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Lesley 2016. 7. 17. 00:01


1996년에 나온 청년사판의 개정판.

2016년에 처음으로 정식 출간된 역사비평사판.




  추억의 책과 다시 만나다!


  최근에 일본의 유명한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을 구입했다.

  1960년대에 대중역사서로 나온 책이지만, 내용이 쉬우면서도 알차기 때문에 중국사를 전공하는 학부생들도 많이 읽는다고 한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과거' 라는 옛날 중국의 관료 선발 시험을 주제로 한 책이다.


  사실은 이 책을 이미 갖고 있다.

  대학 시절에 교양과목 레포트를 쓰느라 이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청년사 출간본)  고등학교 교과서와 비슷한 두께(혹은 그 보다도 얇은)로 적은 분량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 때는 구입할 생각까지는 못 했다가, 나중에 졸업하고서 이 책이 절판된 후에야 인터넷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구입했다. (좋은 책과 좋은 영화는 되새김할 가치가 있지요~~)

  그런데 지난 5월에 알라딘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이 책이 새로 나올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비평사 출간본)  저자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1995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증보판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음. -.-;;)  그런데도 굳이 구입한 이유는 이 포스트 끝에서 따로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든 간에 '추억의 책'(!)을 새로운 판으로 읽으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시작과 목적


  과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지만, 보통은 수나라 문제 때로 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수나라 문제 재위기간 중에서도 587년으로 보고 있음.)

  과거는 그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제도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이전에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 자신의 인맥으로 관료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이라면 비도덕적인 행위이며 권력 남용이라고 비난 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비난을 받기는커녕 정실인사니 밀실인사니 하는 개념조차 희미했다.  그런 시대에 모두에게 공평하게 시험 기회를 주고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 즉 객관적으로 능력이 검증된 사람을 관료로 임명한다는 발상은 무척 신선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과거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꾸어 질문하자면 수문제는 왜 과거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과거는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 즉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임용 시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가 없던 시절에도 중국에는 이미 관료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을 따로 고안하여 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 제도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유학 이념이 사회에 뿌리내리면서 그 결과물로 과거가 나왔다고...  얼핏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논어니 맹자니 하는 유학 경전을 반드시 공부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수문제가 과거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과거 제도에는 유학 이념을 널리 퍼뜨리려는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귀족사회여서,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어느 가문 출신인가 혹은 어느 가문에 줄을 대고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명색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황제조차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문제는 이런 상황을 타파하여 강력한 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이루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귀족들과 상관없는 인재를 대대적으로 선발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과거였다.  황제는 과거를 통해 관료 선발권을 손에 넣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관료 예비군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귀족이 아닌 사람들은 고위 관직에 올라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과거는 수나라 다음 왕조인 당나라 때 완전히 뿌리내리게 된다. 

  오랜 세월 특권을 누려온 귀족들은, 과거 시행 초기에는 과거를 우습게 생각하며 경멸하기까지 했다.  자기들처럼 귀한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이나 응시하는 시험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가문의 힘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무척 창피하고 민망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대단한 귀족 가문 출신이든 평범한 가문 출신이든,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똑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의 장점


  과거의 가장 큰 장점은 '공평한 기회 제공' 이다.

  전에는 귀족이 아니면 관직에 오르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이제 평민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귀족 출신이라고 저절로 합격할 수 있는 게 아니니, 평민이 귀족과 같은 선상에서 공평하게 겨룰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법제도적인 공평성은 같은 시대 유럽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놀랍게도 당시 유럽에서는 정실인사는 기본이고 매관매직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서구에서 처음으로 공무원 임용 시험을 실시한 나라가 영국인데, 그 때가 중국에서 과거가 처음 실시되고서 자그마치 1,300년이나 흐른 1870년대였다.  그러니 공무원 선발 및 임용이라는 측면만을 놓고 생각하면, 6세기의 중국은 엄청나게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국가였다. 


  또한 사회 전체의 교양 수준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전에는 관직에 진출하는 건 꿈도 못 꾸었던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서 관료가 될 수 있게 되자, 과거 합격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귀족은 귀족대로 가문의 힘만으로 관직에 진출하면 남들 보기에 창피하기 때문에, 역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과거에 합격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사회 전체의 교양 수준이 향상되었다.  지식계층이 늘어나면 지식계층을 위한 출판사업이 활발해지고, 이것은 다시 사회의 교양 수준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일종의 선순환인 셈이다.


  그리고 과거의 채점 과정은 현대와 비교해봐도 매우 체계적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법시험 등 국가에서 주관하는 중요한 시험의 논술형 답안지를 채점할 때, 응시자의 이름과 수험번호 등 인적사항을 채점관이 보지 못 하게 한다.  물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혹시라도 채점관이 응시자와 친분이 있어서 응시자 이름을 보고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을테니까.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에 시행한 과거의 채점 과정은 그보다 더 엄격하고 세밀했다.  응시자의 인적사항 뿐 아니라 응시자가 작성한 답안지 자체를 채점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수천 명이나 되는 필사자를 고용해서 응시자들이 쓴 답안지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쓴 후 채점관에게 넘기면, 채점관은 그 필사본 답안지를 보고서 채점했다.  혹시라도 채점관과 응시자가 뇌물이나 연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답안지의 필체를 보고서 응시자의 정체를 알아내 합격시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는 역할도 했다.

  과거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거 때문에 학자만 우대하고 무인을 천대하는 풍조가 퍼져서 국가가 문약해진다는 점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에서나 중국 역사에서나, 전쟁이 터졌을 때 후방에 있던 학자 출신 고위 관료들이 삽질(!)을 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작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던 무인들이 학자 출신 관료들의 음모에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도 생겼다.   

  하지만 45세에 일본의 패전을 경험했던 저자는 스스로가 군국주의의 무서움을 경험해서인지, 오히려 군대 문제에 있어서 과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저자는 "군대는 가장 우수한 하인이지만, 그것이 주인이 된다면 최악의 주인이 된다." 라는 영국 격언을 인용한다.  사실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는 일은, 옛날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현대의 국가에서도 어려운 문제다. (공교롭게도 바로 어제 터키에서 군사정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는 소식이 국제 부분 톱뉴스로 보도되었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를 조정의 고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굉장히 부당한 처사 같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군부는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매우 빠르게 타락하고 폭주하는 법이다.  과거가 중국 사회에 완전히 자리잡은 송나라 때부터 군사정변 시도가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과거 제도 덕분에 여론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지식계층이 늘었고, 이런 지식계층은 무가 문을 지배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군사정변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단점


  장점에서 '공평한 기회의 제공' 을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 했다.

  과거는 매우 어렵고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시험이었다.  그래서 신동이니 수재니 하고 소문난 사람이라도 최소한 몇 년은 공부해야 했고,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수험기간이 십 년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었으며, 심지어 수십 년을 과거 공부에 매달리다가 70세가 다 되어 합격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니 학비 및 생활비가 많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결국, 법적으로는 천민이 아니거나 가까운 조상 중 천민이 없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생계에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춘 사람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문제는 과거 제도의 단점이라기 보다는 시대적인 한계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저자의 나라인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봐도,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경제가 발달해서 책이나 문구류를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어지간하면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기회의 평등은 요원하기만 하다.  언론에서도 부유한 가정 출신 학생이 좋은 환경에서 많은 정보를 입수해 공부해서 명문대에 합격할 가능성이 높다며,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은 끝났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과거가 시행되던 시대는 하루 세 끼 먹는 것조차 걱정하던 사람이 많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법적인 기회 균등 뿐 아니라 실질적인 기회 균등까지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경쟁률이 치솟으면서, 과거가 우수한 관료가 될 사람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마치 합격정원 이외의 사람을 낙방시키기 위한 시험으로 변하는 것 같은 현상이 생겨났다.

  위에 쓴 것처럼 과거에 응시하려면 일정 수준의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생산력이 발달하여 부유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나 태평성대가 계속되면 경제와 문화가 함께 발달하며, 응시자 숫자도 늘어나고 응시자들의 실력도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 된다.  하지만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관료의 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경쟁률이 무섭게 치솟을 수 밖에 없다.  과거의 경쟁률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당나라나 송나라 때는 50 대 1에서 100 대 1 정도 되었다.  이 정도 경쟁률도 무척 높다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 명나라나 청나라 때가 되면 무려 3,000 대 1이라는 엄청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시험의 변별력에 문제가 생겼다.  우수한 답안지를 내놓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실력만으로 당락을 결정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불합격시키기 위해서 옥상옥식으로 과거 시험 단계를 계속 늘여나갔다.  그래서 송나라 때만 해도  3단계였던 과거가, 청나라 말기가 되면 무려 11단계(!)로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각 단계가 반드시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번의 시험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서, 실제로는 약 20단계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시험이나 5급 공무원 시험(구 행정고시)이 3단계(1차 객관식 시험 + 2차 논술식 시험 + 3차 면접 시험)로 이루어져 있고, 현대의 고시보다 훨씬 어려웠다는 조선시대 과거도 5단계(소과 2단계 + 대과 3단계)였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정말 엄청나다.  결국, 과거라는 시험이 처음에는 '관료가 될 인재를 효과적으로 뽑기 위한 시험' 이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이 되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요즘 우리 언론에서도 종종 나오는 이른바 고시낭인이 출현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공직으로 나가는 길 말고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하다. (비즈니스맨, 의사, 스포츠 선수, 연예인  등등)  하지만 신분제 사회라서 직업의 귀천을 따졌던 옛날에는,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니 과거 응시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너도 나도 과거에 몰려들어 10년이고 20년이고 과거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송시대에 어떤 황제가 과거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한 노인 합격자를 보게 되었다.  그 노인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이미 73세나 되었는데 과거 공부만 하느라 그 때까지 혼인을 하지 못 했다고 했다.  황제는 노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서 궁녀 중에 미인을 골라 그 노인에게 시집보냈다. (졸지에 칠순 노인에게 시집 간 그 미인 궁녀의 팔자는... -.-;;)  그러자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새 아내가 신랑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면, 50년 전에는 23살이었다고 대답하게나."


  또한 치열한 경쟁률 때문에 각종 부정행위가 나오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설명하겠음.)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거 불합격자들 중에서 반체제 인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에 합격하는 게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수준으로 어려워진데다가 온갖 부정행위까지 판을 치니,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즉, '나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세상이 썩어서 돈 있고 연줄 있는 놈만 합격시키고 나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은 낙방시킨다.' 고 생각하며 사회에 불만을 품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야 그저 술이나 마시며 울분을 토하는 정도로 그쳤겠지만, 그 중에 행동력을 갖춘 사람들은 직접 반란을 주도하거나('황소의 난' 을 일으킨 황소, '태평천국의 난' 을 일으킨 홍수전 등) 반란을 일으킨 사람의 참모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자성의 난' 때 이자성의 참모였던 우금성과 이암 등)

  정말 얄궂은 일이다.  과거는 분명히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관료를 선발하려는 시험이다.  그런데 그런 과거 때문에 오히려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예나 지금이나 시험에는 부정행위가 있었다.


  과거 경쟁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 보니, 자연히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이 쓰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사람이 사는 모습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기본적으로는 다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도 가끔 언론에 보도되는 컨닝 페이퍼, 시험 문제 유출, 채점관이 후한 점수 주기 같은 불법적인 방법이 그 시대에도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먼저, 시험 부정행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컨닝 페이퍼를 살펴 보자면...

  시험장에는 시험 주관하는 쪽에서 나누어주는 답안지 말고는 어떤 종이류도 반입이 안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응시자들의 몸과 짐을 철저히 수색했다.  컨닝 페이퍼를 발견하면 상으로 은 3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했고(업무 성과 제고를 위한 인센티브? ^^), 심지어 응시자들이 먹으려고 가져온 만두를 반으로 갈라 검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응시자들도 온갖 잔머리를 굴리며 군사들의 눈을 피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대표적인 방법이 종이 대신 입고 있는 옷에 시험에 나올만한 사항을 적는 것이다. (설마 그 점잖은 시대에 옷까지 벗어보라고 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이번에 출간된 역사비평사판에는 자그마한 사진으로 한두 컷 밖에 안 실렸던데, 예전 청년사판에는 '시험 부정행위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예를 비교적 큰 사진으로 여러 컷 수록해놓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포에 해당하는 옷에, 어깨부터 무릎까지 닿는 넓은 부분에 깨알같이 작게 빽빽히 글자를 채워놓았다.  복잡하게 생긴 한자 특성상, 작은 글씨로 수천 수만 개의 글씨를 써놓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답안지에 특정 글자를 써서 채점관에게 응시자의 정체를 알리는 방법도 있었다.

  위의 '과거의 장점' 에 쓴 것처럼 채점관은 응시자의 이름도 못 보고, 응시자가 작성한 답안지 대신 다른 사람이 필사한 답안지를 보고 채점을 해야 해서 응시자의 필체도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뇌물을 받는다고 해도, 어떤 답안지가 뇌물을 준 응시자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곤란하다.

  하지만 과거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니, 그것을 뚫는 방법 또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다.  이런 때 쓰는 방법이 '답안지 몇 번째 줄에 어떤 글자를 써넣겠다.' 고 응시자가 채점자에게 미리 귀띔해두는  것이다.  그러면 채점관은 그 글자를 보고 '이게 바로 나에게 뇌물을 바친 사람의 답안지군.' 하며 합격시킬 수 있다.




  시험에는 운이 따라야 한다.


  원래 시험이라는 게 실력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이야 실력이지만, 실력 외에도 시험 합격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다양하다.  예를 들면 시험 문제에서의 운(내가 집중적으로 공부하거나 잘 아는 부분에서 문제가 얼마나 많이 출제되는가가 중요함.), 신체나 심리 상태(수능 시험 보다가 스트레스 때문에 위경련 일으키거나 기절해서 시험 망치는 경우가 가끔 뉴스에 나옴.), 주위 상황(지난 4월 토익 리스닝 시간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모 후보가 하필이면 토익 시험장 앞에서 확성기로 선거유세를 해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망치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음. -.-;;)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실력 이외의 요소는 시험 경쟁률이 치열해질수록 더욱 중요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인과응보의 관념 때문인지, 실력 이외의 요소 중에서도 도덕적인 행실이 강조되었다.

  특히 여자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몸가짐을 매우 엄격히 해야 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없다고 믿었다. 


  예를 들자면, 전설의 고향 수준의 괴담이 있다. 

  한 응시자가 답안지를 작성하다 말고 갑자기 미쳐날뛰며 용서해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람들이 그 응시자의 답안지를 보니 글씨는 하나도 없고 뜬금없이 여자의 신발 그림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응시자는 예전에 하녀를 강간해서 자살하게 만들었는데, 과거 시험을 보는 중에 그 하녀의 귀신이 나타나 응시자에게 복수해서 미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몸가짐을 바로 했기에 운좋게 합격한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응시자의 답안지가 별 볼 일 없어서 채점관이 불합격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답안지에 '불통(불합격)' 이라고 쓰려고 할 때면 하늘에서 '안 된다' 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런 기이한 일이 한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생기자, 채점관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그 응시자를 합격시켰다.

  알고 보니 그 응시자는 과거 공부를 하면서 생계를 위해 의원 노릇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척 가난한 선비가 병에 걸려 죽어가자 딱한 마음이 들어 무료로 치료해줬다.  그러자 그 선비의 아내가 보답의 뜻으로 응시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겠다며 응시자의 방에 들어왔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고 남편도 동의했다니, 이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  응시자는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밤새도록 종이에 '안 된다' 는 글씨를 되풀이해 쓰며 겨우 유혹을 떨쳐냈다.  그리고 그 올바른 행동 덕분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많이 생겨난 데에는, 엄청난 경쟁률 때문에 합격에 상당한 행운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국 과거 시험장 특유의 피말리는 분위기도 한몫 했다.

  우리나라 사극이나 옛날 그림 속에 묘사되는 과거 광경을 보면, 대낮에 관청의 널찍한 마당 안에 응시자들이 모여 앉아 한나절 정도 시험을 본다.  그런데 중국은 시험 규모에서나 시험 일정에서나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몇 배 수준이었다.  중국의 각 지방마다 '공원' 이라는 과거 전용 시험장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공원 안에는 마치 현대의 옷장과 사설 독서실 책상을 합쳐 만든 것 같은 1인용 공간인 '호사' 가 적게는 수천 개에서 많게는 수만 개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 곳에서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수험생이 자그마치 2박 3일(!)씩 머물면서 시험을 봤다. 

  시험이 며칠이나 걸리니 과거 응시자는 당연히 이불 보따리, 식량, 취사도구 등을 지참하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2박 3일의 시험 기간 동안 공원에서 잠을 자든 밥을 해먹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였다.  그러나 수많은 응시자가 한 곳에서 사흘간 함께 있어야 하니, 누구도 편히 잠을 자거나 느긋하게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맞은편 혹은 옆자리 호사에서 경쟁자가 열심히 답안지를 작성하는 것을 보면, 경쟁심이 불타오르고 조바심이 잔뜩 나서 혼자만 뒤쳐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높은 경쟁률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데, 며칠씩 제대로 못 먹고 철야까지 하며 머리를 쥐어짜 답안지를 작성했으니...  시쳇말로 유리멘탈 지닌 사람은 극심한 압박감을 못 이기고 히스테리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히스테리 발작으로 중요한 시험을 망친 가엾은 응시자를 두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 평소 품행이 나빠서 천벌을 받은 모양이군.' 식으로 생각했다. (시험 망친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이 무슨... -.-;;) 




  14세로 보이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학교시라는 시험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과거와 비교하면 소과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예비시험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원래는 어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과거 응시자가 늘고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도 학교시에 합격 못 해서 몇 번씩 응시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자 시험을 주관하는 쪽에서는 관례를 올리는 15세를 기준으로 삼아, 응시자를 두 무리로 나누어 선별적으로 대했다.  즉, 14세까지는 어린 아이로 보아, 어린 아이에 걸맞는 쉬운 문제를 주고 채점할 때도 관대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15세부터는 어른으로 보아, 어른 수준에 맞는 어려운 문제를 주고 채점도 엄격하게 했다. 


  여기에서 웃지못할 희극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호구 조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았고 얼굴을 확인할 사진도 없어서, 마음만 먹으면 나이를 속이는 게 가능했다.  그래서 이미 14세를 넘긴 사람들도 14세라고 거짓말을 하며 나이로 인한 불이익을 피하려 했다.  옛날에는 성인 남자는 누구나 수염을 길렀기에, 성인 남자의 상징인 수염을 깨끗이 밀고 나타나서 자기가 14세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나마 20대가 14세인 척 하는 것은 양반이고, 40대나 50대인 사람마저 14세라고 우기는 일이 흔했다. -0-;;  오죽하면 어떤 늙은 응시자가 수염을 깍고 시험을 본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평생을 함께 산 아내에게 "너는 누구네 집 아이인데 우리집에 왔느냐?" 라는 소리를 듣고 쫓겨났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정성들여 면도를 해봤자 본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일정 연령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아무리 14세라고 우겨봐도,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시험 감독관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나이 속이기가 만연해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되고 보니, 시험 감독관 입장에서도 부정행위라고 적발하는 게 곤란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상황이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수염만 없으면 눈감아줬다. (물론 감독관 재량이라서 엄격한 감독관이 엄격하게 시험 규정을 들이대면, 그 응시자는 꽝... -.-;;) 




  기타


  1. 옛날에도 족보가 있었다.


  현대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처럼, 옛날 학자들도 공부에는 기초가 중요한 법이라며 기본서인 사서삼경을 꼼꼼히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공부법은 싫어한다.  그 대신, 시험에 나올만한 부분을 족집게처럼 집어주며 역대 과거 시험 문제(기출문제)를 모은 요약정리집, 즉 요즘 말로 족보라고 하는 것을 애용했다.

  조정에서는 올바른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족보 판매를 금지했다.  심지어 여러 응시자가 답안지에 거의 비슷한 문장을 쓴 것을 발견하면, 그 응시자들이 족보를 달달 외운 것으로 간주해서 그들 모두를 불합격 처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응시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쉽게 합격하기를 원했고, 책방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돈을 벌기를 원했다.  그래서 족보 판매 금지령은 그 순간에만 효과가 있을 뿐,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슬그머니 족보가 책방에 등장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2. 선거라는 용어의 유례


  지금은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한 국가나 한 지역을 이끌어갈 공직자를 선출하는 것을 '선거(選擧)' 라고 한다. 

  하지만 선거는 원래 관료를 등용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선거를 위한 시험이 과목에 따라 여러 과(수재과, 명경과, 진사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당나라 때부터 '과에 따른 선거' 라는 뜻으로 과거(科擧)라는 용어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3. 노인 특례라고 부를만한 특별합격 제도가 있었다.


  과거의 여러 단계 중에 향시라고 하는 시험이 있는데, 이 향시에서는 노인을 정원 외로 합격시켜주었다.

  즉, 70세 이상의 노인은 답안지 형식만 제대로 갖추었으면, 내용이 어떻든 간에 합격할 수 있었다.  노인을 공경하는 의미에서였는지, 아니면 그 때까지 계속 낙방한 게 불쌍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특별합격을 시켜주기는 했는데...

  문제는 70세라는 나이가 관료의 은퇴연령이라는 것이다. -.-;;  결국, 70세라는 이유로 향시에 특별합격해봤자 '내가 과거에 최종 합격은 못 했지만 중간 단계까지는 합격했다.' 는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될 뿐, 실제로는 관료 생활을 하지 못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70세 이상의 특별합격자가 너무 많아졌다며, 특별합격 커트라인(?)을 80세로 올려버렸다.  지금처럼 평균수명이 높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70세 이상의 특별합격자가 많았다는 것을 보면, 그만큼 과거 응시자가 많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뱀발 - 꼬여버린 첫번째 북펀드 / 내 이름은 어디에?


  북펀드라는 건 일종의 크라우드 펀딩이다.

  알라딘이 중소 출판사와 알라딘 회원 사이에서 중매(?)를 서서, 출판사는 알라딘 회원들의 투자로 출판자금을 조달하고, 투자한 알라딘 회원들은 일정 기간 후에 책 판매량을 계산해서 원금과 수익을 돌려받는다.  출판사가 출판 자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작은 규모 출판사라 자금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투자라고 해서 무슨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처럼 큰 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니다. 

  펀딩 품목이 책이다 보니 애초에 대박 터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리고 약정한 판매량을 넘어선다 해도 이익금의 상한선이 원금의 20~30%로 정해져있고, 애초에 투자액 상한선도 5만원이다.  그래서 본전을 제외한 실수익액은 아무리 많아봤자 15,000원이다.  이 15,000원의 수익을 올릴 가능성도 매우 낮아서, 대부분은 본전치기로 끝난다.

  그러니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북펀드에 참여하면 곤란하다.  그저, 자신이 관심을 둔 책의 출판에 기여했다는 작은 자부심  +   북펀드로 출간된 책의 1쇄에 투자자들 이름이 나온다는 뿌듯함(단,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이름이 빠짐.)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전부터 나도 이 북펀드에 한 번 참여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눈길이 가는 책이 없었다.

  그런데 5월에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에 대한 북펀드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읽어봐서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딱이구나 싶어, 얼른 3만원(!)을 투자했다.

  위에 쓴 것처럼 큰 이득을 낼 수 없는 펀딩이라서 애초에 이익을 노린 것이 아니다.  다행히 원금은 보장되니, 괜찮은 책에 내 이름 석자 박아넣어보자는 마음에서 투자한 것이다.  책의 후원자(!)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도 나름 뿌듯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정보다 한 달 넘어서야 겨우 출간된 책을 주문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니, 내 이름이 없다...! ㅠ.ㅠ  분명히 책에 이름 남기는 쪽에 클릭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라딘에서 역사비평사로 투자자 정보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긴 건지, 아니면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내 이름이 누락된 건지... 

  나 삐쳤다. -.-;;  역사비평사 출간본을 청년사 출간본과 나란히 둘 생각이었는데, 그냥 청년사 출판본만 소장하련다.  역사비평사 출간본은 헌책방으로 떠나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