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경의 추억
얼마 전에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다가 시력이 화제에 올랐다.
친구가 이제 초등학생인 딸이 시력이 뚝 떨어졌다며 아이에게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을 들으니, 내가 처음 안경을 썼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사실, 요즘은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조차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친구야 엄마 입장에서 안타까울 수 밖에 없겠지만, 이제는 초등학생이 안경 쓰는 것은 이야기거리도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초등학생이 안경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죽하면 '안경잽이' 란 별명이 다 있었을까... (사실은 '안경잡이' 가 표준어지만 그 때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부 '안경잽이' 라고 했으니, 80년대 분위기를 팍팍 내기 위해 그냥 안경잽이라고 하겠음. 응답하라, 1988...! ^^;;) 저학년 중에는 안경 쓰는 아이가 없다시피 했고, 고학년이 되어서야 한 반 50여 명 중에 겨우 서너 명이 안경을 썼다. 그런데 이 몸이 바로, 그 산삼보다도 보기 힘들다는 80년대 초등학교의 저학년 안경잽이었다...! (쾅쾅쾅쾅~~ ← BGM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봄방학이 끝나던 날, 즉 3학년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에 안경점에 가서 내 인생의 첫 번째 안경을 맞췄다.
그러니 나의 3학년 생활은 안경과 함께 시작한 셈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경 및 '근거없는 자부심'(!)과 함께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그 때는 안경 하나 쓴 것만으로 나라는 존재가 신분상승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 어른 중에서도 안경 쓴 사람이 비교적 적었던 시절인데 겨우 3학년짜리가 안경을 쓰고 다녔으니, 그야말로 이 한 몸에 시선집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는 수많은 아이 중 하나일 뿐이었던 내가,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학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반 선생님들도,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만난 친구 엄마들도, 여러 아이 중에서 나에게 먼저 관심을 보였다. 물론 안경의 후광(?) 때문이었다. 시력이 얼마냐고 묻고 그렇게 나쁘냐고 깜짝 놀라는 선생님 앞에서도, 언제부터 안경을 썼고 안경값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친구 엄마 앞에서도, 나의 자부심 지수는 10포인트씩 상승했다. ^^;;
어른들도 특이하게 생각하는 '어린 안경잽이' 였으니, 한창 호기심 넘치는 같은 또래 아이들은 오죽했겠나...
3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는 쉬는 시간마다 내 주위가 북적북적했다. 남학생과 여학생, 앞자리 학생과 뒷자리 학생, 모범생과 장난꾸러기를 막론하고 쉬는 시간 시작하기가 무섭게 내 주위로 열 명씩은 몰려왔던 듯하다.
안경 구경한다고 몰려든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이 어린 안경잽이는 부끄러워서 쩔쩔맸다. 원래도 숫기없는 성격인데 학년이 바뀌고 얼마 안 된 때라 아직 낯설기만 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어색한 나머지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괜히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어디까지나 한꺼번에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한 방어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뒤로 나는 '쉬는 시간에도 교과서 볼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느라 눈이 나빠져서 안경까지 쓴 아이' 가 되어버렸다. -.-;;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느낀 감정이 난처함과 수줍음만은 아니었다.
"와, 쟤는 안경도 썼어!" 하는 선망(!) 어린 시선과 "그 안경 딱 한 번만 써보자, 응?" 하는 애원(?)의 말 속에서, 가뜩이나 근거 없이 생겨났던 자부심은 아예 선민의식(?)으로 발전했다. 그깟 안경 한 번 쓰고 싶어서 애태우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나는 "안 돼, 안경점 아저씨가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지 말라고 했어." 라고 무정하게 거절했다.
안경점 아저씨(사장님)야 안경이 학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아이들이 돌아가며 안경을 써보다가 망가뜨리면 어쩌나 해서 그런 당부를 하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소심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오만하게 단호박(!)으로 거절했던 데에는, 안경점 사장님의 당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외에도, 가슴 한구석에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던 '나는 평범한 아이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다.' 라는 마음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안경잽이로서의 고귀한(!) 신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끝이 났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상급학교로 갈수록 안경 쓴 사람이 늘어나서 자연스레 안경잽이의 희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달라붙었던 안경잽이라는 별명도 중학교 입학 후로는 듣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때도 안경 쓴 아이가 적은 편이기는 했지만, 안경 쓴 것을 그 사람의 주요 특징으로 생각하며 별명을 붙일 정도로 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갔을 때는 한 반의 절반은 안경을 쓸 정도로 안경 쓴 이가 흔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오히려 안경 쓴 사람의 비율이 낮아졌다.
안경 착용의 불편함이나 미용적인 이유에서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거나 아예 라식, 라섹 등의 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몸은 워낙 겁이 많아서 라식이니 라섹이니 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여지껏 안경과 함께 살고 있다.
원래 눈이 좋아 안경을 안 쓰는 사람이나 일찌감치 라식.라섹 수슬을 받은 사람들은, 안경 쓰고 사는 게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곤 한다. 만일 제법 성장한 후에야 안경을 쓰게 되었다면 불편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찌감치 안경을 썼던 탓에 어느덧 안경 쓰고 산 세월이 안경 없이 산 세월보다 길어지기까지 해서, 이제는 안경이 내 몸의 일부처럼 생각될 정도이다. 굳이 불편함을 들라면, 겨울에 추운 외부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안경에 김이 서리는 정도랄까?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안경을 쓰며 살겠지만, 그래도 역시 안경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더 낫다.
젊은 엄마들, 멀쩡했던 아이들 시력이 떨어지는 건 순식간의 일입니다. 아이들 시력 검사 자주 해줍시다!
◎ '서문' 이란 성을 아시나요?
전에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뜻밖의 사실 하나를 알았다.
한국 성씨는 보통 김, 이, 박, 최 등 한 글자로 되어 있지만 간혹 두 글자로 된 성, 즉 복성도 있다. 복성을 가진 사람이 워낙 적어서 유치원 때는 '황보' 라는 성을 가진 남자애를 보고 우리 꼬맹이들이 "쟤는 왜 성이 두 글자야? 좀 이상하다."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희귀한 복성 중 황보, 선우, 독고, 남궁 등은 그나마 연예인의 이름(실명 뿐 아니라 예명 포함)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서문' 이라니... 우리나라에 서문이라는 성씨가 있다는 걸 이 나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사실은 성씨가 서문인 사람을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때는 서문이 그 사람 성씨라는 걸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서문다미' 라는 사람이다. 바로 위에서 성씨가 서문인 사람을 알고 있었다고 쓰기는 했지만,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알고 지냈다는 뜻은 아니다. 서문다미는 내가 만화를 한창 즐겨보던 고등학교 시절에 왕성히 활동했던 유명 만화가이다. 즉, 우리나라 대통령은 국민 개개인을 거의 모르지만 우리 국민들은 TV 뉴스를 통해 대통령을 아는 식으로, 그 만화가는 나를 전혀 모르지만 나는 만화팬 입장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아는 것 뿐이다. ^^;;
고등학교 때는 서문다미의 본명은 '서다미' 이고 서문다미는 필명이라고 추측했다.
그 무렵 '부모 양성 쓰기' 를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의 사연을 언론에서 접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서다미' 인 만화가가 어머니의 성인 '문' 을 아버지 성인 '서' 뒤에 붙여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정말이지, 서문이라는 복성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서문이라는 성을 안 후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 소설, 영화, 드라마에는 서문이란 성이 자주 등장하는 모양이다. 원래도 드문 복성 중에서도 유독 희귀해서 그런 걸까?
그나저나 뱀발 하나 붙이자면, 그 시절에 열심히 봤던 END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기억이 흐릿하기는 한데, 아마 내가 처음 봤던 서문다미의 만화가 END였을 것이다. 흥미진진하게 봤는데 그만 연재가 뚝 끊겨서리... END를 중단한 채 다른 만화를 연재하는 걸 보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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