 사람들은 이가 아프면 어떻게 했을까?  덮어놓고 뽑거나 양잿물을 꼬챙이에 찍어 아픈 이에 바르는 무식한(!) 방법 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치과가 무섭네, 아프네, 어쩌네 해도 치과가 있는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고려시대 사람인 이규보 아저씨도 치통 때문에 무척 고생했던 모양이다.

  치통을 소재로 쓴 시를 남긴 것을 보니 말이다.   작년 여름 전에 이 시를 읽었더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겠지만, 치통 때문에 한밤중에 쩔쩔 매는 일을 겪고서 읽어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나마 나는 다음날이라도 치과에 가면 괜찮아 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이규보는 몇 날 며칠, 어쩌면 몇 달을 고생했을 것이다. 

 

 


    齒痛(치통)


                                     - 李奎報(이규보) -



人以食而生(인이식이생)  食必以其齒(식필이기치)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고, 먹으려면 반드시 이를 써야 하네.

齒痛莫加飧(치통막가찬)  天殆使我死(천태사아사)
치통이 심하여 먹지 못하니, 하늘이 나로 하여금 죽으라는 것인가.

剛折亦云經(강절역운경)  老豁更堪恥(노활갱감치)
강하면 꺾이는 것 또한 정해진 이치지만, 늙어 이가 빠지니 더욱 부끄럽네.

餘有幾箇存(여유기개존)  浮動根無寄(부동근무기)
남은 게 몇 개 있으나, 흔들려서 이뿌리가 붙어 있지 못 하네.

今者又復痛(금자우부통)  延及頭亦爾(연급두역이)
이제 다시 또 아파서, 머리까지 아파오네.

水寒不可飮(수한불가음)  湯亦不可試(탕역불가시)
차가운 물을 마실 수 없고, 뜨거운 물도 맛 볼 수 없네.

糜粥候冷熱(미죽후랭열)  然後僅能舐(연후근능지)
죽도 뜨거움을 식힌 후에야, 겨우 핥아 먹을 수 있다네.

矧可齕肉爲 (신가흘육위)  有肉空在杫(유육공재지)
하물며 고기인들 씹을 수 있으랴, 고기가 있어도 도마에 둘 뿐이네.

是實老所然(시실로소연)  有肉空在杫(유육공재지)
실로 늙었기 때문이니, 죽어야 비로소 끝나리.

 

 

  1~2연만 봐도 이규보의 치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먹어야 하는 법인데 이가 아파 먹지 못 하니 '하늘이 나로 하여금 죽으라는 것인가.' 라고 한탄한다.  치통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먹지도 못 하고 자지도 못 하면 '이러다가 정말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3~4연을 보면 당장 겪는 치통 말고도 치아 상태가 엉망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치아가 많이 빠져서 남은 게 별로 없는데, 그나마 잇몸에 단단히 박혀있지 못 하고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치과는 고사하고 치약이나 칫솔 같은 기본적인 양치질 도구도 없던 시절이다.  노년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중년만 되어도 이규보처럼 치아 상태가 처참했을 것이다.     

 

  5~8연을 보면 이규보에게 동지애(!)가 팍팍 느껴진다.

  치통이 계속되고 심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머리까지 아파진다는 것은, 나도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건 차가운대로 뜨거운 건 뜨거운대로 전부 치아에 자극이 되어,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 모두 마시기 힘들다는 부분도 공감 500%다...!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고기가 생겨봤자 치아가 그 모양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림의 떡마냥 도마 위에 얹어놓기만 하고 감히 먹을 엄두를 못 낸다. (이규보가 대단한 주당이라 평소 같으면 고기를 본 순간 냉큼 술안주로 삼았을 텐데... ^^;;) 

 

  마지막 9연은 1~2연에서 나온 한탄과 결을 같이 한다.

  앞에서 '하늘이 나로 하여금 죽으라는 것인가.' 라고 한탄했는데, 마지막에는 '실로 늙었기 때문이니, 죽어야 비로소 끝나리.' 라고 한다.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이가 아픈 게 늙은 탓이라는 한탄이기도 하고, 몇 번이나 반복하지만 치과가 없던 시절이니 치료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죽어야 끔찍한 치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체념이기도 할 것이다.

 

  치통, 그 자는 정말 무서운 자입니다... (현대에도 고려시대에도...!)

 

 

  뱀발

  - 이 시는 따로 제목이 없는 듯하다.  편의상 '치통' 이라고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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