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나라 망신시키는 해적판 책

Lesley 2017. 8. 20. 00:01


  지난 봄에 열심히 본 '은하철도 999' 의 후유증(?)으로 우주에 관심이 생겨서 대중 천문학 서적 몇 권을 읽었다.

  그런데 천문학이란 게 물리학과 관련이 깊어서 아무리 비전공자를 위한 쉬운 책이라고 해도 물리 이론에 관한 내용이 꼭 나온다.  거창하고 복잡한 공식까지는 아니더라도 물리 용어는 종종 나온다.

  문제는... 고등학교 시절에 수학보다 더 싫어했던 과목이 물리일 정도로, 나와 물리는 철천지 원수 사이라는 점이다. -.-;;  아무래도 쉬운 물리학 책을 구해 읽어 내공(!)을 앃은 후에 다시 천문학 책에 도전해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다.




  ◎ 예전에 나온 '재미있는 물리여행' 은 해적판이었다.


  그래서 발견한 책이 지난 7월에 출간되어 아직 따끈따끈한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원제 : THINKING Physics)' 이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물리와는 담 쌓고 살았던 나 같은 사람이나 모를 뿐이지 전부터 유명했던 책이다.  저자는 미국의 물리학 교수 '루이스 캐럴 앱스타인(Lewis Carroll Epstein)' 인데, 이미 1988년에 '재미있는 물리여행' 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2000년대 초반까지 물리에 관심 많은 고등학생과 성인들이 꾸준히 구입했다고 한다.  무려 100만부 넘게 판매되었고 절판된 후에도 따로 이 책을 제본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라고 한다.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책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이 쓴 리뷰를 찾아봤다.  과연 많은 이들이 블로그나 카페 등에 호평을 남긴 걸로 보아 좋은 책이 맞는 듯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여러 리뷰 틈바구니에서 올해 봄에 나온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문화일보에서 2017년 4월 12일에 내놓은 기사다.  대중과학서 '재미있는 물리여행'.. 美저자 "한국판은 해적판" 분노?(http://v.media.daum.net/v/20170412144039342) 

  기사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1988년에 나온 '재미있는 물리여행' 은 해적판이다.  작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연락했더니, 저자가 해적판 문제로 화가 잔뜩 나서 한국 출판사와는 절대로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출판계약을 맺었다. 

  어쩐지...  책소개란에도 책에 둘러진 띠지에도 굳이 '정식 한국어판' 이라고 땅땅 박아놓아서 좀 유별나다 싶었다.  과거에 해적판을 내놓은 건 분명히 다른 출판사인데, 엉뚱하게도 이번에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 를 출간한 출판사가 저자의 분노를 뒤집어쓰고 출판계약 맺는 과정에서 고생했다.  그래서 '우리 출판사 책은 절대로 해적판이 아닙니다!' 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 저지른 사람 따로 대가 치르는 사람 따로... -.-;;)


  '재미있는 물리여행' 이 1980년대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해적판이라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시절의 우리나라에서는 저작권의 개념조차 희박해서 만화나 소설부터 시작해서 대학 전공서적까지 온통 해적판이었으니까.  그리고 1996년에야 국제 저작권 협정인 '베른 조약' 이 우리나라에서 발효되었기 때문에, 1996년 전에는 외국 작가의 책을 무단으로 번역해서 판매해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 없다고 해서 도덕적으로도 문제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님...!)




  ◎ 나라 망신까지 시키는 해적판


  그런데 문제의 출판사는 '재미있는 물리여행' 의 해적판을 베른 조약이 발효된 1996년 이후에도 계속 판매했다. -.-;;

  저자 루이스 캐럴 앱스타인은 자신의 책이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팔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1990년대 후반에 미국 고위 공직자들에게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그러자 저자는 자기 책에 그 탄원서를 수록했다...!

  아직도 영미권에서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재미있는 물리여행' 영문판에 "우리는 한국의 오랜 친구를 지키기 위해 북한과의 핵 결전에 직면해 있는데 한국 친구들은 우리의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물리 여행은) 해적판으로 진행 중인 범죄(crime in progress)이다." 등의 문구가 들어간 탄원서를 두 페이지에 걸쳐 수록한 것이다.  나라 망신도 이런 나라 망신이 없다.  가난한 나라라면야 돈이 없어 그랬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제법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 저작권을 깡그리 무시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난 셈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너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의 출판사 측에서 해명이랍시고 한 말이 아주 가관이다.


  먼저 1996년 전에 해적판을 출간한 것에 관하여 "해외 저작권자 입장에서는 부당한 처사이겠지만 불법은 아니었다." 라고 했다.

  베른 조약 발효 전에는 해적판을 출간하는 일이 도덕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불법행위는 아니었다고, 위에서 이미 설명했다.  영세한 출판사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3위권에 든다는 유명한 출판사에서 이 무슨 얄미운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법으로만 따지면 불법은 아니었다고 하니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베른 조약이 발효된 1996년 후에도 계속해서 해적판을 판매한 것에 관하여 "법적으로 저작권 계약 없이 출간할 수 있었지만 정식 계약을 위해 (미국 측) 출판사인 인사이트 프레스(Insight Press)에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취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라고 했다.

  이건 정말 너무 한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저자와 털끝 만큼도 관련 없는 나조차 뒷목 잡게 만드는 명언(?)이다.

  이 발언을 이해하려면 미리 알아야 할 게 있다.  위의 문화일보 기사에 따르면, 베른 조약 발효 후에도 우리나라의 출판업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1996년 1월 전에 나온 해적판 책은 계속 출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2000년 이후에는 저작권자가 청구할 경우 보상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즉, 이 상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제의 출판사는 계속해서 해적판 책을 합.법.적.으.로 판매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하려고 미국 출판사에 연락을 했는데, 미국 출판사가 아무런 답변도 안 해서 해적판 책을 어.쩔.수.없.이. 팔았다는 것이다. -.-;;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비판글을 보자.

  이 글의 작성자는 과거에 모 출판사에서 근무했고 지금도 도서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글에서 문화일보 기사를 보충하는 여러 내용들을 언급하며 문제의 출판사의 해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 국가 망신을 자초한 김영사의 저작권 사기, 그대로 둘 것인가?(http://1boon.kakao.com/ppss/590079d5ed94d200016d64eb)


  먼저, 문제의 출판사가 정식 출판계약을 하려고 미국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신을 못 받아서 해적판 책을 계속 판매했다는 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내가 어떤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이메일을 보내서 답변을 받지 못했으나 내가 우리는 결혼했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과 같은 범죄행위다."  말 그대로 촌철살인이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 같다.


  다음으로 문화일보 기사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을 지적하고 있는데, 다 읽고나면 정말 황당해진다.

  2005년판 '재미있는 물리여행' 에 수록된 저작권 관련 글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L. 엡스타인, S.휴이트와의 저작권 계약에 의해 김영사에 있습니다.  신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위의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문구가 실린 페이지의 이미지를 볼 수 있음.) 

  문제의 출판사는 분명히, 자신들이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으려 미국 출판사에 연락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 해서 저작권 계약을 못 했다고 말했다.  저작권 계약을 못 했는데 어떻게 저작권이 자기네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나?  내가 홍길동이란 사람에게 '당신 아파트에서 살고 싶으니 우리 전세계약 맺읍시다.' 라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홍길동은 아무런 답장을 안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홍길동의 아파트에 들어가 살 권리가 생긴단 말인가? 

  그리고 자기네도 남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해적판을 출간했으면서 남들에게는 그 해적판의 무단전재나 무단복제를 금지한다니, 이건 또 무슨 경우인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이쯤 되면 저작권 계약을 하려고 미국 출판사에 연락을 했다는 말도 사실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문제의 2005년도판 '재미있는 물리여행' 이 84쇄(!)나 찍어낸 스테디셀러라는 점도 기가 막히다.

  위의 링크에 나온 이미지를 보면 1988년에 1쇄를 찍고 2005년까지 84쇄를 냈다.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 의 책소개란에 의하면 '재미있는 물리여행' 이 100만권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이렇게 많이 팔린 책인데도 저자에게는 인세가 지급되지 않았으니, 저자가 독기(!) 품고서 자기 책에 한국인의 지적 재산권 인식 수준을 비난하는 탄원서를 수록한 것도 이해가 된다.

  위에서 '2000년부터는 저작권자가 청구할 경우에는 해적판 책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고 했다.  하지만 앞뒤 상황을 보면 저자에게는 보상금 지급이 안 된 것 같다.  만일 저자에게 해적판에 대한 보상금을 충분히 지급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더라면, 영문판에 한국의 저작권에 대한 탄원서가 실려있을 리가 없다.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 을 펴낸 출판사가 작년에 저자에게 연락했을 때, 저자가 한국 출판사와는 절대로 계약 안 한다며 화를 냈을 리도 없고... 




  ◎ 예전에 나온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도 해적판이었다.


  꽤 오래 전에 일본 역사학자가 쓴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이 작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이란 조금 다른 제목으로 새로 출간되었다.  전에 나온 책도 갖고 있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작년에 새로 나온 책도 구입해서 다시 읽어봤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읽은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가 해적판이었다. (아, 진짜...!  이쪽도 저쪽도 다들 왜 이러셔...! ㅠ.ㅠ)


  '재미있는 물리여행' 한국어판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알고나니 자연스레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가 떠올랐다.

  혹시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에도 자기네에게 저작권 문구가 있다고 뻔뻔스럽게 박아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있는 2002년판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를 펼쳐서 확인해봤는데 다행히 그런 문구는 없다.

  대신 '저자와의 협약에 따라 인지는 생략했습니다' 라는 문구가 박혀있다. -.-;;  물론 대놓고 자기들에게 저작권이 있다고 뻥(!)을 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이쪽도 저자의 허락 없이 해적판을 냈으면서 무슨 저자와의 협약 운운하는 건지...


  내가 소장하고 있는 해적판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2002년도판이 개정판 9쇄다.

  그 전에 초판으로 몇 번을 찍고 다시 개정판을 9쇄까지 찍었을 정도로 잘 팔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저작권자인 일본 학자와 일본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자기네 책의 해적판이 잘 팔리는 걸 보면서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정식 판권계약을 맺어 작년에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일본 출판사가 까다롭게 굴었다는데, 어쩌면 이쪽도 ' 재미있는 물리여행' 의 저자 만큼이나 악감정이 쌓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지요?


  과거에 나온 해적판 전부를 싸잡아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저자의 허락 없이 멋대로 책을 만들어 파는 건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과거에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고 많은 사람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 했다.  그런 시대 사람들에게,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불을 넘네 마네 대학 졸업자가 길바닥에 넘쳐흘러서 문제네 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해적판 책이 돌아다니는 건 심한 일이 아닐까?

  '재미있는 물리여행' 의 출판사가 저작권 계약에 의해 저작권이 자기네에게 있노라는 문구를 책에 넣었던 때가 2005년이다.  그리고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 에 저자와의 합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던 때가 2002년이다.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해적판을 너그럽게 봐줄 정도로 가난하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낮아 저작권 개념이 없다시피 한 상태는 분명히 아니지 않나?


  지금이라도 달라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라지자.




  뱀발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 는 결국 안 사기로 했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호평 일색인 좋은 책이지만, 내가 찾는 '물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책' 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이들의 리뷰를 보니 고등학교 물리 교과서 내용을 알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한다.  이런,  책소개에 과학고, 영재학교 학생들이 찾는 책 어쩌구 저쩌구 써놓은 걸 그저 홍보문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로 나 같은 물리학 바보가 읽을 책이 아니었다. ㅠ.ㅠ  혹시라도 'NEW 재미있는 물리여행' 를 매우 쉬운 물리 교양서로 생각하고 구입하려는 분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참고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