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금강산댐' 과 '평화의 댐' 의 추억(?)

Lesley 2021. 11. 22. 00:01

  얼마 전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격동(!)의 1980년대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시작은,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활용 쓰레기 분리 수거' 였다.

  이왕 하는 분리 수거를 제대로 하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는지, 왜 이렇게 마구잡이로 버려서 분리 수거하는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많은지...  우리 아파트나 친구네 아파트나 분리 수거에 관한 안내 방송도 자주 하고 안내문을 여기저기 붙여놓기도 하건만, 여전히 자기 멋대로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흥분한 친구 왈, "이런 거 보면 정치하는 놈들만 욕할 게 아니야.  국민들이 개돼지니까 정치하는 놈들도 개돼지 같은 것들만 있지!" ^^;;)

 

  분리 수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세대의 학창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폐휴지 수집' 으로 옮겨갔다.

  다행히 요즘 학생들은 이런 것을 안 하는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내내 두 달에 한 번씩 무거운 폐휴지를 들고 다녔다.  어깨에 무거운 책가방 매고서 폐휴지 뭉치, 실내화 가방, 도시락통(고등학교 때는 도시락통도 두 개... ㅠ.ㅠ), 거기에 미술 수업 든 날은 미술도구 든 보조 가방까지 들어야 했다.  무슨 조선시대 보부상도 아니고 전쟁 나서 떠나가는 피난민도 아니고, 참...    

  집집마다 신문 구독하던 시절이라 신문만 잔뜩 가져오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러면 기준 무게(2킬로였나, 3킬로였나?) 미달로 다음 날 한 번 더 폐휴지를 들고가야 했다.  대신 엄마들이 보는 여성잡지(여성동아니 여성중앙이니 하는 것들)는 요즘 말로 짱이었다.  빳빳한 칼라 광고지가 많기 때문에 부피에 비해 무게가 꽤 나가서, 여성잡지 한 권에 다른 종이를 약간 합쳐 가져가면 기준 무게를 간단히 넘길 수 있었다. (여자 선생님들은 학생이 들고 온 여성잡지를 점심시간에 열심히 읽기도... ^^;;)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 방향이 바뀌었다.

  폐휴지 수집에 대해 말하던 친구가 "그때는 몰랐는데 담임부터 교감이나 교장까지 층층이 폐휴지 빼돌려서 팔았을 것 같지 않냐?" 라고 음모론(!)을 제기했다.  나는 반박했다.  "그건 아닐 걸.  그 시대 교사들이 깨끗해서가 아니라, 교사들도 교장이나 교육청한테 폐휴지 할당량 채우라고 들볶여서 스트레스 받았을 텐데 빼돌릴 게 어디 있어?"

 

  그러면서 스토리가 초등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갈취했던 사건으로 넘어갔으니, 바로 '평화의 댐' 관련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사기(!)였다.  북한이 금강산댐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안에 물을 가득 담았다가, 댐을 터뜨려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거라고 했다.  웬 군인 아저씨가 TV에 나와서 물에 잠긴 서울 모형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는데, 그 시절 완공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던 63빌딩만 물 위로 삐쭉 솟아있던 게 기억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절이라면 건축 분야 전문가들이 황당해 하면서 정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을 것이고, 국민들도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하며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은 커녕 케이블 TV조차 없고 공중파 방송 3개만 있던 때라, 정부에서 정보를 통제하며 여론을 선동하기 쉬웠다.  초등학생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 나라가 북한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찼다.

 

  곧 전국이 성금 모으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금강산댐에서 쏟아져 나올 물폭탄을 막기 위해 우리는 평화의 댐이라는 것을 건설해야 하는데, 그 건설 비용을 국고만으로 대기는 힘드니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산댐 수공설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별도로 하고, 이런 계획을 짜낸 사람의 머리는 정말 좋았던 것 같다.  군사독재정권 말기에 정권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떼돈까지 벌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일석이조다. (그런 좋은 머리를 좋은 쪽으로 쓰면 오죽 좋을까... -.-;;)  

  우리 학교에서는 성금으로 1,000원씩 냈다.  말이 좋아 자발적인 성금이지, 사실상 1인당 1,000원씩 의무적으로 할당받았다.  호빵이 100원이고 부라보콘이 15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코찔찔이 초등학생들에게는 꽤나 큰 돈이었다. (이때 낸 성금의 행방(?)을 고등학교 때에야 알고 열받아 죽는 줄 알았다는... ㅠ.ㅠ)

 

  친구는 평화의 댐 성금 덕분에 방송도 탔다고 한다.

  성금 모으기를 독려하느라, 학교나 직장 단위로 모은 성금을 방송국에 가져가면 성금 관련 특집 방송에 내보내줬다.  그런데 친구가 한 남학생과 학교 대표로 방송국에 가서 성금을 전달하는 장면이 생방송으로 나간 것이다.  마침 친구 엄마는 동네 정육점에 가셨다가 그곳의 TV를 보게 되셔서, 가족 중 유일하게 TV에 나온 친구를 본 분이 되셨다고 한다. (가문의 영광이로세~~ ^^;;)

  친구에게 "너 TV에 나오는데 다른 식구들은 몰랐단 말이야?" 라고 물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회장도 부회장도 아니라 원래대로라면 학교 대표로 방송국에 갈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 날 엄마가 직접 뜨개질로 만들어주신 스웨터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색깔도 산뜻한 노란색인데다가 털실로 예쁜 방울까지 만들어 달아서 고급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즉, 옷이 눈에 띄어서 선생님들이 '이왕 TV에 나오는 거, 예쁜 옷 입은 아이 보냅시다.' 라고 보낸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옷차림에 신경쓰며 사는 것이로구나... -.-;;) 

 

  평화의 댐을 짓는 이유가 금강산댐 때문이니, 당연히 금강산댐 건설을 규탄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금강산댐 규탄 포스터 그리기 정도는 무난한 편이었다.

  어차피 금강산댐 아니더라도 매년 6월이 되면 호국의 달이라고 해서 반공 포스터를 그렸으니, 그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게, 어째서 반공 포스터에 나오는 간첩들은 다 얼굴에 긴 흉터가 있고 그 시대에는 드물었던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을까...  마치 '나 간첩이요~~' 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

  그런데 이 순진한 초등학생에게 금강산댐 수공설은 너무 고차원적인 음모였던 것 같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엉뚱한 포스터를 그렸다가 담임선생님한테 불려가 혼났다.  금강산댐 수공설은 '북한이 금강산댐 안에 막대한 양의 물을 저장해놓았다가 일부러 댐을 터뜨려서 서울을 물에 잠기게 한다' 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나는 커다란 망치가 금강산댐을 때려부수는(!) 포스터를 그렸다. (담임선생님 왈, "금강산댐 무너지면 서울이 물바다 되는데 때려부수면 어쩌자는 거니?  너는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  매년 커다란 망치가 새빨간 사람 모형을 후려갈기는 모양으로 반공 포스터를 그렸던 탓에, 그때에도 당연히 커다란 망치가 뭔가 때리는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금강산댐 규탄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는 초등학생을 동원한 관제 시위였다.

  내 인생 최초의 시위를 대학생 때도 아니고 무려(!) 초등학교 때 경험한 것이다.  한 반에 50명이 넘었고 한 학년에 12반씩 있었으니, 우리 학교 학생만 3,600명이 넘었다.  그 많은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맨 앞 높은 단상에 올라간 전교 회장이 "북한 공산당은 금강산댐 건설 중지하라!" 할 때마다 오른팔 번쩍 들고 따라 외쳤다.  어린 마음에도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소리쳤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일 뿐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당시 철없는 학생들을 데리고 관제 시위를 벌이면서 선생님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생님들도 정말로 북한이 수공을 한다고 믿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결의를 보이기 위해 아이들이라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수공설은 믿더라도 어린애들 데리고 뭐 하는 짓인가 하며 안타까운 마음이었을까?  혹은 수공설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아무 말 못 하고 답답해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