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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余華)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Lesley 2016. 11. 13. 00:01


  작년에 읽고서 블로그에 올려야지 하고 마음 먹었던 책이 있다.

  '허삼관 매혈기' 로 유명한 중국 작가 위화(余華)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十個詞彙中的中國)' 다.  위화의 작품 대부분이 소설인데 비해, 이 작품은 자전적 수필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의욕에 불타올라 포스트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서인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특별한 이유 없이 시들해지는 경우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포스트가 그런 경우다.  그 동안 앞부분만 쓴 상태로 미공개 글로 블로그 한 구석에 박아놓았다.  중단된 포스트를 볼 때마다 '언젠가는 써야 하는데...' 하는 막연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차라리 삭제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그런데 삭제하기는 또 아깝고...  그러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그 어떤 일은 이 글 중간 부분에 나옴.) 드디어 이렇게 완성시켰다...!






  ◎ 중국어판 제목과 한국어판 제목 - 소설이 아닌 수필이라 중국에서 출판하지 못 한 책


  이 책의 원제, 즉 중국어판 제목은 '十個詞彙中的中國(10개 단어 속의 중국)' 이다.

  원제는 이 책이 10개의 단어를 화두로 잡고 중국이란 나라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위화는 중국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을, 때로는 해학적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짚어낸다.  그리고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의 어두운 면과 '현재' 급속한 경제발전 시기의 어두운 면을, 때로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짓고 때로는 비교한다.


  그런데 한국어판 제목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다.

  중국어판 제목과 너무 동떨어진 제목이다.  위의 표지 이미지를 보면, 표지 윗부분에 중국어판 제목을 살짝 변형하여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라고 작은 글씨로 써놓기는 했다.  하지만 한국어판 제목과는 전혀 다른 문장이라, 출판사의 홍보문구 정도로 여기는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  그리고 중국어판 제목을 아는 독자들은 그 독자들대로, 책을 읽기 전에 표지만 보고서 '한국어판은 왜 이렇게 뜬금없는 제목을 붙였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면, 한국어판 제목이 사실은 중국어판 제목과 일맥상통함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정작 위화가 살고 있는 중국에서는 출판되지 못 했다. (한국어판은 대만판을 번역한 것임.)

  중국의 어두운 면을 건드린 탓에 정부의 출판물 검열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허삼관 매혈기' 를 비롯한 위화의 다른 작품도 대부분 중국의 어두운 면(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병폐와 상처)을 건드리고 있지만, 중국에서 멀쩡히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이 소설이 아닌 자전적 수필이기 때문이다.  위화의 다른 작품들도 중국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결국에는 '허구의 이야기' 인 소설이라서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는 자전적 수필, 즉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 다.  문화대혁명의 광기라는 똑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도, 하나는 그 경험을 허구라는 틀에 담았기 때문에 출판될 수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썼기 때문에 출판이 금지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고나면 한국어판 제목이 뜬금없기는커녕 오히려 기발하게 느껴진다.

  위화는 이 책의 본문에서는 간적접으로, 서문(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중국에 아직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중국 네티즌들이 온갖 재치있는 방법으로(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암시, 정부에서 내세우는 단어를 비틀어서 다른 뜻으로 이용하기 등등) 정부의 검열을 피해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에 희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는 한국어판 제목은 위화의 희망을 드러내는 제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당당히 드러내놓고 할 수 없지만, 물밑에서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빛보다도 더 멀리 가서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에 닿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역자 혹은 출판사가 그런 위화의 마음을 헤아리고 한국어판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제목을 이렇게 변형하기로 했을 때 틀림없이 저자인 위화에게 동의를 구했을 것이다. (저자의 동의 없이 제목을 확 바꿔버린다면 저작권에 위배될테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  그렇다면 한국어판의 제목에 위화의 바람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내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의 앞부분은 지루하다. ^^;;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걸 계속 읽어야 돼?' 하는 고민까지 했다.  그런데 10개의 단어로 된 목차 중 세 번째 장인 '독서' 부분을 읽으면서부터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포스트도 '제3장 독서' 만 가지고 쓸 것임.)

  혹시 나처럼 이 책을 보면서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앞부분은 건너뛰고 제3장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소설처럼 순서대로 읽어야만 이해되는 책이 아니라서 10개의 장 중 어떤 것을 먼저 봐도 상관없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순서대로 보는 것이다.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가 차례로 나오기 때문이다.




  ◎ 때로는 본문보다 주석이 독자의 마음을 끈다.


  위화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에서 수난을 겪은 사람 혹은 물건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은, 그 중에서도 '책' 이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  지식을 담아 후세에 전하는 가장 전통적이며 보편적인 매체인 책이 말이다.  문화대혁명을 책과 지식인 쪽에만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문화대혁명은 20세기판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고 마오쩌둥은 20세기판 진시황인 셈이다.

  일단, 서양의 책은 자본주의나 제국주의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리고 유교나 도교 같은 중국 전통 사상에 관한 책, 또는 삼국지나 홍루몽 같은 고전 소설은 봉건주의와 계급주의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이 시절에 중국인들이 볼 수 있는 책은 딱 두 가지 종류였다.  하나는 가치중립적인 각종 기술을 위한 실용서고, 또 다른 하나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는 내용의 책('마오쩌둥 선집' 이니 '마오주석 어록' 이니 하는 것)이다.

 

  위화는 이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는데, 이 때부터 독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위화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부터 마을에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여는 등 분위기가 나아졌다.  위화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독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어지간한 책은 없애버렸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봤자 볼만한 책이 거의 없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볼 생각도 했지만, 자기 집에 책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신이 나서 가보면 매번 똑같은 책이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시기 중국에서 신주단지처럼 떠받들어 모셨던 네 권짜리 '마오쩌둥 선집' 이다. -.-;;  하긴 위화네 집이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마오쩌둥 선집 외에 의학 관련 책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마오쩌둥 선집 이외의 책을 찾던 위화가, 엉뚱하게도 마오쩌둥 선집에 빠져들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의 모든 가정에 마오쩌둥 선집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마오쩌둥 선집이란 책은 그저 '우리 식구가 이렇게 마오쩌둥 주석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는 뜻을 보이기 위한 정치적 보호판 같은 것이었다.  만일 자기가 그런 책에 관심없다는 이유로 마오쩌둥 선집을 집에 들여놓지 않는다면,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자로 몰려 큰 화를 당하기 딱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른들도 읽기 힘들어하며 장식품처럼 꽂아놓기만 하는 그 딱딱한 책을,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위화가 방학 내내 집중해서 읽은 것이다.  당연히 위화의 일은 온 동네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이토록 열심히 마오 주석님의 사상을 공부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위화는 이렇게 썼을 뿐이지만, 행간에는 이웃들이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더 과장되게 칭찬했다는 뜻이 살짝 비침.)  위화의 부모 역시 문화대혁명 시기만 아니었더라면 아들이 대학 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뿌듯해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큰 반전이 있으니...

  어린 위화가 마오쩌둥 선집을 열심히 읽은 건 사실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오쩌둥 선집의 '본문' 이 아니라 '주석' 을 열심히 읽었다...!  위화는 마오쩌둥 선집의 주석에 나오는 각종 역사 이야기를 탐독한 것이다.


  이 부분이 참 코믹하고도 아이러니하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과 실용서 말고는 전부 인민에게 백해무익하다며 없애버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마오쩌둥이 쓴 책조차, 마오쩌둥이 비사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이라며 비난했던 것들과 관련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어떤 사상이든 그보다 앞서 나타난 다른 사상들을 바탕으로 해서 태어나는 법이다.  마오쩌둥주의라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게 아니다.  서양 사상이든 중국 전통 사상이든, 하여튼 마오쩌둥이 마오쩌둥주의라는 걸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다른 사상들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오쩌둥이 자기 책에서 독자들에게 마오쩌둥주의에 대하여 설명하려면, 황당하게도 마오쩌둥 스스로가 봉건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이라며 금지한 중국 역사 속 여러 이야기를 언급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부분이 더욱 재미있게 다가오고 또 공감이 되었던 것은, 나 역시 책의 본문보다 주석에 더 눈길이 갔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 때 공산주의의 기본서라 할 수 있는 '자본론' 을 공부하겠다고 어떤 소모임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뼈저리게 느껴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었다는 것은 아니다. ^^;;  그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두세 페이지로 간단히 배운 공산주의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그 공산주의 때문에 전세계가 두 쪽이 나서 싸워댄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대학에 가서 갑자기 환경도 바뀌고 이런저런 것들에 노출되면서 세상 고민을 나 혼자 다 떠안은 것 같은 심각함과, 그로 인한 치기 탓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모임에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나올 때 늘어난 것은 자본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술 퍼마시는 능력이었다. -.-;;  원래의 목적인 자본론 공부는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자본론을 1회독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나마 3권 전체도 아니고 달랑 1권만...)


  어쨌든 간에 그 모임에서 교재로 썼던 자본론 1권에는 주석이 많이 붙어있었다.

  자본론 1권의 앞부분에는 노동이 어떻고 상품이 어떻고 하는 딱딱한 내용이 나오지만, 뒤로 가면 당시 노동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온다.  본문에서는 주로 이론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 아래 주석(각주)에는 구체적인 사례가 나왔다.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실제 사례다 보니, 어렵고 지루한 본문과는 달리 마치 신문의 사회면 기사를 읽는 것 같은 기분으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마르크스야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겠다고 주석을 열심히 달았겠지만, 정작 이 독자는 그런 마르크스의 의도와 전혀 다른 쪽에 초점을 맞춰서 주석을 읽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먼저, 당시 영국의 일부  지방 교회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공격해서 심한 경우 살해(!)할 정도로, 안식일은 신앙활동 이외의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날로 취급되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강요로 안식일인 일요일에도 공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이 사례의 요지는 노동자들이 마땅히 일하지 않아야 하는 일요일조차 노동에 시달리는 상황, 즉 노동력 착취를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례에서 노동력 착취 문제보다는, 안식일에 다른 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몇몇 교회의 행태에 더 눈길이 갔다. (사실 그 정도면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광신적인 교회 아닌가? -.-;;)

  또한,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좁은 방 한 칸에 여러 명의 가족과 친척들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그만 근친상간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의도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이 형편없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례에 나오는 근친상간이 순전히 낮은 임금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 때문에 생긴 걸까 아니면 당사자가 원래 비뚤어진 사람이라 생긴 걸까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공장으로 내몰린 아동 노동자들이 병이나 산업재해로 일찍 죽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어머니들이 자식의 죽음에 슬픔을 전혀 못 느끼게 되었다는 사례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사례를 읽으며 그 시절 만연했던 아동 노동력 착취에 한숨이 나오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모성애가 여자의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 이라는 주장이 어쩌면 옳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이제와서 자본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본문의 내용이 아니라 주석에 나왔던 몇몇 사례다.

  본문에 대해서는 그저 어렵고 지루했다는 막연한 느낌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다.  혹시 지금 다시 읽어본다면 좀 다른 생각이 들까? ^^


  그리고 좀 우습지만, 한동안 블로그 구석에 박아놓기만 했던 이 포스트가 부활(!)한 원인도 바로 주석이다.

  9월에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도 주석이 무척 많이 나온다.  주석을 전부 뺀다면 책의 분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게 틀림없을 정도로 주석이 많다. 황현의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원제 : 오하기문)'(http://blog.daum.net/jha7791/15791317)  그 많은 주석에 담긴 온갖 내용을 읽다 보니, 본문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본문과 별도로 주석만 쭉 읽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예전에 자본론 본문은 대충 넘기고 주석만 꼼꼼하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동시에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에서 위화가 마오쩌둥 전집의 주석을 열심히 읽었다고 했던 대목도 떠올랐다.  그래서 '아, 이 세 이야기를 연결해서 포스트를 쓰면 되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앞부분만 쓴 채로 꽤 오랫동안 '미완성 + 미공개' 상태로 있던 이 포스트가 완성되어 공개글이 된 것이다. (이 포스트 탄생의 비화... ^^;;)




  ◎ 결론을 알 수 없는 소설에 매료된 독자의 답답한 마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오쩌둥 선집의 주석을 통해 독서에 눈 뜬 위화가, 중학교 때부터는 금서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마오쩌둥이 아무리 수많은 책을 금서로 정해 불태우고 찢어버리라 했어도, 그리고 그 명령을 어기고 금서를 소장할 경우 아무리 심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읽을거리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금서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은밀히 돌려가며 읽었다. (20세기 중반에 필사본 책이라니,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역사를 100년은 후퇴시켰다는 말이 정말 맞긴 맞음.)

  그리고 위화가 중학교에 들어간 때가 문화대혁명 열기가 한풀 꺾인 때라 그랬는지, 그 무렵에는 어린 중학생들조차 필사본으로 된 금서를 몰래 읽었다.  하지만 중학생들이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며 읽은 금서라고 해봤자, 마오쩌둥이나 중국 공산당의 통치에 위협이 될만한 정치사회적인 책이 아니었다.  황당하게도 '사랑' 에 관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설이 제대로 제본이 된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공책에 옮겨쓴 것, 즉 필사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됐다.

  독서에 목마른 많은 사람이 돌려가며 읽다보면 자연히 공책이 낡아 너덜너덜해진다.  위화는 자신이 그 시절 읽었던 필사본 소설 중에 모든 페이지가 다 있는 것은 단 한 권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10여 페이지가 떨어져나간 것은 보통이고, 표지가 없어져서 그 소설의 제목과 작가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읽을거리라고는 그런 허접한(!) 필사본 소설 밖에 없으니 그것이라도 붙잡고 읽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어이없고 기막힌 독서 상황에 대한 예로,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에 얽힌 사연이 나온다.  화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에 서양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는데, 어느 날 '여자의 일생' 을 읽다가 깜짝 놀라 소리까지 질렀다.  위화가 중학생 시절 난생 처음 읽었던 필사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앞부분이 없어진 필사본으로 읽었기에 어떤 작가의 무슨 작품인지 모르고 읽었다.  그런데 훗날 '여자의 일생' 을 3분의 1 정도 읽은 후에야, 예전에 읽었던 필사본 소설이 '여자의 일생' 과 같은 내용임을 알게된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일생' 처럼 없어진 페이지가 앞부분이라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앞부분을 모르는 것도 답답한 일이기는 하지만, 중간부분과 뒷부분을 읽어나가다 보면 앞부분 내용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필사본의 뒷부분이 없어져서 소설의 결말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다.  위화는 뒷부분이 없는 필사본을 읽어 그 결말을 알 수 없게 될 때마다, 답답한 정도를 넘어서 고통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결말을 알고 싶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물어봤지만, 다른 사람들도 위화처럼 불완전한 필사본을 읽은 터라 결말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결말을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된 위화는 자급자족(?)에 나섰다.  자신이 읽은 부분을 토대로 자기 스스로 결말을 상상(!)한 것이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잠은 안 자고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소설의 뒷부분을 상상했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한 결말에 스스로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참으로 귀여운 중학생이로세... ^^)  그리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쩔 수 없이 온갖 소설의 결말을 상상했던 경험이 위화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위화의 창작욕에 불을 질러 나중에 위화가 작가가 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핸드폰 싸게 파는 가게 찾다가 없어서 내가 차린 가게' 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음. ^^)


  이 부분이 충분히 공감가는 게, 나 역시 위화가 느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겨우 몇 번이지만...)


  읽을거리가 넘쳐흐르는 행복한 시대에 사면서도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인터넷에 팬픽이니 상플이니 하는 이름으로 떠도는 소설 때문이다.

  팬픽 또는 상플은 어떤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드라마 내용에 불만을 갖거나 혹은 드라마 내용에서 영감을 얻어서, 드라마 속 등장인물과 설정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즉, 시청자들의 2차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법적으로 말하자면 드라마 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임. ^^;;)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쓰다 보니 형편없는 것도 많지만, 가끔은 원래의 드라마보다 훨씬 낫고 정식으로 출판해도 될 것 같은 수준의 소설도 나온다.


  바로 이 '원래의 드라마보다 훨씬 낫고 정식으로 출판해도 될 것 같은 수준의 소설' 이 문제다.

  그런 좋은 소설을 쓴 사람이 제대로 결말을 맺어주면 괜찮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소설이란 게 원래 드라마에 푹 빠진 시기에 갑자기 삘(!) 받아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연재하던 중에 그 삘이 수그러들면 소설은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혹은 본인은 소설을 완성시키고 싶어하지만, 전업 작가가 아니다 보니 현실(학생이라면 공부와 시험, 직장인이라면 야근 등의 문제)에 치여 완성 못 시키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별 볼 일 없는 소설이라면 결말을 몰라도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줄거리도, 내용 구성도, 작가의 문체도 다 좋아서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가며 읽던 중에 소설이 뚝 끊겨버리면...  진짜 답답하다 못 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무명작가에게 화가 날 지경이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도 위화처럼 잠자리에 누워 결말 부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




  ◎ 고등학생의 필사 작업


  위화가 고등학생이 된 후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 를 필사한 사연도 시쳇말로 웃프다.


  어느 날 위화의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에 관한 소설 필사본을 빌렸다고 위화에게만 말했다. 

  위화는 그 친구의 집으로 가서 둘이서 몰래 그 필사본 소설(춘희)을 읽으며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런데 친구에게 필사본을 빌려준 사람은 그 필사본을 딱 하루만 읽고서 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소설은 두 고등학생의 소유욕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중간에 읽는 것을 멈추고 자기들이 따로 필사본을 만들기로 했다.


  일단은 친구집에서 친구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까지 필사를 했다가, 나중에는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밤이라 아무도 없는 학교로 가서 창문을 넘어 교실에 들어가 밤새도록 필사를 했다.  한 사람이 필사 작업을 하다가 지치면 다른 한 사람이 교대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반 시간 이상씩 필사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팔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지치게 되자 교대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마지막에는 5분 간격으로 교대했다.  그리고 책상 여러 개를 이어붙여서 침대처럼 만들어 놓고, 한 사람이 필사 작업 하는 동안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위에 누워서 자기도 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필사 작업을 끝내고 하품을 하며 학교를 나왔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필사본을, 위화가 먼저 읽기로 했다.

  전날 밤 필사 작업 때문에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서, 학교를 결석하면서까지 필사본을 읽었다. (얼마나 그 소설에 빠졌으면 학교를 결석까지 하나...)

  그런데 예상치 못 한 문제가 발생했다.  원본(?) 필사본은 반듯한 글씨로 깨끗하게 쓴 것이라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위화와 친구가 새로 만든 필사본은 앞부분만 멀쩡할 뿐 뒤로 갈수록 글씨가 개발새발(!)로 변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시간에 쫓긴 채 졸린 눈 비벼가며 장시간의 필사로 굳어진 팔을 억지로 움직여 썼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위화 자신이 쓴 부분은 자기 글씨라 대강이라도 알아볼 수 있지만, 친구가 쓴 부분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해독(?)을 부탁해야 했다.

  먼저 위화가 농구를 하고 있던 친구를 찾아가 알아볼 수 없는 부분에 대해 물어가며 읽었다. ^^;;  위화란 인물이 소설가답게 감수성이 풍부한 건지, 아니면 워낙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모처럼 구한 좋은 소설에 유독 감동했던 건지, 하여튼 위화는 친구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읽을 정도로 감동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으로 필사본을 친구에게 넘겼다. 

  그 날 밤 잠을 자던 위화는 그 친구가 창문 밖에서 불러내는 통에 잠에서 깼다.  물론 그 친구 역시 위화가 쓴 부분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해독해달라고 위화를 깨운 것이다. ^^;;  친구는 전봇대에 달린 전등 아래에서 필사본을 읽다가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위화에게 물어봤고, 위화는 전봇대에 기대서서 하품을 하다가 친구의 부름에 응하곤 했다.


  내가 지금껏 읽어본 필사본이라고는, 대학시절 수업에 결석했을 때 친구의 노트를 빌려 본 게 전부다.

  그런데 친구의 노트는 아무리 달필로 깔끔하게 적은 것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내 글씨가 아니라 눈에 익지가 않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필기한 노트(비록 악필로 적은 것이라고는 해도... ^^;;)에 비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노트 필기라는 건 기껏해야(?) 수업 내용을 요약해서 담은 것이라, 낯선 글씨로 되었더라도 그럭저럭 읽기는 한다.  하지만 소설이란 것은 긴 내용의 줄거리를 감정선을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  그런 소설을 필사본으로 읽는 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안 간다.  필사본 시대를 겪어보지 못 한 나로서는, 한창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서 읽던 중에 옆의 친구 붙들고서 '이거 뭐라고 쓴 거야?' 하고 묻는 일을 반복하면 과연 독서에 몰입할 수 있을까 싶다.  하긴, 실용서와 마오쩌둥 관련 서적을 뺀 책은 전부 금지된 미친(!) 세상에서 산다면, 그 정도 일은 독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사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 문화대혁명의 끝, 책의 부활! - 서표 받기와 쉰한 번째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7년이 되자, 그 동안 금서로 지정되었던 수많은 책이 세상에 풀려나왔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책을 아무리 많이 출판해봤자 정작 독자 입장에서는 새 발에 피였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어지간한 책은 금지하고 없애버린 탓에, 책에 대한 사람들의 굶주림이 극에 달해서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숫자로는 뭐든지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나라 아니던가?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을 잔뜩 만들어냈다고 해도, 그 넓은 땅덩어리 여기저기에 있는 수많은 서점 입장에서는 책을 찔끔찔끔 공급받을 뿐이었다.   


  위화가 살던 동네 서점에 톨스토이, 디킨스, 발자크 등의 책이 들어오던 날, 온 동네에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위화가 표현한대로, 요즘으로 치면 톱스타가 시골마을에 출현한 것 이상으로 그 날의 반응은 뜨거웠다.

  책의 공급량이 한정된 탓에 서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선착순으로 서표라는 것을 나줬다.  이 서표를 받아야만 책을 구입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서표를 받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가서 줄을 섰다.

  위화도 새벽 댓바람부터 서점으로 가면서, 이렇게 일찍 가니 틀림없이 줄 앞부분에 서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서점에 도착해보니 벌써 300명(!) 이상이 줄을 서있었다...!  아예 그 전날 밤부터 서점 앞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아 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어서 문제라는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어지간한 책은 다 금지해버렸다가 10년 후에나 다시 책을 찍어낸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줄을 선 채 서표 나눠주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벌인 입씨름도 재미있다. 

  앞자리에 선 사람이 아마 서표를 100장 정도 나눠줄 것이라 말하면, 100위권 밖에 선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그럴 리 없다고 항의했다. 200위권 안에 드는 사람이 아마 200장 정도 나눠주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면, 이번에는 200위권 밖에 선 사람들이 화를 내며 그렇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서표가 몇 장이나 되는지 모르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생각했다. (집값이 상승할지 하락할지를 두고, 인터넷에서 주택 소유자들과 무주택자들이 벌이는 싸움과 비슷함. ^^)


  유감스럽게도 서표는 달랑 50장이었고, 50위권 밖으로 줄을 선 대다수 사람은 책을 구입하지 못 했다.

  공교롭게도 그 때가 겨울이라 모두들 추위에 떨면서 최소한 몇 시간, 심지어 하룻밤을 꼬박 줄을 섰다.  그런데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아쉬운 마음에 서점 밖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50위권 안에 든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서점에서 책을 사서 나오면, 밖에 있던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며 부러워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가 아니라 '못 읽는 책 만져나 보자' 임. ^^;;)  당시 중국인들은 독서에 너무 굶주린 나머지 '안나 카레니나' 같은 유명한 책의 표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심지어 위화를 포함한 몇몇 사람은 책 주인에게 부탁해서 책의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초콜릿 향기보다 더 달콤한 책의 향기~~ ^^)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실망한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50위권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시험을 예로 들자면, 어차피 떨어질 바에는 차라리 수십 점 차이로 떨어지는 게 낫다.  겨우 몇 점 차이로 떨어진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화가 날까...!   그러다 보니 달랑 몇 순위 차이로 서표를 못 받게 된 이들은 실망감을 주체하지 못 한 나머지, 서점 앞을 못 떠나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특히 51위였던 사람은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가 쫓겨났는데(아마 자기가 50위라고 착각했거나 서표가 한두 장 더 있을 수도 있다고 기대했던 모양임.), 미동도 안 하고 서점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겨우 옆으로 비켜났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서표를 나눠주기 전날 밤에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다가 와서 줄을 섰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간발의 차이로 떨어진 것이다.  이 때 서표를 못 받은 충격이 무척 컸는지, 그 사람은 그 후로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카드놀이를 한 판만 덜 했어도 쉰한 번째 자리에 서는 일은 없었을텐데..." 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마침내 '쉰한 번째' 라는 말이 위화의 동네에서 '정말 재수없다' 는 뜻을 지닌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 반복되는 끔찍한 역사 - 기원전 3세기의 중국, 그리고 기원후 20세기의 중국과 북한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독재자로도 악명이 높다.

  독재자로서의 진시황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이 분서갱유다.  말 그대로 책을 불태우고(焚書, 분서) 학자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坑儒, 갱유), 사상 및 지식인을 탄압한 사건이다.

  물론, 동서고금의 역사를 뒤져보면 진시황 말고도 사상과 지식인을 탄압한 권력자는 많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유독 유명한 이유는, 탄압을 하더라도 분서갱유만큼 엄청난 규모로 탄압한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분서갱유가 일어나고 약 2,300년이 지나 20세기 중반인 1960년대가 되었을 때, 마침내 분서갱유를 넘어서는 신기록(?)이 나왔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웃프게도, 분서갱유를 능가하는 탄압 사건도 중국에서 벌어졌다. (규모로는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중국이라, 독재자의 스케일이나 탄압의 규모도 남다른 모양임. -.-;;)  바로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다.  

  마오쩌둥을 진시황의 환생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문화대혁명 기간 벌어진 일은 분서갱유와 비슷해 보인다.  진시황이 농업, 의술, 점복 등 실용서라 할 수 있는 책만 남기고 나머지 책을 모두 불태우게 한 것처럼, 마오쩌둥도 마오쩌둥주의에 관련된 책이나 의학, 공학 등 각종 실용서를 제외한 책을 전부 없애버렸다.  그리고 진시황이 학자들을 생매장하는 등 극단적으로 탄압한 것처럼, 마오쩌둥 역시 그저 머리에 먹물이 들어가고 가방 끈이 긴 사람이기만 하면 반동분자로 몰아서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오지로 추방했다. (심지어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학입시가 중단되어 지식인 배출이 중지되기까지 했음!) 


  그리고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한창이던 1960년대 말에, 이번에는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김일성 통치 기간 동안 벌어진 소위 도서정리 사업이란 사건이다.  사건 규모만 중국보다 작을 뿐(인구나 영토 차이상 당연한 일임.), 결국에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끔찍한 사상 및 지식인 탄압이었다.  김정남(김정일의 큰아들)의 이모인 성혜랑의 수기에 의하면, 1967년에 이른바 5.25 교시가 나오면서 도서정리 사업이라는 북한판 문화대혁명도 시작되었다.  5.25 교시로 북한 정계에서 갑산파니 남로당이니 하는 비 김일성 계열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도서정리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도서정리 사업으로, 북한 전역의 책이란 책은 전부 한 페이지씩 샅샅이 읽고 조사했다.  그래서 김일성 우상화와 계급혁명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 같은 부분은, 먹으로 칠하거나 종이를 붙여 가리거나 아예 그 페이지를 통째로 뜯어냈다.  물론 중국처럼 아예 책을 통째로 제지공장에 보내 없애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어떤 책은 내용상으로는 김일성 정권의 입맛에 맞지만, 단지 문장이 부드럽다는 게 문제가 되어 삭제당하기도 했다. -.-;;  이 문화탄압에서 살아남은 책은 북한 체제와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책 뿐이었다.

  성혜랑은 그 세대 사람(1935년생이니 현재 80대임.)으로는 드물게, 더구나 그 세대 여자로서는 더욱 드물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성혜랑에게 인류 문화를 담은 책을 말살한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오죽하면 전쟁 때 벌어진 일보다 더 무서웠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전쟁(한국전쟁) 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다. (중략) 그러나 사회주의 이상 사회건설을 표방하는 인민의 내 나라가 이 무슨 만행인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생각해 냈는가?"


  북한의 도서정리 사업이 중국의 문화대혁명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이름이 그나마 덜 가식적이라는 것 정도다.

  중국은 문화에 관한 것을 닥치는대로 말살한 작업에, 마치 문화를 진흥시키는 국가 차원의 운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문화대혁명'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북한은 '도서정리 사업' 이라고 해서 '우리는 책을 정리(말살)하겠소.' 라는 의도를 정직하게(?) 드러냈다. -.-;;


  이런 기막힌 일이 2,300년의 세월을 두고 반복된 걸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 문화와 문명이 발달 정도와 사람들의 의식 수준 발달 정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황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기원전 3세기에 벌어진 일과, 인권이니 국민주권이니 하는 개념이 자리잡은 기원후 20세기에 벌어진 일이, 이토록 비슷할 수 있단 말인가?  1차적으로는 끔찍한 일을 벌인 독재자들이 문제지만, 국가 최고 지도자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 국민의 모습도 기막히다.

   하긴, 달리 생각해 보면 진시황, 마오쩌둥, 김일성이 대대적인 문화탄압을 벌인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명령을 해도 국민들이 순응하게끔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떤 후진국의 독재자가 선진국 대통령에게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이렇게 뛰어나다.' 는 자랑을 듣고서 '나는 공부하는 국민을 원하지 않소.  무식한 소를 원할 뿐이오.' 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배우지 못 한 사람은 쉽게 세뇌가 되어 독재권력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설사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더라도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진시황, 마오쩌둥, 김일성도 국민이 책을 읽어 생각하는 힘을 갖게 되면 자신들의 독재권력이 흔들리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악랄하게 책을 말살하고 지식인을 탄압했을 것이다. 




  ◎ 뱀발


  책에 대한 탄압을 소재로 하는 다른 책 또는 영상물을 소개하자면...

 

  먼저 이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 중국영화 '발자크와 소재봉' 이 있다.

  도시에서 중산층으로 살던 19세의 청년들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산골짜기 마을로 추방되어 지내면서 겪는 첫사랑 이야기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첫사랑 이야기지만, 그 첫사랑 이야기 밑으로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암울함이 깔려있다.  특히 당시 금지되었던 서양 문학책이 주요 소재로 나온다. (그래서 제목에 아예 프랑스 작가 '발자크' 가 들어가있음.)  21세기에 나온 영화답지 않게 화질이 거칠어 눈에 거슬리는 편인데, 그런 단점을 좋은 내용이 다 감싸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온갖 책이 금지되었던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봐야하는 수작이다.

  

  1996년에 탈북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성혜랑이 쓴 자서전 성격의 수기 '등나무집' 도 있다.

  위에서 북한의 도서정리 사업에 대해 쓰면서 언급한 바로 그 책이다.  전에 이 책을 포스팅하다가 어쩐지 중간에 시들해져서, 이 블로그에는 변죽을 울리는 정도의 글만 올리고 넘어간 적이 있다.

  이 책이 개인의 수기라고는 하지만, 북한에 대한 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성혜랑이 김일성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특수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평범한 북한 사람이라면 모를 법한 일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혜랑이 한때는 작가로 활동했던 사람이기도 해서 필력도 좋아 술술 읽힌다.  성혜랑이 공산주의자인 부모를 따라 월북한 6.25 시기의 북한 상황부터, 그나마 정상적(?)이었던 북한체제가 김일성의 독재와 우상화를 거쳐 점점 어처구니 없게 변해가는 모습, 국제사회에서 깡패 국가로 따돌림을 받게되면서 벌이는 무리수나 몸부림 등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책이 한참 전에 절판되었고 헌책방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어서 구하기가 힘듦.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이라도 뒤져보는 수 밖에...)   



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 1(http://blog.daum.net/jha7791/15790777)

발자크와 소재봉(巴爾札克和小裁縫) - 2(http://blog.daum.net/jha7791/15790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