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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랑의 '등나무집' - 2 : 북한 김정남의 외가 식구들

Lesley 2017. 4. 3. 00:01

 

 

  지난 2월에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되었다.

  북한의 비협조 및 훼방작전으로 수사가 난항을 겪었지만,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자 김정남의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이 사건의 유력한 배후인물로 추정된다. (가능성 99.99%...!)  아버지의 권력을 계승하는데 성공한 이복동생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이복형을 없애버리다니, 그야말로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이다.  

 

  이번 일로 오래간만에 성혜랑이 쓴 수기 '등나무집' 을 펼쳐봤다.

  2008년에 이 책에 대해 포스팅 한 적이 있다.  ☞ 성혜랑의 '등나무집' - 1(http://blog.daum.net/jha7791/14963562)  다만 그 포스트는 '살짝 맛보기' 수준이었고 나중에 본문에 대해 제대로 포스팅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만 흐지부지되었다. (이런 식으로 묻혀버린 포스트가 가끔씩 나옴. ^^;;)

  그런데 이번에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보니 '등나무집' 속에 나오는 김정남의 사연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서 무려 9년만에 등나무집에 대해 다시 포스팅하기로 했다.

 

 

앞줄은 김정일과 어린 김정남.

뒷줄은 성혜랑과 딸(이남옥)과 아들(이한영).

 

 

  김정남의 특수한 출생 및 성장 환경에 대해 알려면 먼저 김정남의 친척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런데 김정남의 친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할아버지이고 김정일이 아버지라는 한 문장으로 모든 게 설명됨...!)  그러니 여기에서는 김정남 생모인 성혜림의 가계, 즉 김정남의 외가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원래 남한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북한 외가 식구들에 대해 알아야, 김정남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정남의 외가 1세대

 

 

  1. 외할아버지 성유경(1905년~1982년)

 

  외할아버지 성유경은 경상북도 창녕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다.

  생가는 따로 있지만 아들이 없던 종가에 양자로 들어가 3대 독자 겸 종손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보수적인 시대에, 손이 귀한 양반 가문의 종손이라는 상황까지 맞물려, 집안 어른들의 명령으로 14살에 결혼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참을 수 없어서 17살에 가출해 서울로 가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유명한 사회주의자의 강연을 듣고 좌익사상을 갖게 되었다.

  27살에 그 시대에는 무척 드물었던 여기자 김원주와 새로 결혼해서 성일기(김정남의 외삼촌), 성혜랑(김정남의 이모이며 '등나무집' 의 저자), 성혜림(김정남의 생모) 3남매를 두게 되었다.  8.15 해방 후에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는데,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로 6.25 전쟁을 맞았다.

 

  6.25 발발 후 그 전에 월북했던 아내 김원주의 뒤를 이어 월북했다.

  하지만 휴전하고 몇 년이 지나자 북한에서는 김일성 1인 독재 및 우상화 정책이 심화되면서, 김일성 일파를 제외한 다른 파벌에 대해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숙청당한 파벌이 남한 출신으로 이루어진 남로당 계열이다.

  성유경은 남로당 출신이라는 점에, 공산주의에서 타도 대상으로 삼는 대지주 출신이라는 점, 누구에게든 할 소리 다 하는 성격으로 인해 윗사람과 다투는 일까지 더해져서,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휴전 직후만 해도 육류 콤비나트(고기 가공공장) 부지배인이라는 안정된 지위에 있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안 좋은 지위로 밀려났다.  결국에는 우마차 사업소에서 소여물을 끓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부침을 겪다가, 결국 일을 그만 두고 큰딸 성혜랑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성혜랑은 남편을 일찍 잃고 작가가 되었는데, 외부 일로 바쁜 딸 대신 외손주들을 돌보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김정일의 집에 들어가, 홀로 외롭게 살았다.

  노년에 병석에 누웠을 때 오랫동안 못 본 작은딸 성혜림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성혜림은 이미 바깥 세상 사람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없는 처지라, 같은 평양 하늘 아래에서 지내면서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성혜림을 보지 못 한 채 사망했다.

 

 

  2. 외할머니 김원주(1907년~ 1994년)

 

  외할머니 김원주는 평안남도 진남포(지금의 '남포')의 빈농 집안 출신이다.

  원래도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아버지가 일찍부터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처자식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하지만 본인이 공부를 무척 잘 하기도 했고, 또 어머니가 그 시대 사람으로는 상당히 깨어있던 사람이라 아들을 제쳐놓고 총명한 딸의 공부를 뒷바라지 해줬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명문학교인 평여고(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다만, 여러 사정상 일본의 대학이 아닌 잠사학교, 즉 방직공장의 간부를 키워내는 학교에서 공부했음.)

  그 후 서울의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어머니와 오빠 가족을 부양하다가, 26살 때 성유경과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아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교육을 받고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부부의 성장 환경이 너무나 달랐던 탓에 부부 관계가 돈독하지는 못 했다.  큰딸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서 부모의 원만하지 못 한 관계를 계급 차이(지주와 빈농) 및 지역감정(경상도와 평안도)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당시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중이었고 자식들도 중학생 또는 초등학생일 정도로 어렸는데도, 가족을 전부 서울에 남겨둔 채 월북한 것이다.  그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결코 평범한 아내나 어머니는 아니었던 셈이다.  김원주의 아버지는 첩살림을 하면서 10살도 안 된 본처 소생 아들(김원주의 작은오빠)을 사실상 죽여버렸고, 김원주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사회활동을 독려했는데, 이런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시절 대부분의 여자처럼 남편 수발과 자녀 양육을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월북 후에는 북한에서 가장 권위있는 신문인 노동신문의 간부로 일했다.  하지만 김원주도 숙청당한 남로당의 일원이었던데다가 남편 성유경이 좌천되는 여파까지 겹쳐서, 차츰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노동신문사에서 그보다 못 한 평양신문사로 옮기게 되었다가, 결국에는 권고사직당했다.

 

  훗날 작은딸 성혜림이 김정남을 낳자, 김정일의 집으로 들어가 김정남을 양육하며 노년기를 보냈다.

  두 딸과 손주들이 김정일의 그늘 아래에서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리지만 세상과 격리되어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걱정했다.  오죽하면 작은딸 성혜림을 따라 해외로 나가게 된 큰딸 성혜랑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절대로 북한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을 정도다.  큰딸이 어머니 장례를 치르겠다며 북한으로 돌아오면 두 번 다시 북한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될 수 있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귀국한 성혜랑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의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김정남의 외가 2세대

 

 

  1. 외삼촌 성일기(1933년~2017년 현재 생존해 있음.)

 

  외삼촌 성일기는 성유경-김원주 부부의 3남매 중 맏이이며, 이 가족 중 유일하게 남한에서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사실 성유경-김원주 부부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일기를 낳았다.  성유경은 14살에 결혼한 유부남이었는데 구시대 여성인 아내에게 정을 못 붙였던 듯하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신여성인 김원주와 재혼하겠다며 단식투쟁까지 했지만, 양반이라는 긍지가 대단하고 법도를 중요시 했던 집안 어른들은 조강지처를 내치고 가난한 농사꾼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성씨 집안의 반대와 불륜이라는 사회적 비난을 피해 일본으로 도피해서 살다가 성일기를 낳았다.  하지만 보수적인 시절에 4대 독자의 존재감과 중요성은 엄청났다.  손이 귀한 나머지 3대에 걸쳐 독자로, 그것도 양자를 들여가며 억지로 명맥을 있던 창녕 성씨 가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양자가 아니라 친자인 종손이 태어난 것이다.  성일기를 낳은 일로 김원주는 성유경 집안의 인정을 받고 성유경과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성일기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여동생들에 앞서 어머니 김원주를 찾아 월북했다.

  월북할 때에는 북한에서 학업을 계속해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명령으로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17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 남파되었다.  그러다가 체포된 후 전향하여 가족 중 혼자만 남한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1980년대 남한으로 온 조카 이한영(큰여동생 성혜랑의 아들로 본명은 '이일남' 인데 월남한 후에는 이한영이란 이름을 썼음.)과 만났고, 1995년에는 무려 47년만에 큰여동생 성혜랑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재회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에 의하면, 작은여동생 성혜림과는 전화통화만 몇 번 한 상태에서 성혜림이 사망하여 결국 만나지 못 했다고 한다.

 

 

  2. 이모 성혜랑(1935년~2017년 현재 생존해 있음.)

 

  이모 성혜랑은 성유경-김원주 부부의 3남매 중 둘째인데, 1996년에 북한을 탈출한 일로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서울에서 이화여중 재학 중에 6.25를 맞았고, 동생 성혜림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가 하면 과학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나중에 모스크바종합대학 유학생 출신인 이태순과 결혼하여 아들(이일남.  남한으로 내려온 후에는 '이한영' 이란 이름을 썼음.)과 딸(이남옥)을 낳았다.  하지만 남편 이태순은 젊은 나이에 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에는 잠시 작가 활동을 하며 정식으로 등단하기도 했다.

 

  나중에 동생 성혜림이 낳은 김정남의 가정교사로 뽑혀서, 딸을 데리고 김정일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실력있는 가정교사로 김정일에게 인정받으며 좋은 대우를 받았고, 김정남의 유학 및 성혜림의 요양 때문에 북한의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꾸는 해외여행이나 해외체류를 여러 번 했다.  또한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정일 곁에서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북한 사람은 접하기 힘들고 접하다가 들키면 큰 처벌을 받는 남한의 TV프로그램 및 책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등나무집' 에는 성혜랑의 어머니 김원주가 김정일의 집에서 대하소설 '토지' 를 읽고, 딸 성혜랑에게 토지의 작가 박경리를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부분이 나옴.)

  하지만 물질적으로 호강하는 것과는 별도로,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채 살아야 하는 상황에 힘들어 했다.  더구나 아들이 월남하는가 하면(다만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서 아들이 남한의 정보당국에 납치된 것으로 보고 있음.), 딸마저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못 견디고 서방으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두 자식이 모두 탈북한 일로 어려서부터 키웠던 조카 김정남과도 심한 갈등을 겪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김정남이 이모 성혜랑에게 다시 다정한 태도를 보였을 때, 성혜랑은 이미 탈북을 결심한 후였음.) 

 

  결국 성혜림은 먼저 탈출한 딸과 의논해서 1996년에 서방으로 탈출했다.

  현재는 유럽의 모 국가(일부 언론에 의하면 프랑스라고 함.)에서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탈북하고 몇 년 후 '소식을 전합니다' 와 '등나무집' 을 남한에서 출간했다.  '소식을 전합니다' 는 6.25 때 월북하거나 납북된 각계 인사들의 소식을 알려주는 수기이고, '등나무집' 은 남한 출신인 자기 가족이 북한에서 약 50년 간 겪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엮은 수기이다.

  

 

  3. 어머니 성혜림(1937년~2002년)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은 성유경-김원주 부부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가 발발했을 때 서울의 풍문여중에 재학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이미 월북해 있던 어머니 김원주도 서울로 돌아왔고, 나중에 북한군이 후퇴할 때 언니 성혜랑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월북했다.

 

  성혜림은 언니 성혜랑보다도 먼저 겨우 19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평양예술학교에 재학 중이던 성혜림이 지나치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학교 근처 북한 간부 사택가에서까지 유명해졌다.  그래서 월북작가이자 조소문화협회 위원장 겸 작가동맹 위원장인 이기영 집안에서 성혜림을 큰며느리감으로 점찍게 되었다.  다만 '등나무집' 에 의하면, 이 결혼은 성혜림 본인이나 부모의 뜻이라기보다는, 당시 북한의 문학계나 외교계에서 위상이 높던 이기영 집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 했던 탓이 큰 것 같다.

  어쨌거나 이기영의 큰아들과 결혼해서 살다가, 그 무렵 새로 생긴 평양연극영화대학으로 진학해서 영화배우가 되었다.  친정어머니 김원주가 딸을 결혼시킬 때 결혼 후에도 계속 학교를 다니게 한다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이기영 집안에서도 며느리의 대학 진학을 반대하지는 못 했다.  이후 성혜림은 여러 영화에서 주연도 맡고 해외 영화제에 참석해 북한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등 유명해졌다.

 

  그런데 유부녀 상태로 그만 김정일과 엮이게 되었다.

  김정일은 이기영의 둘째아들과 고중(남한의 고등학교에 해당함.) 시절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친구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친구의 형수이며 자신보다 4살(혹은 5살) 연상인 성혜림을 보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미 호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게다가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이 북한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무렵이 성혜림이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때여서, 더욱 쉽게 가까워졌던 것 같다.

  결국 김정일은 딸까지 낳고 살던 성혜림을 이혼시키고 살림을 차렸다. (몇몇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기영은 며느리 성혜림을 김정일에게 빼앗긴 충격으로 절필했다고 함.)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김정남이 태어났다.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서, 동생 성혜림이 김정일을 뿌리치지 못 한 것을 친정 식구들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남한 출신에, 남로당 출신에, 대지주 출신이라는, 그야말로 북한에서 사는 데 불리한 조건은 다 갖춘 친정 식구들을 위해서 자기 한몸 희생했다는 것이다.

 

  김정일과 함께 살게된 후 성혜림의 인생은 불행해졌다.

  김정일의 장남을 낳았다고는 해도 성혜림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했다.  일단, 당시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던 김일성 몰래 김정일과 동거하며 김정남을 낳았으니, 언제 들킬까 항상 불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정남이 3살 되던 해 김정일은 김일성이 정해준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는 호사를 누린다고 해도 세상에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라 집안에 갇혀 살아야 했다.  게다가 김정일은 독재자의 후계자답게 여러 여자를 전전했다.

  결국 성혜림은 언제 아들 김정남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갇혀 지내는 스트레스 때문에 심한 신경쇠약에 걸렸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 김정남을 친정 어머니와 언니에게 맡긴 채 수시로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요양 생활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던 피붙이들이 줄줄이 탈북하는 일을 겪었다.

  먼저 언니 성혜랑의 아들 딸인 이한영(이일남)과 이남옥이 차례로 사라지더니, 결국에는 언니마저 떠났다.  1996년에 성혜랑이 탈북했을 때 동생 성혜림도 함께 탈북했다는 오보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성혜림은 스위스 제네바에 남았다.

  '등나무집' 에서는 성혜림이 언니의 탈북 계획을 알고 만류하는 듯한 말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하고, 성혜랑이 동생에게 같이 탈북하자고 권유했던 게 은근슬쩍 드러나기도 한다.  어쩌면 성혜림도 탈북을 원했지만 아들 김정남의 입장을 생각해서 포기했던 건지도 모른다.  김정남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김정일에게 무척 귀여움을 받았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김정일의 애정과 관심을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종사촌인 이한영과 이남옥이 모두 탈북하면서 김정일 앞에서 더욱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게다가 이모인 성혜랑이 탈북하면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될텐데, 생모인 성혜림까지 탈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2002년에 성혜림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비정상적인 생활을 함께 견디던 어머니 김원주는 이미 사망했고 언니 성혜랑은 탈북해버린 뒤였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외롭게 죽은 것이다.  김정남 피살 사건 후 언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성혜림의 시신은 북한에 묻히지 못 하고 모스크바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 김정남의 외가 3세대

 

 

  1. 이종사촌 형 이일남(월남 후에는 '이한영' 으로 개명함.)(1960년~1997년)

 

  이일남은 성혜랑의 아들이며, 김정남에게는 이종사촌 형이 된다.

  이일남의 여동생 이남옥은 평양에 있는 김정일의 집에서든 유학지인 스위스 제네바에서든 간에, 어쨌거나 어머니 성혜랑과 함께 지냈다.  하지만 이일남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기숙사 생활 또는 해외유학 생활을 했다.  '등나무집' 에는 성혜랑이 직접 보살피지 못 한 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러다가 1982년, 유학을 하느라 머물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월남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월남 이유는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북한 여권으로는 미국에 갈 수가 없기 때문' 이다.  그래서 자기 발로 제네바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남한행을 타진했고,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의 도움으로 남한에 정착하면서 북한의 눈을 피하느라 '이한영' 으로 개명하고 성형수술까지 받았다.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방송국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업 실패로 곤란한 처지가 되자, 1996년에 자신과 김정일의 관계 및 김정일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이라는 수기를 출간했다.  이 책이 큰 화제가 되고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해 말에는 모스크바의 집(성혜랑-성혜림 자매가 모스크바에 체류할 때 쓰는 집)으로 전화를 해서 어머니 성혜랑과 14년 만에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인 1997년에 북한에서 파견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괴한이 쏜 총에 살해되었다.  책이나 각종 매체를 통해 김정일의 사생활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서 아들이 남한 측에 납치되었다고 쓰고 있다.

  사실 성혜랑이 회상하는 이한영이 제네바에서 사라지던 날의 행적을 읽어보면, 자진 월남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 여권으로는 미국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월남했다는 것은 곧이 곧대로 믿기에는 너무 황당하다.  또한 이한영의 수기에도 자신을 남한에 데려온 남한 측 외교관이 자신을 속였다며 원망하는 대목이 슬쩍 나온다. (이 대목을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 인용했음.)

  그러니 이한영이 납치되었다는 성혜랑의 주장도 일리 있어 보인다.  '등나무집' 을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나 역시 자진 월남설보다는 납치설이 더 설득력 있다고 여겼다.   ☞ 성혜랑의 '등나무집' - 1(http://blog.daum.net/jha7791/14963562)  하지만 지금에 와서 '등나무집' 을 다시 읽어 보니 납치라기 보다는 '부추김에 의한 자진 월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단, 이한영은 주도면밀하거나 심지가 굳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한영에게 우리 정부가 지급한 정착금이 상당한 액수였는데도 물쓰듯 하고 자꾸 다시 손을 벌려서, 이한영을 담당했던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직원들이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사를 여러 건 읽었다.  또한 사업 실패로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언론에 출연해서 대놓고 김정일의 사생활을 알리는 무모한 일을 하기도 했다.  이한영이 남한에 와서 만났던 외삼촌 성일기는 훗날 인터뷰에서, 조카 이한영에게 언론에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이한영이 말을 듣지 않아서 북한 공작원에게 당했다고 한탄했다.

  납치설을 주장하는 어머니 성혜랑도 '등나무집' 에, 아들이 착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할 뿐 몇 살 아래의 여동생 이남옥만큼 속이 깊지 못 해서 걱정이라고 썼다.  실제로 어머니는 아들을 제대로 봤다.  이한영이 모스크바에 머물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만 봐도, 현실적이거나 조심성 있는 성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십수 년 만에 겨우 연락이 닿은 어머니에게 돈이 없어지니 주위의 친구들도 다 떠난다고 하소연하는가 하면, 북한의 약수(아마 평양의 고위 인사들이나 마실 수 있는 고급 약수인 듯함.)를 남한에 가져다가 팔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이한영의 성격을 보았을 때, 한창 나이에 제약이 심한 생활에 지친 나머지 충동적으로 월남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에 잠깐 가보고 싶어서 월남했다는 말은 너무 황당해서 그대로 믿기 힘들다.  내 추측은 다음과 같다.  제네바에 주재하고 있던 남한 외교관들이 '매의 눈'(!)으로 살펴보니, 20대 초반의 이한영이 여러가지로 허술해 보여서 슬쩍 옆구리를 찔러봤을 것이다.  그러자 이한영이 원래도 신중하게 앞뒤 따져가며 생각하는 성격도 아닌데, 특수한 상황에서 생활한 탓에 세상물정에 어둡기까지 해서, 덥썩 월남을 결정했던 게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임!)

 

  성혜랑은 생사조차 몰랐던 아들 이한영과 연락이 닿은 후 탈북하게 되었다.

  아들에 이어 나중에는 딸까지 탈북했는데, 딸은 혼자서도 앞가림 잘 하며 지냈지만 아들은 남한 생활에 제대로 적응 못 하는 모습을 보이며 어머니에게 어려움을 토로했다.  게다가 아들이 어머니에게 연락하게 된 데에 남한 쪽 정보기관의 개입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아들을 도와야 한다는 절박감도 있었다. (사실은 남한 정보기관보다는 모자간의 통화를 도청해서 신문에 대서특필했던 모 언론사가 더 큰 문제였지만, 성혜랑은 그 일을 나중에야 알았음.)

  하지만 탈북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탈북의 이유였던 아들을 만나지는 못 했다.  성혜랑이 탈북하고 유럽의 모처에서 망명절차를 밟으며 대기하는 사이, 아들 이한영이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성혜랑은 '등나무집' 에서 이한영이 북한 김정일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걸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증거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살인범은 북한에서 파견한 공작원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추측일 뿐이지만, 성혜랑도 아들이 북한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걸 알면서, 북한에 남은 동생 성혜림과 조카 김정남의 안위를 위해 아들의 죽음이 김정일과 무관하다고 기술한 게 아닐까...  아들이 죽은 건 원통하지만 기왕에 죽은 아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신의 탈북으로 궁지에 몰린 동생과 조카라도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김정일의 편을 드는 식으로 글을 썼던 게 아닐까...

  '등나무집' 을 읽다 보면, 자기 식구들의 연이은 탈북 때문에 성혜림- 김정남 모자가 겪게 될 불이익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려는 절박감이 느껴진다.  즉, 성혜랑은 김정일이 '등나무집' 을 읽을 수 있다고 전제하고, 성혜림과 김정남은 결코 김정일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잘 보살펴 달라고 직간접적으로 호소한 것 같다.

 

  2. 이종사촌 누나 이남옥(1966년~2017년 3월 현재 생존해있음.)

 

  이남옥은 성혜랑의 딸이며 김정남의 사촌누나이기도 하다.

  '등나무집' 에 의하면, 이남옥은 어린 시절부터 오빠 이일남은 물론이고 어머니 성혜랑보다도 상황판단이 빠르고 신중한 성품이었다.  또한 김정남과 함께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외국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고 한다.  성혜랑은 이런 딸을 믿음직하게 여기면서도, 딸이 자기 능력을 펼치지 못 하고 새장 속 새처럼 살아야 하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

 

  이남옥은 어머니 성혜랑을 따라 10대 초반에 김정일의 집에 들어갔다. 

  세상과 격리되어 또래 아이들과 교류없이 자란 김정남에게, 이남옥은 친구 겸 누나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집에서 김정남은 나이로는 가장 어리지만 신분(!)은 김정일 다음으로 높아서, 자신보다 5살 많은 이종사촌 누나 이남옥을 '남옥아' 나 '너' 라고 불렀다.

  그래도 특수한 환경에서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우애가 좋았던 듯하다.  김정남이 피살된 후의 언론 보도를 보면, 이남옥은 북한을 탈출한 후에도 김정남과 페이스북 등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남옥은 대학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성혜랑 역시 딸을 제네바종합대학에 넣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남옥이 대학 진학을 생각하던 1989년에는, 1987년에 있었던 대한항공 폭파 사건으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깡패국가로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  북한 대사가 나서서 각서까지 썼지만, 제네바종합대학 측에서는 북한 출신인 이남옥에게 입학 허가를 주지 않고 청강만을 허락했다.

  그나마 그 청강 수업조차 김정일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이남옥과 같이 제네바에 머물며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던 김정남이 학업을 중단하고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자, 북한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김정남의 말동무나 해주라고 함께 북한으로 소환된 것이다. (김정남의 학업 중단에는, 그 무렵에야 에이즈라는 병을 알게 된 김정남 외가 식구들의 공포감도 한몫 했음.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던 김정남이 무서운 에이즈에 걸릴 수도 있으니, 차라리 북한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임.) 

 

  성혜랑은 학업을 중단하게 된 딸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 평범하게 사는 방법은 결혼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을 결혼시키려고 한동안 열을 올렸지만, 차츰 김정일의 속셈을 알게 되었다.  김정일은 이남옥이 결혼하더라도 자기 집 울타리 바깥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남옥과 결혼하는 남자를 성혜랑 가족처럼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즉, 이남옥이 결혼해봤자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못 하고, 오히려 갇혀 살 사람만 한 명 더 늘어나는 것이다.

 

  결국 이남옥은 자신의 오빠가 월남한 지 10년째 되는 1992년에, 오빠처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탈북했다.

  성혜랑은 아들의 실종은 남한 정보당국의 납치 때문이라고 의심했지만, 딸의 실종은 자진 탈북이라고 받아들였다.  일단 이남옥이 사라지면서 김정일과 김정남 앞으로 편지를 남기기까지 했으니 자의로 탈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유 말고도 성혜랑이 딸의 탈북을 쉽게 납득할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이 무렵에는 성혜랑도 점점 악화되는 북한 상황에 희망을 잃고, 어쩌면 평생 갇혀 살아야 하는 딸에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울 때였다.  그래서 딸의 앞날을 위해 차라리 딸이 북한을 떠난 걸 다행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남옥의 짐이 제네바에서 평양으로 전해져 이남옥의 탈북이 전해진 날, 성혜랑은 일기에 딸의 탈북을 응원하는 듯한 글을 쓰기까지 했다.

 

  이남옥은 어머니 성혜랑이 탈북할 때 직접 현장에 가서 도왔다.

  탈북한 이남옥이 몇 년 후에 모스크바에 있는 이모 성혜림의 집으로 전화를 해 통화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성혜랑은 딸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을 반가워 했을 뿐 딸을 따라 탈북할 생각까지는 안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한의 아들에게까지 연락을 받게되자 탈북을 결심했다.  1996년에 성혜랑은 이남옥과 이남옥이 망명한 국가(언론 보도에 의하면 프랑스로 추정됨.)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 제네바를 통해 탈출했다. 

 

 

  3. 이부누나 이옥돌(?~?)

 

  이옥돌은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이 전 남편(이기영의 큰아들 이평)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등나무집' 에는 이옥돌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저 '혜림의 딸' 이라고만 나올 뿐이며, 이옥돌에 대한 분량도 매우 짧다.  그리고 이옥돌이 이부동생인 김정남과 왕래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다.  아마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었더라도 만나거나 연락한 적은 없었을 거라 생각된다. 

 

  성혜림이 김정일과 동거생활을 시작했을 때 이옥돌은 13살이었다.

  김정일이 성혜림을 데려가 살림을 차리면서 성혜림의 전 남편 식구 모두가 타격을 입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이옥돌은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아직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생이별을 했으니 말이다.

  '등나무집' 에 의하면, 이옥돌은 집안 식구 누구도 엄마의 행방에 대해 속시원히 말해주지 않자 이모 성혜랑의 집을 찾아오곤 했다. (성혜랑이 아직 김정일 집에 들어가기 전의 이야기임.)  하지만 김정일이 성혜림과 동거하는 것은 극비라 성혜랑도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 엄마는 3호청사(남한에 침투할 공작원을 키워내는 기관)에 뽑혀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13살이란 나이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니라, 이옥돌은 그런 어설픈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분노와 서러움을 터뜨리곤 했다.

 

  반 페이지도 안 되는 이옥돌 분량 중에 내복에 얽힌 안타까운 사연이 나온다.

  성혜림이 만날 수 없는 딸에게 전해달라고 언니 성혜랑에게 내복을 맡겼던 모양이다.  성혜랑이 그 내복을 전해주려 찾아갔지만 이옥돌은 저 멀리서 이모를 보자마자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혜랑이 그 내복을 '혜림이가 준 내복' 이라고 쓰지 않고 '혜림이가 벗어놓고 간 내복' 이라고 써서 눈길을 끈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첫번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에게 옷을 사준다고 하면 김정일이 싫어할 게 뻔해서, 성혜림이 자기 옷인 것처럼 사서 입고 언니네 집에 가서 벗어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번째는, 애초에 딸의 몫으로 내복을 사기는 했는데, 딸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처지라 자신의 체온이라도 전해주고픈 마음에 일부러 그 내복을 입었다가 벗어줬다는 추측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성혜랑의 '등나무집' - 1(http://blog.daum.net/jha7791/14963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