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이연식의 '조선을 떠나며' - 조선 거주 일본인은 어찌 되었나? / 히키아게샤(引揚者)

Lesley 2016. 8. 14. 00:01


  작년 가을에  '조선을 떠나며' 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부터 시작해서 불과 몇 달 후의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해방 전후 시기를 다룬 책이 보통 좌우 대립의 혼란에 방점을 찍는데 비해서, 이 책은 특이하게도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해방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 관련 책이니 일제강점기의 3.1 운동을 기념하는 3.1절 즈음해서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국드라마 랑야방 감상문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뒤로 밀려났다.  어차피 뒤로 미룬 김에, 마침 이 책이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8.15 해방 후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아예 광복절에 맞춰서 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예정대로 광복절 직전에 올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땅에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해방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100만명 가까이 되었다는데, 그 많은 일본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해방 후 그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고 또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들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또 특별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땅에 와서 주인 노릇하던 그 나쁜 놈들이 어떻게 되었든 알게 뭐야?' 식의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외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8.15 해방(물론 일본 입장에서는 해방이 아니라 '패전' 임.)을 맞아 이들이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의외로 흥미진진하고, 또 한일 간에 해결되지 못 한 역사적 책임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조선 거주 일본인이 본토(일본 본토)의 일본인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들에게 8.15 해방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이들이 그 상황을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또한 이들을 본토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가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비교적 얇은 책인데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모든 내용을 정리해 올리지는 못 한다.

  그저,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만 골라 요약하며 되짚어보겠다.




  ◎ 히키아게샤(引揚者) / 조선 거주 일본인


  히키아게샤(引揚者, 인양자)란, 일본의 구 식민지 또는 구 점령지에 거주하다가 일본이 패전하면서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보통은 군인, 경찰, 공무원을 제외한 민간인으로 한정)을 말한다.

  애초에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해외로 나가 살게된 사람들이니, 일본이 패전하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만주, 타이완, 그 밖의 동남아 지역에서 일본으로 귀환한 히키아게샤 숫자는 수백만 명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에만 한정해서 생각하자면...  일본이 패전할 때 조선에는 최소 92만명에서 최대 100만명까지의 일본인이 머물고 있었다.  그 중 나중에 히키아게샤로 분류되는 민간인들은 7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조선 거주 일본인은, 우리의 시선으로 보자면 식민통치의 첨병이며 수혜자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원래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일수록 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 안정에 위협이 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국내의 저소득층을 줄여 사회 안정을 도모할 겸, 조선의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조선 내 일본인 머릿수를 늘일 겸, 일본의 저소득층을 조선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그렇게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에게 이런저런 특혜를 받으며, 원래 조선땅의 주인인 조선인을 제치고 상류층 혹은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이 늘어났고, 이들은 일본에서 건너왔던 일본인과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전후해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즉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2세 혹은 3세(8.15 해방 당시 20대였던 청년층.)의 경우가 그러했다.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지만, 그들은 조선이 원래 일본과 별개의 국가였다가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되었다는 사실이나,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 하고 성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기는, 3.1 운동이 일본의 철저한 탄압으로 가라앉고 조선 총독부의 교묘한 문화통치가 뿌리내리면서, 조선 내에서는 더 이상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때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분노하고 원통해하며 시위를 일으키거나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는 것을 보고 듣고 겪었다.  하지만 자식 세대가 보기에는, 조선은 마치 도쿄나 오사카처럼 원래부터 일본의 한 지역이었고, 조선인들은 일본의 통치에 별 불만없이 순응하며 사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 태어난 젊은 일본인들은 8.15 해방 후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살던 땅이 조선땅임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 조선인과 별로 교류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조선인 거주지역과 일본인 거주지역이 구분된 경우가 많았음.), 어디서 갑자기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쏟아져나와 독립을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는지 놀라워했다.  그리고 항상 일본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던 조선인들이 왜 갑자기 사납게 변해서 일본인을 몰아내라는 구호를 외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된지 수백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겨우 수십 년이 되었을 뿐인데도, 조선 거주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그렇게 무심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일본의 식민체제가 당연시 되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 부모 세대가 일본으로 귀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선은 일본의 한 지역이고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선을 떠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땅인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게. 도통 말이 되지 않았다.


  여러 히키아게샤가 일본으로 귀환하기 직전에 느낀 당혹스러움을 수기로 남겼다. 

  당시 21세였던 이시다 스에코는, 본인 뿐 아니라 어머니도 경성(지금의 서울) 태생이었다.  30살이 다 되어서야 조선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일본이 패전했으니 더 이상 조선에서 살 수 없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상황을 곧 이해했다.  하지만 이시다와 그 어머니는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을 두고 어디로 '돌아간다' 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시 23세였던 이오누에 스에코도 자신이 일본인이면서도 모국인 일본이 얼마나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는지 술회했다. "내지(일본 본토)는 모국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미지의 나라였다.  본래 돌아올 곳으로 왔다는 생각보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도착한 피난 장소와 같았다."




  ◎ 조선 거주 일본인의 독특한 정체성 / 조선 거주 일본인과 본토 일본인의 갈등


  같은 일본인이라도, 조선 거주 일본인과 본토의 일본인 사이에는 일종의 지역감정 비슷한 정체성 차이가 생겨났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위에 쓴 것처럼,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고국인 일본을 미지의 땅처럼 여기게 될 정도로 조선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수십 년 동안 2대 혹은 3대에 걸쳐 살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사이에 다른 정체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거주 일본인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땅에 그 나름대로의 애착을 갖고, 본토 일본인에 대하여 자부심 혹은 우월감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도 품었다.

  예를 들어,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요시오카 마리코는 20세의 나이로 8.15 해방을 맞아 일본으로 돌아갔던 사람이다.  마리코는 훗날 자기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경성을 그리워하곤 했다.  "경성의 하늘은 (일본의 하늘보다) 더 높고 파랬다.",  "경성 사람(경성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은 본토 사람들처럼 섬나라 근성에 사로잡혀 좀스럽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조선땅에 애착을 갖고 본토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보였다고 해서, 조선인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이룬 것은 아니다.

  위에 등장하는 마리코는 노년기에 딸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이 때 딸이 남긴 글을 보면, 마리코는 일본으로 돌아간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인촌(현재 서울의 명동, 충무로, 소공동 일대) 지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딸이 늙은 마리코를 따라다니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로, 옛날 일본인촌이었던 지역의 작은 골목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빠르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일본인촌이었던 곳에서는 그렇게 익숙하게 행동했던 마리코였건만, 그 곳을 벗어나 바로 옆에 있는 청계천과 종로 쪽으로 나가게 되자 곧 낯설어했다.  마리코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서울의 일본인촌' 안에서만 살았을 뿐이다.  분명히 조선인들과 한 도시에 살았건만 철저히 각자의 사회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인촌과 맞닿아 있는 조선인 거주지로 나갈 일이 없었다.  더구나 종로의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 공원)에 갔다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자원봉사 해설사(공교롭게도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에 동원된 피해자였음.)에게서 그 공원에서 시작된 3.1 운동 이야기를 듣고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마리코는 서울에서 20살까지 살았으면서도,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며 조선 전체를 들끓게 했던 3.1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0-;;  그만큼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자기네가 사는 땅의 원래 주인인 조선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했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마치 조선인의 조선땅과 일본인의 조선땅이 따로 있는 것처럼,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본토 일본인들은 그들대로, 조선 거주 일본인을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며 편견을 갖게 되었다.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혈연적으로는 분명히 같은 민족이 맞지만 이제와서는 정체성이나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져버린 '한국인-중국 조선족'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각자 다른 환경에 맞추어 살면서 입장과 사고방식이 달라져, 서로를 같은 부류로 느끼지 못 하게 된 것이다.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 거주 일본인을 자신들보다 한 단계 아래인 존재로 보았다.  그런데 남녀차별이 만연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조선 거주 일본인 중에서도 특히 여자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 여자를 신부감으로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일본보다 낙후된 조선에서 자란 여자들이 보고 배운 바가 없어서 본토 여자처럼 온순하지도 않고 가정적이지도 않다는 편견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의심도 한몫 했다.  즉,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 여자들의 혈통을 의심쩍게 생각했다.  조선 남자들은 여자를 강간하는 일을 수시로 저지르는 야만인이란 전제를 깔고서,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은 어쩌면 조선인의 핏줄일 수 있다고 의심한 것이다. -.-;;  이런 편견을 본토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 거주 일본 남자들마저 갖고 있어서, 조선 거주 일본 여자들의 결혼난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 민간인 보호의무를 저버린 조선 내 일본인 고위 관료들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에 있던 고위직 일본인들은 급하게 움직였다. 

  원칙대로라면, 공직자로서 민간인인 조선 거주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긴박하게 움직여야 했을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위기 상황을 맞으면 자기 자신부터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일본이 패전했으니,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행정력이나 경찰력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승전국 군대인 미군과 소련군이 조만간 조선으로 들어올텐데, 그들이 일본인을 어떤 식으로 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100만명에 가까운 조선 거주 일본인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엄청난 혼란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 불안해진 조선 내 고위직 일본인들은 자신의 안위와 재산부터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먼저, 당시 조선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가장 지위가 높았던 조선 총독부터가 그러했다.

  총독은 일본이 항복하고 이틀이 지난 8월 17일에 자기 부인을 몰래 부산으로 보냈다.  총독 부인은 부산지방교통국장이 미리 비밀지령을 받아 준비해놓은 배에 탔다.  물론,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몰리기 전에, 한결 안전하고 쾌적하게 조선을 떠날 속셈이었다.

  그러나 부산항을 떠난지 얼마 안 되어 문제가 생겼다.  총독 일가가 조선에서 긁어모은 귀중품이 너무 많아서,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바다 한복판에서 오도가도 못 하게 된 것이다. -0-;;  결국 애써 실었던 짐을 절반이나 바다에 내버린 후에야 부산항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고, 총독 부인은 다시 도망치 듯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가 하면 미군이 진주하기 전 소련군이 잠시 진주했던 강원도 춘천에서는, 일본군 수뇌부가 꽁무니를 빼다가 뒷북을 치는 일도 있었다.

  승전국 군대인 소련군에게 패전국 국민인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당연히 일본군 수뇌부가 나서서 소련군 수뇌부와 협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춘천의 일본군 헌병대장은 소련군이 온다는 정보를 제일 먼저 접한 후,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 소련군이 의외로 부드럽게 나오는 게 확인된 후에야, 일본인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일본은 아직 패배한 게 아니라는 둥, 본토 결전을 통해 반드시 적을 무찌르고 최후에는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이라는 둥, 허무하기 짝이 없는 큰소리를 쳤다.  당연히 그 헌병대장은 다른 일본인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눈총을 받았다. 




  ◎ 갑작스런 사회적 신분 하락으로 힘겨워했던 조선 거주 일본인


  패전 후 일본인은 조선에서 누리던 우월한 사회적 신분을 잃게 되었다.

  원래 일하던 관공서, 은행,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경제적으로 갑자기 몰락하게 된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동안 눌려지냈던 조선인들이 복수 차원에서 자신들이 겪은 차별과 수모를 일본인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면서,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들을 모욕하고 위협하는 조선인들에게 치를 떨었을 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즉, 패전 후 자신들이 조선인에게 당한 행동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생각하고 분노했지만,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이 조선인에게 가한 행위라든지, 자신들이 조선땅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인에 대한 착취가 밑바탕이 되었음을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도코 요시마사라는 청년은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패전을 맞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전에는 소학교 교장의 아들이며 엘리트 대학생으로 남 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공중목욕탕에서 장작을 지펴 물을 데우는 일을 해야 했다.  도코는,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조선인들이(심지어 조선 아이들마저) 자기를 골탕먹일 생각에 일부러 정신없이 자기를 불러대며 일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벌거벗으면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다 똑같는 둥,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었다는 둥, 하는 조선인들의 은근한 빈정거림이었다. 


  이 일은 도코 입장에서는 분명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그 동안 일본인에게 받던 차별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속시원한 일이었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더럽고 교양수준 낮은 조선인' 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중목욕탕에서는 조선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조선 총독부는 3.1 운동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에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적어도 겉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 조선인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런 정책의 하나로, 공중목욕탕에 조선인이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내렸다.

  하지만 편견이란 게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게 아니다.  조선 총독부의 지시가 내려진 1920년대에도, 경성은 물론이고 지방 각지에서 조선인의 공중목욕탕 이용을 두고 말썽이 생겼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건 보통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 패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도코의 여동생 도시에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던,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인텔리 여성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도시에는 자기가 가르치던 조선인 학생네 집에 식모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시에의 동료 교사였던 오카베 기미코 역시 다른 조선인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어엿한 교사였던 일본 처녀들이 조선인 집안의 식모가 되다니,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조선인 처녀를 식모로 부리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였다.

  그래도 도시에의 고용주는 도시에가 원래 자기 자식을 가르치던 선생님이라고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었다.  하지만 도시에 입장에서는 조선인 고용주가 보여주는 동정심 어린 배려가 오히려 괴롭기만 했다.  오빠 도코에게, 차라리 고용주가 자신을 함부로 부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보다 한 단계 아래로 취급받았던 조선인에게 동정심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다.  



   

  ◎ 조선에 잔류하라는 일본 정부 / 잔류파 일본인


  이 부분이 정말 뜻밖인데, 패전 후 일본 정부는 조선 총독부를 통해 조선 거주 일본인에게 어떻게든 현지에 남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미 패전해서 일본 정부가 조선에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데도, 자기 국민들에게 조선에 그대로 남으라니...  조선 총독부는 물론이고 조선 거주 일본인들까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을 내버렸다고 느낄만한 지시였다.


  일본 정부가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지시를 내린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 본토가 공습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일본 정부는 본토의 일본인을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다.

  그런데 조선, 만주, 타이완, 필리핀 등에 거주하고 있던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귀환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게 뻔했다.  실제로 나중에 구 식민지에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귀환한 후, 일본은 한동안 식량난, 주택난, 범죄 급증, 전염병 창궐 등 온갖 사회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일본 정부는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을 예상하고, 자기들이 먹여살려야 하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 한 것이다.


   둘째, 일본 정부는 승전국들과의 협상이 잘 풀린다면, 전쟁 배상비는 물어주더라도 식민지는 그대로 보유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이 패전한 처지에서도 조선을 계속 식민지로 두려 욕심을 부렸다는 게 상당히 뻔뻔스럽게 느껴진다.  어찌되었거나 일본 정부가 원하는대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남게 된다면, 조선에 머물던 일본인들이 번거롭게 본토로 귀환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사태를 좀 더 관망해보자는 뜻에서, 자국민들에게 그대로 조선이나 만주 등에 머물라고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잔류파와 귀환파로 나뉘어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선에서 산 일본인들은 아무래도 잔류를 원했다.  그들은 수십 년 전 부모 또는 조부모 세대 때 조선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이미 일본에는 연고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동안 모은 재산과 생계수단을 전부 포기하고 빈털털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성인이 되어서야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일본에 부모형제, 친척, 친구가 있어서 무일푼으로 돌아가더라도 비빌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 식민통치가 무너져 일본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조선인들이 우글거리는 조선땅에 별 미련이 없었고, 최대한 빨리 일본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잔류파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경성의 YMCA에서 조선어 강좌가 열리기도 했다.

  해방된 조선에서 계속 살려면, 그 동안 일본인으로서 누리던 특권을 더 이상 누리지 못 하고 자신들이 조선인에 맞추어 살아야 했다.  그 첫단계가 바로 조선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처음에 조선에 왔던 세대 중에는 조선어를 배운 이들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정작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일본인(이들은 1930년대에 전체 조선 거주 일본인 중 30%나 되었음.)은 조선어를 전혀 몰랐다.  그들이 자라던 때에는 이미 조선인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이 강하게 시행되어, 조선어를 모르고도 조선에서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좌가 처음 열리던 날 YMCA 사무국 차장이 수강생들에게 한 말을 보면, 자신들이 열등한 존재로 보던 조선인의 언어를 배워서라도 조선에 머물고자 했던 잔류파 일본인의 복잡한 심정이 잘 나타나있다.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중략) 그저 망연자실하게 불안과 후회로 가득찬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신조선에 새로이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 조선어 강좌는 예정되었던 3개월을 못 채우고 흐지부지되었다.

  미군 측에서 조선 거주 일본인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 38선 이남에서 온 파마 머리, 38선 이북에서 온 빡빡 머리


  같은 조선 거주 일본인이라도 '조선의 어느 지역에 거주했는가' 에 따라 패전 이후의 경험이 크게 갈렸다.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로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은 38선을 기준으로 삼아 각각 그 남쪽과 북쪽을 관할했다.  그런데 두 나라 군대가 패전국 국민인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서, 일본인들은 38선 이남(미군 지역)에 거주하는지 38선 이북(소련군 지역)에 거주하는지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미군과 소련군에게 상반된 대우를 받다 온 두 종류의 히키아게샤는 '파마 머리' 와 '빡빡 머리' 라는 이미지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이 두 머리 모양은 본토의 일본인들에게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의 처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처음에 미군이 자신들을 어찌 대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했다.  몇몇 지역의 일본인 사이에서는 미군이 일본 여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을 염려해서 미군을 상대할 위안부를 차출하자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있어서,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을 정도다.  그 정도로 미군을 두려워하며 걱정했는데... 

  일본인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미군은 신사적인 태도로 나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일단 자기 처지가 여유가 있어야 남들 처지를 살펴줄 수 있는 법이다.  미군은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었고, 미국 본토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한 덕에 각종 생산시설이 멀쩡히 운영되어서 식량 및 기타 보급품을 넉넉하게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군이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는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덕분에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련군이 들어선 38선 이북의 일본인들에 비하여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 나름대로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귀환했음.)  


  그런데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이 '지나치게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 으로 귀환하여 본토의 일본인들이 분노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 히키아게샤에 대해 보도한 일본 신문에는, 조선에서 돌아온 젊은 여자가 일본에 막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그 사진 속 여자는 파마 머리를 하고 산뜻한 투피스 정장을 입은 모습이다.  지금이야 누구나 파마를 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파마 가격이 높아서 부유한 집안 여자들이나 파마를 할 수 있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미군의 공습으로 엉망이 되어, 대부분의 사람이 머리 단장은 고사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 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고급스런 파마 머리까지 한 조선 거주 일본 여자의 사진을 보니 '우리는 그 동안 일본에서 고생하며 지냈는데 조선 거주 일본인들은 호강하며 지냈구나.' 하고 분노한 것이다. 

  이 '식민지 조선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히키아게샤' 라는 관념은 본토 일본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데에 일조했다.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부를 축적하고 전쟁 와중에도 호화롭게 살았다고 비난했다.  물론 식민체제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분명히 조선 거주 일본인이다.  하지만 본토 일본인 역시 식민체제의 간접적 수혜자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신들이 조선 거주 일본인에게 가진 시기심 어린 불만과 분노에, 식민체제에 대한 책임을 통째로 얹어버리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반대로, 38선 이북에서 지내던 일본인들은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소련군은 군기부터 엉망인데다가, 소련 정부가 경제적 여유가 없는 탓에 보급품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 하고 '알아서 현지에서 조달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규율도 제대로 안 잡힌데다가 배고프기까지 한 군대가, 오랫동안 자신들의 적이었으며 이제 패전한 일본인들에게 아량을 베풀었을 리 없다.  소련군은 미군처럼 제대로 법적 절차를 밟고 질서를 유지하며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게 아니라, 사적으로 일본인의 재산을 약탈했다.  한 소련 부대가 어떤 지역을 지나가며 일본인의 재산을 한바탕 훑어가면, 또 다른 소련 부대가 다시 지나가면서 그나마 남은 재산도 쓸어가는 식이었다.

  게다가 미국과 달리 소련은 자기네 땅에서 전쟁을 겪어서 전후복구를 해야 하는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희생되어 노동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거주하던 일본인 중 힘을 쓸 수 있는 나이(18~40세)의 남자들을 시베리아 등으로 압송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렇게 끌려간 일본 남자들은 6~7만명으로 추산되는데 1950년대에야 겨우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을 잃고 남겨진 일본인 여자, 노약자, 어린이의 경우도 일본이나 38선 이남으로 내려가는 것이 한동안 허용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소련군 치하에서 참한 생활을 하거나 거지꼴을 한 채 38선 이남으로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더구나 소련군이 일본 여자들을 성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인 임산부조차 성폭행을 당했다는 둥,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 여자들이 밤마다 소련군의 위안부로 끌려간다는 둥,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듣는 사람을 겁먹게 만드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공포에 질려버린 일본 여자들이 너도 나도 머리를 빡빡 깎았다.  자기 모습을 보기 흉하게 만들면 소련군에게 성폭행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절박감에서 한 행동이다.


  그렇게 38선 이북에서 살던 일본 여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빡빡 머리로 일본으로 귀환하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앞부분에 쓴 것처럼, 그렇잖아도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 거주 일본 여자들에 대해 '혹시 조선 남자의 강간으로 태어난 조선인의 핏줄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귀환한 여자들의 빡빡 머리에 관한 사연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본토 일본인들은 조선 거주 일본 여자들을 한꺼번에 더러운 여자로 매도했다.

  그 와중에 귀환한 여자 일부가 소련 핏줄이 분명한 혼혈아를 출산하는 일까지 생기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돌아온 일본 여자들은, 아직 어린 소녀부터 이미 늙은 할머니까지 조국에 도착하자마자 산부인과 검사를 받는 모욕을 겪어야 했다.




  ◎ 히키아게샤는 무조건 피해자인가? 


  조선, 만주 등 해외에 거주하다가 패전으로 귀국한 일본인들의 삶은 그 후로도 힘겹기만 했다.

  그렇잖아도 재산을 거의 가져오지 못 해서 생활기반이 전혀 없었는데, 패전 후 일본의 물가가 치솟고 집 구하기가 힘들어져 빈민층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동포인 본토 일본인들에게 받는 차별과 멸시였다.  직업을 구하는 데에도, 결혼을 하는 데에도, 히키아게샤라는 점은 항상 걸림돌이 되었다.  히키아게샤의 어린 자식들조차 학교에서 거지라고 놀림을 받고 따돌림을 당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히키아게샤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점점 굳히게 되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해외에서 일본으로 귀환하기까지 일본 정부로부터도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 했고, 구 식민지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구 식민지인들에게 온갖 멸시와 위협을 당하고 재산을 빼았겼으며, 겨우 일본으로 귀환한 후에는 같은 일본인으로부터 차별과 냉대를 받았으니 말이다.


  다만, 그들이 순전히 피해자이기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상황별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나 본토의 일본인에게 당한 일만 놓고 생각해보면 히키아게샤들은 피해자가 맞다.  하지만 조선을 비롯한 구 식민지나 구 점령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놓고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히키아게샤는 요즘의 해외이민 차원에서 다른 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나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구 식민지나 구 점령지에서 누렸던 풍요로운 삶의 바탕에는 현지인들의 피눈물이 깔려있었다.  


  물론 히키아게샤 개개인은 자신들이 현지인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개인은 특별히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현지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식민체제의 수혜를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인이 조선인의 재산을 헐값에 취득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 환경을 조성해놓았고, 상당수의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그런 법제도의 덕을 보아 부를 축적했다.  즉, 애초에 그들이 식민지에서 모은 재산은 떳떳하게 모은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패전 후 일본으로 귀환할 때까지 미군정청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조선인들에게 집단적인 차별과 멸시를 당한 일에 분노했지만, 조선인들은 그와 같은 일을 이미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겪었다.  조선인들이 36년 동안이나 겪은 부당한 대우를, 일본인들은 패전 후 몇 달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한 것 뿐이다.  


  정리하자면, 히키아게샤가 피해자냐 가해자냐 하는 문제는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히키아게샤-일본 정부' 또는 '히키아게샤-본토 일본인' 또는 '히키아게샤-조선인과 그 밖의 일본이 침략한 국가의 사람들' 식으로 각각의 상황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한다.  히키아게샤 개개인의 비참한 경험담만 듣고 그들을 단순하게 피해자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시각은, 그렇잖아도 전쟁 책임 및 식민지배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로 해석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