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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수필 '인연' 과 '유순이'

Lesley 2017. 8. 13. 00:01


  피천득이 유명한 수필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피천득의 수필을 읽었다.

  알고 보니 피천득은 전업 작가가 아니라 영문학자이며 대학 교수이기도 했다.  피천득의 수필 중 '동전 한 닢' 이나 '인연' 등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있다는데 배운 기억이 전혀 없다.  아마 나의 학창시절 전이나 후에 교과서에 실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국어시간에 꾸벅꾸벅 졸며 들어서 기억 못 하는 건지도... ^^;;)

  사실은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 중 제일 싫어했던 장르가 수필이다.  소설이나 시는 읽으면서 재미나 감동을 느꼈지만, 어째서인지 수필은 무미건조하거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어떤 때는 설명문이나 논설문보다도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을 보니 수필에 대해 그 동안 갖고 있던 편견이 무너졌다. (BGM : 와르르~~~ ← 편견 무너지는 소리).


  수필집 '인연' 에 실린 많은 작품 중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두 편만 소개하려 한다.

  공교롭게도 피천득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1910년에 출생했다.  이 포스트에서 소개할 두 수필 모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이 수필집과 이름이 같은 '인연' 인데, 전혀 드라마틱한 내용이 아니건만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아련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유순이' 인데, 타국에서 알게된 동포 사이의 끈끈한 동질감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인연


  '인연' 에서 피천득은, 자신과 일본 여성 '아사코' 사이의 인연을 회상한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인 피천득과 일본인 아사코 사이의 인연을 그린 작품이건만, 의외로 민족 간의 갈등 같은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피천득이 청소년 시절 처음 만나 중년이 될 때까지 알았고, 만나지 못 하게 된 후로도 두고두고 기억했던 아사코란 인물이 그저 우연히 일본인이었을 뿐이다.... 이런 느낌이랄까?

 

  피천득은 17살 되던 해에 아사코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 해 피천득은 일본 동경에 가서 누군가의 소개로 '미우라' 라는 사회교육가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에는 미우라 선생 부부와 딸 아사코 등 세 식구만 단촐히 살고 있었다.  아사코는 소학교 1학년짜리 아이였는데 피천득을 친오빠처럼 따랐다.


  아사코가 꽃병에 담아서 피천득 책상에 올려놓았다는 스위트피란 꽃, 그런 꽃이 있다는 걸 '인연' 을 읽고서야 알았다.

  피천득이 스위트피를 아사코 같은 꽃이라고 표현했기에 어떤 꽃인가 하여 인터넷을 찾아봤다.  '인연' 속 어린 아사코의 사랑스런 이미지에 어울리는 예쁜 꽃이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꽃말이 '기쁨, 가련함, 나를 기억해 주세요' 라니 참 얄궂다.  피천득에게 아사코는 처음에는 '기쁨' 이었고 마지막 만남에서는 '가련함' 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사코가 '나를 기억해 주세요' 라는 뜻으로 스위트피를 줬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피천득은 일생 동안 아사코를 기억했다.  피천득이 스위트피의 꽃말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스위트피란 꽃은 이 작품에서 복선이 되는 셈이다.


  피천득이 미우라 선생네를 떠나게 되었을 때 피천득과 아사코는 이별 선물을 주고 받았다.

  피천득은 안데르센 동화책을 줬다.  아사코는 자신의 반지와 손수건을 주고 피천득의 뺨에 뽀뽀까지 해줬다.  옆에서 미우라 부인이 웃으며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에요." 라고 했는데, 그저 농담인 그 말에도 피천득은 얼굴을 붉혔다.  그 후로 피천득은 소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볼 때면 으레 아사코를 생각했다.


  십수 년이 지나 피천득이 다시 동경에 가게 되었을 때 아사코와 두 번째로 만났다. 

  소학교 1학년 꼬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학교 3학년 숙녀로 변해 있었다.  피천득은 아사코를 대하며 좀 서먹함을 느꼈다. 아마도 자신의 기억 속에는 앙증맞은 아이로 남아 있던 아사코가 현실에서는 성숙한 여자로 변한 게 낯설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사코가 다니는 학교로 가서 산책을 했다. (참고로, 아사코는 소학교도 대학교도 전부 성심여학원 소속 학교를 다녔음.)  피천득은 어린 아사코가 소학교 신발장 안에서 자기 실내화를 꺼내 보여줬던 일을 떠올리며, 아사코의 신발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사코는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더니 신발을 그대로 신고서 교실에 들어간다고 대답했다.  피천득으로서는 사소하지만 따뜻했던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코는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 기억 못 하고 '대학교에서는 원래 실내화를 안 신는데?' 하며 의아해 했던 것 같다.


  산책을 마친 두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의 새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비록 피천득이 어른이 된 아사코에게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고, 피천득과 아사코가 기억하는 추억의 양이 달라 예전처럼 스스럼없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만남도 좋은 만남이었다.  옛날처럼 함께 아사코의 학교로 가서 산책도 했고, 피천득과 아사코 모두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버지니아 울프의 최신작에 대해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다정히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으니, 이 정도면 옛날 추억을 해치지 않는 즐거운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 다시 십여 년이 지나 일본은 패전했고 한국은 독립했다.

  피천득은 문득 아사코가 떠오를 때면 불길한 상상을 하곤 했다.  아사코도 결혼을 했을 텐데 혹시나 전쟁 중에 잘못 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아사코의 남편이 전사하지는 않았을까... 


  1954년에 피천득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일본 동경에 들려 미우라 선생네를 다시 찾았다.

  미우라 선생 부부는 피천득을 반갑게 맞으며 아사코의 소식을 알려줬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일을 하다가 그 곳에서 만난 2세(미국 등 해외로 이민가서 사는 일본인의 후손.) 출신의 미군 장교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피천득은 아사코가 죽거나 과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또 다른 불안감을 느꼈다.  하필이면 2세와 결혼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피천득은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원래 패전국 국민과 승전국 군인 사이는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그 패전국의 혈통을 지닌 승전국 군인과 결혼하다니 상황이 더욱 미묘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피천득은 미우라 부인과 같이 아사코의 집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아사코네 집은, 예전에 피천득이 아사코에게 이별 선물로 줬던 안데르센 동화책 표지에 나오는 집과 비슷해 보였다.  나중에 그런 예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어리고 귀여운 아사코가 오빠처럼 따르던 피천득에게 말했었다.  피천득은 전쟁이 십 년 정도 일찍 터져 한국이 일찍 독립했더라면 두 사람이 정말로 함께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아사코를 만나 자신의 불안감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아사코의 남편은 점령군 장교라는 걸 뽐내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과의 결혼 생활 속에서 아사코는 아직 한창 나이인데도 시들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이 껄끄러워서 그랬던지, 두 사람은 헤어지면서 전처럼 악수를 나누지 못 했다.  두 사람의 세 번째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은 서로 절만 몇 번씩 하는 딱딱한 예의 속에서 끝났다.  


  피천득은 아사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느꼈던 복잡미묘한 감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아사코는 처음 만날 때 겨우 소학교 1학년이었고, 수십 년 간 알았다지만 실제로는 겨우 세 번 만났던 사람이다.  피천득이 그런 아사코에게 연정을 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사코를 오래도록 잊지 못 했고 마지막 만남은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오랫동안 따스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했던 것이 허물어지는 걸 보고 느낀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 유순이


  '유순이' 는 피천득이 중국 상해에서 유학할 때 만난 따뜻하면서도 당찬 동포 여인과의 사연을 담고 있다.


  대학생이었던 피천득이 몸이 안 좋아 상해 교외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선인 간호부를 만났다.  이역만리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법인데 하물며 동포를 만나다니, 피천득은 무척 기뻐했다.  오죽하면 그 간호부가 피천득의 병실로 처음 찾아왔을 때 가져다 준 토스트와 주스가 너무 맛있어서, 그 후로 어떤 레스토랑에서도 그렇게 맛있는 토스트와 주스는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다.  병원 음식이라는 게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의외의 장소에서 동포를 만난 반가움이 너무 커서 맛없는 병원 음식조차 최고급 음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간호부 역시 동포 환자를 친근하게 대했다.  틈날 때마다 피천득의 병실로 찾아가서 자기 고향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면, 성경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타고르가 쓴 '기탄잘리' 를 읽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피천득이 퇴원한 후에(퇴원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해사변이 터졌다.

  상해사변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본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국제사회의 비난과 방해를 우려해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릴 의도로 일으킨 사건이다.  서구 열강의 조계지가 있던 상해에서 고의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걸 빌미로 상해를 침략한 것이다.

  그 때가 겨울방학 기간이라 대부분의 학생은 집으로 돌아갔고 피천득과 몇몇 유학생만 기숙사에 남아있었다.  피천득은 간호부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지만 전시상황이다 보니 그만 전화가 끊겨버렸다.  피천득은 대포 소리를 들으며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간호부가 총에 맞았거나 불타는 병원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새벽이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간호부에게 가기로 했다.

  학교를 나설 때만 해도 인적이 없었는데 걷다보니 피난 떠나는 많은 중국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피천득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는 없고 반대편에서 피천득 쪽으로 오는 사람만 많았다.  즉, 피천득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져 사람들이 떠나버린 지역으로 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버스도 전차도 운행하지 않아 계속 걸어야 했는데, 인파 속에서 피천득은 문득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거리를 가득 채운 피난민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을 일본인으로 오해한다면 그 자리에서 맞아죽게 될 거라는 공포감이었다.  자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을 보고, 누군가가 자신을 일본인이라 여기고 노렸다가 엉뚱한 사람을 맞춘 것으로 생각하며 급히 몸을 피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이 총을 휘두르며 달려들 때는 일본어를 아는데도 겁에 질려 아무 말 못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겨우 간호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간호부는 피천득의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 어떻게 왔느냐고 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라, 결혼한 남녀라도 한밤중에 단둘이 있을 때가 아니면 감히 손을 잡지 못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남녀가 손을 잡았다.  단단히 뿌리박힌 인습도 잊을 만큼 당시 상황이 너무 다급했으며, 죽음의 위기 속에서 만난 동포가 피붙이나 오랜 친구처럼 너무 반가워 그랬을 것이다.

  피천득이 위험천만한 곳에 간 이유는 당연히 간호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함이었겠지만, 간호부는 거절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피천득은 간호부의 맑은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뒤의 일은 작품 속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 피천득은 한 인간으로서나 한 직업인으로서나 자신의 도리를 다 하겠다는 간호부를 더는 채근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그 사람이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며 몇 번씩 뒤돌아보며 떠났을 것이다.


  피천득은 상해사변으로 귀국한 후에 춘원(이광수)을 만났다.

  춘원은 자기 소설 '흙' 의 여주인공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피천득은 상해에서 만난 간호부를 떠올리며 '유순' 이란 이름으로 하라고 권했다.  이 작품에서 내내 '간호부' 라는 직업명 혹은 '그' 라는 대명사로만 나왔던 사람의 이름이 마지막 대목에서야 밝혀진 것이다.  덩달아 '흙' 의 여주인공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나 하는 사연까지 밝혀졌다.


  이 작품은 그 간호부가 아직 살아있는지 가끔씩 생각한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그 문장으로 보아, 피천득과 유순이란 이름의 간호부는 두 번 다시 못 만났던 듯하다.  전투가 벌어진 도시에서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고 말했던 심지 굳은 간호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살아남아 조국이 해방되는 날을 맞이했을까...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왔을까...




  ◎ 뱀발


  '인연' 의 도입부에 성심여자대학교 이야기가 나온다.

  피천득은 4월에 춘천에 있는 성심여대에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갔다는 문장으로 '인연' 을 시작한다.  한때 피천득은 성심여대로 출강한 적이 있다.  번거로운 원거리 출강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아사코가 일본의 성심여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사코의 모교와 이름이 같은 한국의 성심여대를 특별하게 느낀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성심여대가 춘천에 있다는 대목에서 어리둥절해졌다.

  성심여대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학교이다.  1995년에 가톨릭대학교에 통합되어 가톨릭대학교 성심캠퍼스가 되었다.  '인연' 을 읽으면서 '아, 맞다!  전에 성심여대란 학교가 있었지!' 라고 겨우 기억해냈을 정도로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학교다.  그런데 분명히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학교였는데 웬 강원도 춘천?  혹시 내가 아는 성심여대와 피천득이 말한 성심여대가 동명이인...이 아니고 동명이교(?)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성심여대는 원래 춘천에 있었다고 한다.  훗날 부천에 분교를 냈다가, 1980년대에 춘천 본교 부지를 매각하고 부천 분교로 통합했다. (마치 지점이 본점을 접수해버린 것 같은 상황...)


  그런데 성심여대에 대해 검색하면서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한국 성심여대와 일본 성심여대는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게 아니다.

  두 학교 모두 성심수녀회라는 가톨릭 단체 소속인데, 성심수녀회는 세계 여러 나라에 동일한 이름으로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즉, 이 나라 저 나라의 성심학교가 자매학교인 셈이다.  일본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과정을 갖춘 경우도 있고, 미국처럼 대학교는 없고 초중등 과정만 둔 경우도 있으며, 홍콩이나 대만처럼 중등과정만 있는 경우도 있다.

  한국, 일본, 홍콩, 대만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교명으로 모두 성심(聖心)을 쓴다. (당연히 각 나라의 언어에 따라 발음은 다름.)  그리고 미국 등 영어권 지역에서는 성심과 같은 뜻인 Sacred Heart 를 교명으로 쓴다.


  그리고 초등학교 과정을 제외하면 거의 여학교로 운영되는데, 평범한 여학교가 아니라 귀족학교 비슷한 곳이라고 한다.

  일본의 성심여대(세이신여대) 졸업생 중에는 일본 왕족이나 정재계 유명인사와 결혼한 사람이 여러 명 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유명 가수 '레이디 가가' 나 사교계의 말썽꾸러기 '패리스 힐튼' 도 미국의 Sacred Heart 출신이라고 한다.  다만, 미국의 Sacred Heart 학교는 19곳(!)이나 있어서 두 사람이 같은 학교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

  음...  여지껏 성심여대를 재정난 겪다가 다른 학교에 흡수된 비운의 학교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전세계에 걸친 상류층 아가씨들의 학교라니 후덜덜한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