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 - 희대의 정치 스캔들이 만들어 낸 베스트셀러

Lesley 2017. 1. 5. 00:01

 

 

 

 

 

 

 

 

  작년 11월에 청와대 연설 담당 비서관 출신인 '강원국' 이 쓴 '대통령의 글쓰기' 를 읽었다.

  그런데 이번 포스트는 책 내용 보다는 이 책이 뒤늦게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사연 쪽에 방점을 찍고 써보려 한다.  이 책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덕분(?)에, 출간되고 2년 8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설사 알았다고 한들 굳이 사서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글쓰기 쪽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및 인간으로서의 면모 쪽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꽤 괜찮은 책이다.  읽지 않고 지나칠 뻔한 좋은 책을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읽은 셈이니, 최순실 게이트 관련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지 어떤 건지... -.-;;

 

 

 

 

 

  ◎ 뻔한 장삿속에서 나왔다고 오해했던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직후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것을 보고 오해했다.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을 때 오바마 관련 책이 줄줄이 나왔다.  그리고 반기문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자 역시 반기문 관련 책이 주르르 쏟아졌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BGM : 아기공룡 둘리 주제곡 -.-;;) 단기간의 트렌드에 편승해 돈벌이 좀 해보자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최순실 게이트는 '국가 업무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없는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어보고 수정했다.' 라는 사실에서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을 소재로 한 이 책이 별안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도 오바마나 반기문 관련 책처럼, 큰 이슈가 터진 시기에 맞추어 후딱후딱 만들어 내놓은 책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국가적 위기이며 불행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을 돈벌이에 이용하다니, 아무리 돈이 최고인 시대라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인 2014년 2월에 출간된 것이다. ^^;;

  출간 당시에는 글쓰기나 정치 쪽에 특별히 관심 많은 사람이나 사서 보는 책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연설문 관련한 일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다른 대통령들의 연설문을 소재로 한 이 책이 뒤늦게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관련 기사에 의하면, 교보문고에서 10월 24일(최순실이 대통령 연설문을 받아 보고 수정했다는 게 보도된 날짜)을 기점으로 열흘 동안 판매된 이 책의 수량이 그 전 열흘에 비해 무려 76.6배(!)가 늘었다고 한다. (오타라고 오해할 사람을 위해 다시 한 번 확인해두는데, 분명히 76.6배임.)  그 밖의 다른 서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 하니, 말 그대로 날개 돋힌 듯 팔린 셈이다.

 

 

 

  ◎ 좋은 글쓰기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 - 독서와 생각


  이 책에는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관, 인생관,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 읽더라도 흥미롭게 생각할 만한 책이다.  유명 정치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실린 연재 기사를 읽는 기분이랄까? ^^

  하지만 이 포스트에서는 연설문에 관해서만, 그것도 짤막하게 언급하려 한다.  이 포스트는 어디까지나 현직 대통령의 연설문이 일개 민간인 손에 누더기(!)가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쓸 생각이니까.

 

  저자는 글을 잘 쓰기 위한 조건을 설명하면서,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구양수의 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든다.

  구양수는 글을 잘 쓰려면 삼다(三多)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삼다란 다독(多讀 : 많이 읽기), 다작(多作 : 많이 쓰기), 다상량(多商量 : 많이 헤아리기, 즉 많이 생각하기)을 말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독서, 사색, 토론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구양수가 말한 다작이란 결국 글쓰기 그 자체니 일단 제외하도록 하자.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토론은 사색을 확인하는 과정(혹은 사색의 실전 모의고사형? ^^)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색에 포함시키도록 하자.  그렇다면 글을 잘 쓰기 위한 전제조건을 독서와 생각(사색) 두 가지로 좁힐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각을 많이 하라' 는 말은 덮어놓고 아무 생각이나 많이 하라는 게 아닐 것이다.  앞에 나온 조건인 독서와 연결해서, 자신이 읽은 책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라는 뜻일 것이다.  즉, 책에 쓰여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독서가 아니라, 저자의 관점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기도 하고 책의 내용을 다른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기도 하는 능동적인 독서를 말한다.


  두 전직 대통령은 모두 책벌레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미 대단한 독서가였고, 오랜 세월 동안 독서로 얻은 많은 지식을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했다.  대통령이 되어 공무로 바쁜 중에도 가급적 짬을 내어 책을 읽으려 했다.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는 경우에는 요약본이라도 챙겨 읽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서관실에서 보고한 책의 요약본을 읽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예 리더십비서관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면서까지 리더십비서관이 보고하는 각종 책, 논문, 칼럼 등의 요약본을 읽었다.

 

  다만, 두 전직 대통령의 독서 패턴은 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전에 심취하며 정독을 선호했던데 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을 즐기며 속독을 했다.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이런 차이는 두 사람의 세대차이 및 독서 환경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단, 김 전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 출생자로 대통령이 될 당시 이미 70대였고, 노 전 대통령은 해방 후 출생자로 대통령이 될 당시 50대였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는 점이 책을 고르는 취향에도 반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은 오랜 투옥 생활 및 연금 생활로 본의 아니게 독서할 시간이 넉넉했다.  그런 환경이 책을 찬찬히 읽는 버릇을 낳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은 바쁜 변호사 생활 중에 시간을 쪼개가며 독서를 했기 때문에 속독하는 습관을 들였을 것이다.  


  최순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난 후 재평가(?) 받고 있는 전 국회의원 전여옥이 2012년에 지금의 대통령에 대해 한 말이 있다.

  "박 비대위원장(당시에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었음.)이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서재에 가보면 책이 일단 별로 없었다." / "(그나마 있는 책들도) 통일성이 없고 증정 받은 책들이 있더라." 

  전여옥이란 인물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의 말들을 전여옥이 지금의 대통령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전여옥의 증언이 없었더라도, 평소 보도되는 대통령의 말을 듣거나 읽어 보면 '아, 이 사람은 책이니 신문이니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담 쌓고 살았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구사하는 독특한(?) 화법은 TV 대선 토론회 등을 통해 대통령 당선 전부터 이미 유명했다.

  지금의 대통령은 일반인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20대 시절 5년 동안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아 온갖 공식 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미 15년 동안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즉, 공인으로 산 세월이 자그마치 20년이나 된다.   

  그러니 공식 석상에서 이런저런 발언을 하는데 익숙할 법하건만, 어째서인지 대통령이 하는 말은 문법적 오류가 가득하고 비속어까지 수시로 튀어나오는 등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즉석에서 하는 발언이 엉망인 것은, 공인으로 오랜 시간 살았다고 해도 성격상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 하거나 원래 말재주가 없어서 실수했다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연설문조차 비문투성이었다.

  대통령 입에서 나오는 연설의 문제점을 알아채는 데에는 엄청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무난히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의 연설 및 각종 발언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인터넷에서 '박근혜 화법' 이니 '근혜체' 니 하는 게 회자될 정도였다. (심지어 '박근혜 화법 번역기' 란 것까지 있음! -.-;;)

 

  지금은, 대통령의 연설문이 그 모양 그 꼴이었던 이유가 최순실의 손을 거친 탓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하지만 연설문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최순실이라고 해서, 대통령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단, 어떠한 공적 권한도 없는 민간인에게 국가 원수의 연설문을 유출하고 수정하게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다.  더구나 흥부 저고리 수준으로 너덜너덜한 그 연설문을, 대통령이 몇 년 동안이나 아무렇지 않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읽었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명색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런 터무니없는 문장으로 가득찬 연설문 읽는 것을 반복하면서, 연설문이 이상하다는 걸 전혀 몰랐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문에 문법적인 오류나 적절하지 못 한 어휘가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대학생이 엘리트 취급받던 시대에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 -.-;;)  둘째, 대통령도 연설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 정도 문제점은 국민들이 눈치채지 못 할 것이라 믿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즉, 21세기의 국민 수준을 딱 1970년대 국민 수준과 같게 보았다는... -.-;;)

 

 

 

 

  ◎ 예언(!)이 되어버린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

 

  이 책의 끝부분에는 두 전직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어 갈 지도자' 와 '글쓰기' 의 관련성에 관하여 한 말이 나온다.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했다. "지도자는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쉽고 간결하게 말하고 글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 "리더는 글을 자기가 써야 한다.  자기의 생각을 써야 한다.  글은 역사에 남는다.  다른 사람이 쓴 연설문을 낭독하고, 미사여구를 모아 만든 연설문을 자기 것인 양 역사에 남기는 것은 잘못이다.  부족하더라도 자기가 써야 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말했다.  "지금의 리더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정경유착의 시대도 막을 내렸고, 권력기관도 국민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권력과 돈으로 통치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말과 글, 그리고 도덕적 권위 뿐이다." /  "연설문을 직접 쓰지 못 하면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읽으면서 정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위의 발언을 모아서 요약하자면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즉 책을 읽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 는 뜻이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한 말인 것만 같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은 모두 2009년에 세상을 떴다.  두 전직 대통령이 족집게 점쟁이도 아닌데, 자신들 사후인 2016년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질 것을 미리 알고 위의 발언을 했을 리 없다.  그리고 저 위에 이미 쓴 말이지만, 이 책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2년 전인 2014년에 출간되었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 역시 최순실 게이트를 염두에 두고서 위의 발언들을 책에 실었을 리 없다.

  아마도 두 전직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저런 발언을 했을 것이다.  만일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저런 발언들을 읽었더라면,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뻔하고 진부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국민들이 국가를 통치하라고 선출하여 권력을 위임한 대통령 뒤에 또 다른 그림자 대통령이 있었음이 드러난 지금에 와서 보면, 위의 발언들이 너무나 뼈아프게 다가온다.  우리 국민은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즉 책을 읽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능력도 없는 사람을 국가의 리더로 뽑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런 엄청난 사태를 맞게 되었다. 

 

 

 

 

 

  ◎ 분명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 그러나 씁쓸한 뒷맛이 남는...

 

  정말 얄궂은 일이다.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지금의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연설문을 소재로 삼아 쓴 책이, 지금의 대통령이 친 대형사고(!) 때문에 엄청난 관심을 끌며 팔리고 있다.  지난 해 말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그 전보다 월등히 높아졌다.

  저 세상에서 두 전직 대통령이 어떤 표정으로 이런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마 쓴웃음을 짓고 있지 않을까?   

 

  최순실 게이트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이 책은 아는 사람이나 아는 책으로 묻혔을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이 책은 독자층이 두터울 수가 없다.  보수적 정치성향을 지닌 독자들은 두 전직 대통령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책을 살 가능성이 별로 없다.  게다가 연설문에 관한 책이란 점에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불리하다.  진보적 정치성향을 가진 독자라 하더라도, 주로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 철학이나 정치 역정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두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에까지 관심 갖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안 팔릴 운명(?)을 타고났던 이 책이 희대의 정치 스캔들 덕에 베스트셀러로 탈바꿈했다.  이것을 대단한 반사효과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엄청난 나비효과라고 해야 할 지...  세상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우리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한다.

 

  이 책을 다 읽고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괜찮은 책을 읽게 된 계기가 하필이면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전세계에 나라 망신 톡톡히 시킨 정치 스캔들 때문이라니...  울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번에도 좋은 책 한 권 읽었구나.' 하는 뿌듯함만 느꼈더라면 좋았을텐데, 뿌듯함 끝에 씁쓸한 맛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