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서점 등

황현의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원제 : 오하기문)'

Lesley 2016. 9. 25. 00:01




  이번에 포스팅하는 책은 조선 말기의 재야 지식인 '황현'이 쓴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다.

  이 책의 원제는 '오하기문(梧下記聞)' 인데, 직역하면 '오동나무 아래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다' 가 된다.  황현이 자기 집에 있는 오동나무 아래에서 저술했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책 제목을 한글로 풀어쓰면서 '들은 것을 기록하다' 대신 '역사를 기록하다' 라고 했는데, 이렇게 의역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오하기문이란 책은 조선왕조실록처럼 권위있는 사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현이 개인적으로 모은 자료를 토대로 쓴 기록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과 순종 부분은 기록이 매우 간단하고 또 일본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상태로 편찬되었다.  그래서 조선 말기의 일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황현이 쓴 이 책은 소중한 자료가 된다.

  물론, 지금처럼 온갖 출판물, TV, 인터넷 등으로 많은 정보를 쉽게 모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 중에는 오류도 있다.  그러나 당시 황현의 상황에서 입수할 수 있는 자료는 다 입수하여,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담아 생생한 필체로,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관과는 별도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이만큼 많은 정보를 담은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자세히 기록했다.  그래서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라는 제목 밑에 따로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라는 부제를 붙였을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은 본문만 550페이지가 넘어서, 전체 내용을 정리해서 쓰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인상 깊고 흥미진진했던 부분 위주로, 붓 가는대로... 가 아니고 컴퓨터 키보드 쳐지는대로 써보겠다. ^^




  ◎ 난세의 지식인 황현 / 황현의 시선으로 본 동학농민전쟁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본 사람이라면 '황현(혹은 호까지 붙여서 '매천 황현')' 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을 것이다.

  극중 어떤 사건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 때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에게...' 식으로 나레이션이 깔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하기문' 보다는 '매천야록' 의 저자로 더 유명하다. 


  황현은 전라도 광양 태생으로, 고종 및 순종 치세를 살다가 경술국치 때 자결한 인물이다.

  한 때 아버지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일생 대부분을 재야에 묻혀 살며 집필활동에만 몰두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해서 관료가 되어 정계에 나가는 것에 회의를 느낀 탓이다.  어쩌면 정계 진출에 대해 그저 회의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과거에 응시해서 처음에는 1등으로 합격했다가, 서울의 세도가들과 아무 연줄 없는 시골 출신 선비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리는 어처구니 없는 경험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고향 광양 근처에 있는 구례에 은거하면서 여러 책을 저술했다.  특히, 이 책에는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황현 스스로가 동학이 널리 퍼져있고 또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전라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에 대해 보고 들은 것도 많고 관심도 높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이 긍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지만,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민중이 일어서서 썩어빠진 지배층과 우리나라를 노리는 일본에 맞서 싸운 '반 봉건적이고 반 외세적인 항쟁' 으로  말이다.

  그런데 황현이 동학농민운동을 대한 시선은 지금 우리의 시선과는 많이 다르다.  황현도 썩을대로 썩은 당시 정치인들을 맹렬하게 비판했고, 그런 정치인들 때문에 고통받던 민중의 비참한 처지에 분노하고 개탄했다.  하지만 결국 황현도 양반으로 태어나 유학 교육 속에서 성장한 유학자였기 때문에, 양반과 유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동학농민운동이 정치인들의 무능과 탐욕 때문에 벌어졌다는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또 그런 상황을 비판했지만, 동학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 했고(심지어 동학을 천주교와 사실상 같은 종교로 볼 정도였음. ^^;;)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서도 동학농민군을 거의 '도적' 이라고 부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은, 황현이 자신의 견해에 어긋나는 사실마저 온전히 기록했기 때문이다.

  황현이 이 책을 썼던 때는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 이 책 내용 중에는 사실관계가 틀린 것도 제법 있다.  하지만 애초에 부정확한 정보를 입수해서 사실관계를 잘못 적은 것은 있어도, 자신이 동학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동학농민군에 대해 없는 사실을 꾸며서 비난하거나 동학농민군이 잘한 행동을 일부러 누락하지는 않았다.  동학농민군이 잘한 것은 잘한 것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대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했다.

  그래서 분명히 전체적으로는 동학농민군을 비판하는 논조의 책인데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아, 이래서 당시 나라에서 동학을 그렇게 금지하고 탄압했는데도 백성들이 동학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황현은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와는 별도로,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후세에 남기려 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권력과 부를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행동을 일삼는 현대의 일부 역사학자와 언론인들과 비교가 된다. 




  ◎ 보은집회 / 동학의 탄생 배경


  1893년도 기록에서부터 동학에 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 해에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동학의 교조신원운동 중 하나로  보은집회라고 배운 사건이다.  그 전부터 조정에서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해서 사교로 규정하고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를 사형시키는 등 탄압했다.  하지만 동학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세를 불려나가다가 마침내 보은집회를 열게 된 것이다.

  당연히 보은집회는 조정과 지식인층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지금도 수만 명이 모인 집회라면 대규모 집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보다 인구가 훨씬 적고 교통도 훨씬 불편하던 그 시절에, 조정이 사교로 규정한 동학이 그냥 명맥을 유지한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을 한 곳에 집결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중죄인으로 보고 사형시킨 최제우를 신원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 것이다.  황현에게도 이 일은 충격이었는지, 이 책 첫부분에서는 철종 말기와 고종 초중기 세도정치의 문란함과 폐해에 대해 서술하다가, 보은집회를 계기로 주로 동학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황현은 동학이 생긴 연원을 설명하면서, 동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동학을 서학(천주교)과 별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이름만 바꾼 것으로 보았다.  즉, 동학이나 서학이나 천주(하느님)를 숭배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서학과 다른 특별함을 보이고 싶어서 동학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설명했다. -.-;;  그리고 동학이 신비해 보이는 말과 속임수(각종 예언이나 주문)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비판했다.

  황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에 관하여, 여러 당파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한 것 빼고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다를 게 없다고 썼을 정도로, 매우 박하게 평가했다.  그런데 그런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한 일에 대해서는,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한 일 중에 가장 통쾌한 일이었다고 칭찬했다. ^^;;  그 정도로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봤으니, 그런 천주교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동학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다.  

  동학과 천주교를 동일하게 본 것이 당시 지식인층의 일반적인 견해였는지 아니면 황현 혼자만의 견해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리학을 절대적인 진리로 신봉하던 대다수 양반 입장에서 보자면, 동학이나 천주교나 삼강오륜을 해치고 반상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혹세무민의 종교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황현은 동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했고 또 안 좋은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어째서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늘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했다.

  황현이 살던 호남 지방은 조선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라 물산이 풍부해서 탐관오리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서울에서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 소원이다." 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호남의 수령으로 임명된 양반들은 백성들을 있는대로 쥐어짜며 욕심을 채웠다.  당연히 백성들의 불만과 원한이 하늘을 찌르게 되고, 그런 백성들이 너도 나도 동학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았다.

  결국, 동학의 가르침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동학이 보은집회라는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은, 얄궂게도 동학을 사악한 가르침이라고 비난한 지배계층의 탐욕과 부정부패 덕분이었다.   




  ◎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학정으로 민란이 터졌다. (조병갑의 학정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자세히 설명하겠음.)

  조정에서 봐도 조병갑이 그 동안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힌 게 사실이기에, 조정에서는 민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강경히 진압하기 보다는 회유하려 들었다.  또한 조병갑 대신 부임한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도 백성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태도로 잘 달랬기 때문에, 민란은 그대로 가라앉는 듯했는데...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와 당시의 전라감사(전라도 관찰사) 김문현이 그럭저럭 무마되려던 민심을 들쑤셔 일을 키웠다. 

  먼저, 이용태는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파견되었건만, 민란의 원인 제공자인 조병갑을 두둔했다.  그리고는 조정에서도 용서한다고 했던 민란 참가자들을 반역죄로 처단하려 들었다.  그런가 하면 김문현은 한 술 더 떴다.  부유한 백성들에게 민란에 앞장섰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 일을 빌미로 재물을 두둑히 뜯어내려 들었다. (일종의 전쟁특수? -.-;;)

  이용태와 김문현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으로, 겨우 수습되는 것 같았던 민심이 다시 술렁거리게 되었다.  조정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백성들이 그 전보다 더욱 분노하여 다시 봉기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라감사 김문현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부에서 터진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분명히 조병갑이다.  하지만 김문현도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다.

  원래 조병갑은 민란이 일어나기 전에 임기 종료로 고부군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문현과 조병갑이 인척  사이였다.  그래서 전라도 각 지역의 수령들을 관리.감독하는 위치에 있던 김문현이 조병갑 봐주기에 나섰다.  즉, 조병갑이 고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임금에게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이다.  그래서 조병갑은 고부군수 자리에 유임되었다.

  저 밑에 따로 쓴 조병갑 항목을 읽어 보면, 조병갑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은 이완용이 애국자란 말과 같은 수준의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  그러니 결과론적으로만 따지자면, 김문현 때문에 조병갑이 고부 백성들을 계속 괴롭히다가 고부민란이 터진 셈이고, 또 김문현이 겨우 잠잠해지는 것 같던 고부의 민심에 불을 붙여 동학농민운동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동학을 무척 싫어했던 황현이지만, 이용태와 김문현 및 기타 관리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했다.

  사실, 황현은 민란에 강경히 대처해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조정이 민란 가담자들에게 회유책을 쓴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한 고을의 민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이, 사건이 수습되는 단계에서 뒤늦게 등장한 고위 관리들의 터무니없는 짓 때문에,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엄청난 사태로 이어진 게 너무 한심했던 것이다.


  또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친 관군들의 행태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은 동학농민군의 행태도, 비교해 기술했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은 교만하고 거칠었다.  행군을 하다가 민가나 상점을 약탈하곤 해서, 관군이 지나간 마을에는 닭이나 개도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반대로 동학농민군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엄하게 단속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행군하다가 남의 보리가 쓰러진 것을 보면 일으켜주고 갈 정도였다.

  관군이나 동학농민군이나 따로 식량을 지참하지 않고 행군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그런데 황현이 '도적' 이라고 부른 동학농민군은 민심을 얻은 덕에 쉽게 식량을 얻었지만, 정작 관군은 백성들에게 미움과 두려움을 샀기 때문에 백성들의 협조를 제대로 얻지 못 해 굶주림에 시달렸다.  동학농민군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대부분 농사꾼으로 이루어진 동학농민군이 정규군인 관군을 상대로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같은 해 4월에는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가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었는데, 이 때에도 관리들은 비굴하고 구차한 행태를 보였다.

  먼저 전라감사 김문현(고부 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워 재물을 받아내려 해서 일을 크게 만든, 문제의 그 김문현. -.-;;)은 전라도 및 전주의 책임자로서 전주성을 지키지 못 한 것으로도, 이미 큰 죄를 지은 셈이다.  그런데 헌옷과 짚신으로 가난한 백성처럼 위장한 채 전주성에서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런가 하면, 판관 민영승(성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일가친척이라 관직에 오른 인물임.)은 그 와중에 잔머리를 굴리는 얄미운 행태를 보였다.  민영승도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전주성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도망쳤는데, 나중에 조정에서 그 일로 문책당할 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마침 어떤 참봉이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동학농민군 손에 떨어질까봐, 영정을 가지고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태조의 영정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주성을 버렸노라는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그 참봉에게서 영정을 빼앗아 달아났다. -.-;;


  전주가 함락되던 4월에 그 난리 북새통에도 과거 시험이 시행되었는데, 이 때의 부정합격 문제가 정말 심각했다.

  전에 중국의 과거 시험에 대한 책을 포스팅 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http://blog.daum.net/jha7791/15791300)  그 책에는 중국에서 과거 응시자는 물론이고 과거를 관리하고 채점하는 관리마저 황당하다 못 해 기발한 방식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시절 조선의 과거도 중국의 과거보다 더 부패하면 부패했지, 결코 덜 부패하지는 않았다.

  나라를 이끌어갈 관리를 뽑는 시험이 그냥 썩은 정도를 넘어서 썩어 문드러질 정도니, 그런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된 사람들이 탐관오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탐관오리가 전국의 수령 자리에 앉아 백성들을 착취했으니, 동학농민운동 같은 큰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황현이 이 해의 과거에 대해 기록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면...

  먼저, 나라의 재정이 파탄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왕인 고종마저 돈을 받고 과거에 합격시키는 일에 나섰다. -.-;;  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 합격자를 원래 합격 정원보다 100명이나 늘였을 정도다.  이 포스트 앞머리에 썼듯이, 황현도 원래 과거에서 1등으로 합격했는데 세도가의 빽(!)이 없다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과거 합격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금품이 오간 것을 보면, 황현이 1등에서 2등으로 밀려난 것 정도는 부정행위 축에도 끼지 못 할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뒤숭숭한 민심을 위로한다면서 나이 많은 사람이나 세자(훗날의 순종)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을 특별히 합격시켜줬는데, 여기에도 비리가 판을 쳤다.  아직 머리가 세지도 않은 사람(아마도 30대 혹은 40대 정도의 사람)이 여든 살 노인이라며 합격하는가 하면, 이미 마흔 살을 넘긴 사람이 그 때 겨우 만 20세 밖에 안 되는 세자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합격하기도 했다. -0-;;  이런 부정합격 뒤에는 당연히 거액의 뇌물 또는 세도가와의 연줄이 작용했다.

  또한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영휘(민영준)는 거액의 뇌물을 받기로 약속하고 영남 지방의 어떤 유생을  합격시켜줬다.  그런데 그 유생이 가난하다는 소문을 뒤늦게 듣고, 약속한 뇌물을 못 받을까봐 합격을 취소했다.  하지만 그 유생이 밤새 애를 쓴 끝에 부유한 상인을 보증인으로 내세우자, 그 유생을 다시 합격자 명단에 올려줬다. (빚 보증인도 아니고 뇌물 보증인이라니... -0-;;)




  ◎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폐해


  동학농민운동 초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기율이 엄해서 민심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단, 동학농민군은 철저히 위계질서가 잡힌 조직이 아니라 각 지역의 접주가 자기 무리를 이끌고 별도로 움직이는 조직이라, 같은 동학농민군이라도 행동이 통일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전라감사 김학진(위에 등장한 전라감사 김문현이 여러 문제 때문에 결국 귀양간 후 새로 전라감사가 된 사람.)이 동학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함께 국난에 대처하자고 제의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동학농민군의 대표적인 접주 전봉준은 김학진의 제의에 응했지만, 또 다른 유력한 접주 김개남은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별도로 움직였다.  이렇게 조직이 제각각 움직이면 당연히 행동이나 규율이 통일되지 않아, 구성원을 일일이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또한, 각 지역마다 수만 명 단위로 움직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끼여있었다.

  예를 들자면, 일부 양반(심지어 몇몇 지방의 수령마저...!)들도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했다.  그 중에는 정말로 동학농민운동의 목적에 공감해서 가담한 사람도 있었지만, 시세에 영합해서 동학농민군에서 한 자리 맡은 걸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온갖 천대를 다 받으며 살았던 천민 중에서는 그 동안의 한을 풀 생각으로 함부로 살육을 하고 노략질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황현이 기록한 동학농민군의 폐해 중에서 한 가지 사례만 소개하자면 '늑혼(강제혼인)' 이라는 게 있다.

  동학농민군에는 아이들(아이들이라고 해도 코흘리개는 아니고, 장가들 때가 된 10대 중후반의 소년들을 말하는 듯함.)로 이루어진 '동몽군' 이라는 부대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없는 나이인데다가 동학농민군이 계속 승리하는 상황에 기고만장해서 그랬는지, 황당한 짓을 저질렀다.  나이가 찬 처녀가 있는 집의 문에 수건을 걸어놓고서, 그 수건을 정혼의 증거 및 신랑이 보내는 예물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수건이 한 번 걸린 집 처녀는, 그 처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과 정혼할 수 없었다.  물론 동학농민군이 승승장구 할 때라, 총각이 있는 집에서 후환을 두려워해서 감히 그 처녀 집에 청혼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양반 집안이고 서민 집안이고 간에, 동몽군 때문에 딸의 앞길이 막힐까봐 겁을 먹은 부모들이 허겁지겁 딸을 혼인시키려 했다.  동몽군의 눈을 피하려다 보니,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도 못 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식으로 혼사를 치뤘다.  나중에는 동몽군이 처녀들을 차지하려고 해도, 대부분의 처녀가 후다닥 시집을 간 뒤라 처녀라고는 코흘리개 아이들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상황에 동몽군 스스로도 기막혀하며 신경질을 낼 정도였다.  이 때의 어수선한 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이렇듯 어지럽게 뒤섞여서 시골 마을은 마치 미친 것 같았다."


  9월에 경상도 하동이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이 경상도 쪽으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갑자기 경상도 농민들을 위한 대책을 줄줄이 내놓았다.  그렇잖아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전체를 휩쓸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런데 흉년으로 고통받던 경상도 농민들이 동학농민군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이자, 경상도마저 동학농민군 수중에 떨어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의정부에서 '경상도 지역의 세금 체납액을 탕감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며 아전들의 농간을 막는다.' 는 것을 골자로 하는 총 10개의 대책을 임금에게 올리자, 임금도 마음이 급했던지 곧 시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대책 중 마지막 열번째를 읽어보면 "도내(경상도내)에서 백성들이 일으킨 소요 사건은 오로지 정한 것 이외에 세금을 더 거두는 데서 비롯되었으므로..." 라고 되어 있다.  즉, 조정에서 금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계속해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하는 원인이 '지방 수령들이 법으로 정한 세금 외에도 온갖 명분으로 세금을 거두며 백성들을 등쳐먹기 때문' 이라는 것을 조정에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기만 하면 뭐하나, 알면서도 고치지를 않아서 기어이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 -.-;;) 


  좀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군의 규모가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 비중있게 등장하는 동학 접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 부대는 보통 수만 명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보다 인구가 훨씬 적던 그 시절에 수만 명 규모의 부대가 몇 개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지 않는 비교적 소규모의 부대도 틀림없이 있었을테니,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총 인원은 수십만 명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김개남이 자기 부대를 이끌고 활동 중심지로 삼았던 남원을 떠나 전주로 출발할 때의 모습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포와 화약 등의 무기를 짊어진 사람이 8,000명에 이르렀고,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행렬은 100리에 걸쳐 이어졌다."  정규군이 아닌데도 대단한 규모의 부대다.  이렇게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윗문단에 나오는 것처럼 백성들이 지방 수령들의 수탈에 지치고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에는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 때에도 그런 참혹한 일이 있었다.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었던 하동이, 영남우도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탈환되었다.  그러자 하동의 군대가 일본군을 인도하여 광양(하동을 공격했던 동학농민군의 근거지)을 공격했다.  이 때 동학농민군만 1,000명 넘게 죽었는데, 동학농민군이야 원래 관군과 적으로 맞서 싸우는 사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문제는 일반 백성들의 피해도 막심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군을 도적이라 부르며 싫어했던 황현조차 "이때 하동 군대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참혹한 짓거리는 도적들의 그것보다 훨씬 심했다." 라고 기술할 정도였다.  나중에 관군의 고위급 장수인 이두황이 광양에 도착해서 살육과 약탈을 금지한 후에야, 이 끔찍한 상황이 겨우 끝났다.

  그런가 하면 나주는 일본군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나주는 동학농민군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를 잘 해서 함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군이 나주를 구원해주겠다며 와서는, 오히려 여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지만, 나주목사 민종렬은 일본군과 시비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며 일본군의 패악을 막지 못 했다.




  ◎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 전봉준과 김개남의 죽음


  11월에 관군과 일본군에게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후,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급속히 꺾였다.

  게다가 전봉준과 김개남 등 지도자급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체포되어 처형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급 인사 중 전봉준과 김개남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전봉준' 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동안에도 기세가 대단했다.

  자신을 담당한 지방관리들에게 '너' 혹은 '너희' 라고 하대하는가 하면, 술이나 인삼 등을 요구하는 등 거리낌이 없었다.  관리들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면 꾸짖었는데, 관리들이 화를 내거나 비웃기는커녕 모두 전봉준을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심문받을 때,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박영효와 서광범을 크게 꾸짖었다.  황현은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영효나 서광범에게 호의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황현의 눈에는, 과거에 일본의 힘을 빌어 정변을 기도했고 이제 다시 일본의 힘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박영효나 서광범도, 전봉준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나은 점은 하나도 없는 역적일 뿐이었다.  그래서 "...봉준이 죽음을 앞에 두고 서광범과 박영효 이 두 역적을 크게 꾸짖었지만..." 이라고 썼다.


  황현은 전봉준이 박영효를 꾸짖었다고만 기록했는데, 각주에 뭐라고 꾸짖었는지 자세히 실려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어 보면, 현대의 국민이 위정자를 비판할 때 그대로 써도 될 정도다.  그만큼 준열하고 논리적이며 시대를 앞선 발언이다.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의 평등적 정치를 잡은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사에 소비하는 왕세 공곡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중인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써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 도리에 위반이라.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나쁜 정부를 고쳐 착한 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드렸나니 네 죄 가장 중대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전봉준의 발언을 요즘 식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부패한 공직자를 적발하여 처벌하고, 국가의 세금이 위정자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소비되는 것을 막고, 정재계의 거물급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이용해서 서민들의 피땀을 긁어 더욱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것이다.  또한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개발해야 할 토지로 부동산 투기나 일삼아 빈부격차를 커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며, 나쁜 정권을 착한 정권으로 바꾸겠다는 게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나라 국민들을 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전봉준이 비록 실패한 혁명가라고는 하지만,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짧은 기간이나마 삼남지방을 뒤흔들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했던 전봉준은, 결국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김개남' 에 대해서는 한 가지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관군에게 체포된 김개남이 전주로 압송되어 전라감사 이도재(김문현과 김학진의 뒤를 이어 전라감사가 된 사람.)에게 신문을 받으면서 한 진술이 심상치 않다.  "우리가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이거늘 무엇 때문에 신문한다고 법석을 떠는 것이냐?"  즉, 동학농민운동의 배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밀려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를 한 후에 호시탐탐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의 입김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도재는 김개남의 발언이 정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서, 김개남을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전주에서 곧바로 참수했다.


  김개남의 진술이 사실인지 여부가 궁금하다.

  물론 그 진술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  즉, 어떻게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시간을 벌 생각으로, 혹은 이왕 죽게되었으니 복수 차원에서 조정에 풍파를 불러일으킬 생각으로, 김개남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김개남의 진술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정황이 다른 곳에서 엿보인다.


  김개남의 진술이 나오는 부분에 앞서, 황현은 당시 세간에 떠돌던 심상치 않은 소문 두 가지를 소개했다.

  첫번째 소문은 동학의 또 다른 지도자급 인물인 서장옥이 흥선대원군의 집을 직접 찾아가서 밀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밀서의 내용인즉슨,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과 함께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자' 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썩은 관리들만 몰아내자는 뜻이 아니라, 흥선대원군 자신이 재집권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었을 것임.)

  그리고 두번째 소문은 흥선대원군도 아니고 아예 국왕인 고종이 승지 이건영을 김개남에게 몰래 파견해서 밀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고종이 보냈다는 밀서의 내용은 고종이 동학농민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토벌하려 한다는 것이다.

  황현은 두 가지 소문 모두 동학농민군이 백성들을 현혹하려고 퍼뜨린 헛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런 소문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며 개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책의 역자가 단 각주에는,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일본의 일등 영사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이 나온다

  일본의 일등 영사가 고종이 동학농민군에게 보냈다는 밀서 내용을 파악하고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다만, 일본 일등 영사는 그 밀서가 정말로 고종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흥선대원군이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조선 내부의 사정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일등 영사가 밀서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하고 상부에 보고까지 한 것으로 보아, 밀서 관련 소문이 황현의 생각처럼 전부 동학농민군이 꾸며낸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밀서라는 것 자체는 정말로 있었던 듯하다.

  문제는 그 밀서의 진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고종이 보낸 밀서인지, 아니면 일본 일등 영사가 판단한대로 흥선대원군이 조작한 밀서인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세력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조작한 것인지...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 가지 의외인 것은, 동학농민운동 기간 동안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의 교주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동학이 처음 생겨나고 농민들 사이에 퍼지는 과정을 설명할 때나 몇 번 등장했을 뿐, 동학농민군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전봉준과 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이 조정에 귀화(투항)하라는 최시형의 지시를 깨끗이 무시하는 장면에 등장하기는 했음. -.-;;)  그러더니 동학농민운동이 결국 실패한 후에야 이 책 본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시 등장한다.  최시형이 어디론가 도망쳐서 체포하지 못 하고 대신 최시형의 가족만 체포했다는 내용이다.

  명색이 동학 최고 지도자인 교주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미약한지 모르겠다.  최시형은 그저 명목상의 교주였을 뿐, 사실은 동학 내부에서 교주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 했던 걸까?

 



  ◎ 기타 내용


  1. 갑오개혁에 대한 황현의 평가

 

  황현은 의외로 갑오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황현이 일본을 무척 싫어했고 위험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에 여러 번 쓴 이야기지만, 황현 스스로가 양반이며 유학자다 보니 보수적인 입장에 서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일본의 입김으로 단행된 갑오개혁에 대해서, 더구나 갑오개혁이 신분제도와 과거제도를 철폐하자는 등 양반 중심의 기존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당시 조선의 상황에 필요한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선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법은 아니지만 현재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빨리 시행해야 할 것들이었다." 라고 하는가 하면 "일본 사람들이 낸 의견이라고 해서 그 법을 아예 헐뜯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기도 했다.

  즉, 황현이란 인물이 덮어놓고 양반 신분과 그 신분에서 나오는 특권에만 매달리는 수구 꼴통(!) 지식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속한 계급에 불리한 일이라도, 혼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 고쳐야 할 점이라면 과감히 고치자는 생각을 지닌, 제.대.로. 된. 보수파 지식인이었다.  


  다만, 갑오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좋게 생각했지만, 갑오개혁을 담당할 책임자가 수시로 바뀐 일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지금도 어떤 정책, 더구나 기존의 상황을 뒤집어엎는 정책을 실시하려면 이런저런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반발 속에서도 어떤 성과를 내려면, 그 정책을 이끌어나갈 사람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해줘야 한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갑오개혁 실시를 담당할 여러 부서의 책임자를 수시로 갈아치웠다.  물론 당시 조정에 만연한 매관매직과 정실인사 때문이었다. 


  2.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 조선 조정


  조정에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황현이 무척 안 좋게 평가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다. 

  첫번째 이유는 김학진이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학진이 정말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일단 이것은 조정에서 논의할 가치는 있다.

  문제는 두 번째 이유다.  역대 국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에 다례를 올릴 때 다례상에 유자를 올려야 하는데, 그 유자를 전라도에서 바치도록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김학진이 전라도를 책임지는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다례 날짜에 맞춰 유자를 바치지 못 했다는 것이다. -0-;;


  동학농민운동이란 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조정 대신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동학농민운동이 가장 맹렬하게 기세를 떨친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김학진에게, 아직 동학농민운동의 불길이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왜 다례 날짜에 맞춰 유자를 바치지 않았느냐고 따지며 문제 삼은 것이다.  역대 임금님들께서 유자 못 드셔서 한 품고 돌아가신 것도 아니건만, 온 나라가 동학농민운동으로 들썩이는 마당에 무슨 놈의 유자 타령이란 말인가... -.-;;  

  더구나 김학진의 죄를 묻겠다면서 든 첫번째 이유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는 점' 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황당해진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농민들이 봉기한 대사건이었다.  그 일에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방관리가, 어째서 유자 따위에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역의 다른 지방관들도 무슨 대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을까?

 

  3.  지방 수령들의 극심한 탐학 - 탐관오리의 대표 조병갑


  황현이 살았던 시절에는 지방 수령 상당수가 세도가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을 산 사람들이었다.

  뇌물을 바쳐 지방 수령이 된 사람들은 당연히 본전(!) 이상의 돈을 뽑아내려 했다.  그래서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다.

  조병갑이 고부에서 백성들을 너무 심하게 괴롭혀서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부민란이 일어났다고, 저 위에 이미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조병갑에 대해 따로 항목을 잡아 다시 쓰는 이유는, 이 조병갑이란 사람은 굳이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더라도 별도의 항목에 실릴만한 자격(?)이 있는 엄청난 탐관오리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시대의 수많은 탐관오리를 다 제치고 이 사람 이름만 현대의 역사 교과서에 나오겠나!  역사에 이름 남기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 -.-;;)


  먼저 이 책에 황현이 기록한 내용부터 살펴보자면...

  고부에 흉년이 들었는데, 고부의 지형이 들쑥날쑥해서 지역에 따라 피해 정도가 달랐다. 즉, 고부 북쪽은 곡식 수확을 아예 못 하다시피 했고, 고부 남쪽은 그래도 약간이나마 수확을 했다.  그러자 조병갑은 상부기관인 전라감영에 피해상황을 보고해서, 고부 북쪽 지역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고부 백성들에게는 전라감영이 세금을 면제해주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원래 북쪽에서 내야 할 세금을 남쪽으로 옮겨서(북쪽은 흉년 때문에 도저히 세금을 낼 수 없으니 남쪽 보고 북쪽 몫까지 다 떠안으라고 강요한 모양임.), 남쪽 사람들에게 원래 내야 할 세금보다 2배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  물론 남쪽 사람들이 원래 내야 하는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 액수는 본인이 꿀꺽 삼켰을 것이다.  그리고 북쪽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북쪽 사람들 몫의 세금을 남쪽 사람들에게 옮겨줬으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대가라는 게 원래 내야하는 세금보다 3배가 더 많았다. (뭐지, 이 엄청난 뻔뻔함은...! -0-;;)


  황현이 쓴 것 말고도, 이 책의 역자가 조병갑이 나오는 부분에 각주를 붙여 조병갑의 죄상 14개를 정리해놓았다.

  각주에 나오는 죄상을 읽다 보면, 기가 막히다 못 해 나중에는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다.  어지간한 탐관오리라면 부정부패를 저지르더라도 적당히 눈치껏 저지를텐데, 조병갑이란 사람은 대놓고 막 저질렀다.  도대체 어렸을 적에 무엇을 잘못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까지 썩을 수가 있을까 궁금할 지경이다.  각주에 나오는 조병갑의 죄상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우선, 역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조병갑의 대표적인 죄상으로 꼽히는 '만석보' 에 관한 일이 있다.

  다만, 의외인 것은 교과서에는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든 것처럼 나오던데, 만석보라는 보는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기 전부터 있었다.  조병갑은 만석보 밑에 새로운 보를 만들었을 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만석보에 관한 설명이 제각각이다.  위키백과에는 조병갑이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석보를 쌓은 것으로 나오고, 두산백과에는 조병갑이 만석보를 증축한 것으로 나오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조병갑이 만석보 밑에 신보를 쌓았다고 제대로 나온다.  다만,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보도 그대로 만석보로 취급되어서 '조병갑 = 만석보' 식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이 포스트의 만석보 부분을 두 차례 수정했음.  아이고, 헷갈려~~~)

  하여튼 역대 조정에서는 지방 수령들에게 농사를 위한 수리시설 확충에 노력하라고 독려하곤 했고, 우리의(?) 조병갑도 만석보 밑에 새로운 보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 보가 정말로 백성들의 농사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새로운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명분(정확히 말하면 핑계거리. -.-;;)을 위해서 아무 쓸모없는(!) 보를 만든 것이다.  그런 엉터리 보를 만드는 데 일당을 한 푼도 안 주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보가 완성된 후에는 농민들에게 물세를 강제로 받아냈다.  즉, 농민들은 필요하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물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 바칠 세금을 두고 농간을 부리기도 했다.

  먼저 농민들에게 대동미로 토지 1결당 정백미(최상급의 쌀)16말 가격에 해당하는 돈을 징수했다.  그리고 조정에 대동미를 바칠 때는 품질이 나쁜 쌀을 사서 보냈다.  그나마 그 나쁜 쌀도 양이나 제대로 맞추어 보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분명히 농민들에게 거두어들일 때는 1결당 16말에 해당하는 가격의 돈으로 거두었으면서, 정작 조정에 보낸 것은 1결당 12말씩에 해당하는 양의 쌀이었다.  즉, 조병갑의 손을 거치면서, 조정에 올라가는 쌀의 질도 떨어지고 양도 줄어든 것이다.  물론 그 차액은 조병갑이 착복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재물을 뜯어냈다.

  일단 살림이 넉넉한 백성들(즉, 조병갑이 뜯어먹을 게 많은 백성들. -.-;;)을 목표물로 찍었다.  그 다음에 그 백성들에게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네, 식구끼리 화목하게 지내지 않네, 평소 행실이 음탕하네 등등 온갖 황당한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2만냥 넘게 빼앗았다.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다른 탐관오리처럼 진부하지 않고 상당히 창조적인... -0-;;)


  황현은 이런 조병갑을 인정사정 없이 비판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난 후 생각해 보니, 동학농민운동은 물론이고, 동학농민운동에서 비롯된 청일전쟁, 이 두 사건으로 인한 온 나라의 동요와 몰락이, 전부 조병갑이라는 소인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분노했다.  오죽 분노했으면 요즘으로 치면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이라 할 수 있는 말까지 했다.  즉, 이 책에 "...서울의 세도가 가운데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당파나 본관에 관계없이 모두 탐욕이 습관화되어 마치 이런 성품을 타고난 것 같았다." 라고 썼다. (졸지에 조병갑과 도매금으로 묶여서 욕을 먹은 불쌍한 다른 조씨들... -.-;;)  다행히 그 뒤에 조병갑 일족은 다른 조씨에 비해서 부패한 정도가 훨씬 심했다고 덧붙여서, 모든 조씨가 조병갑처럼 지독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해주기는 했다. ^^;;


  4.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에 제대로 대처 못 한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조선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주일 청나라 공사 왕봉조와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그리고 주청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와 청나라 총리아문 사이에, 몇 차례나 문서가 오갔다.  그 문서들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일본도 조선에 파병을 해서 청일 사이에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파병을 막기 위해, 청나라의 조선파병은 어디까지나 '청나라의 속국인 조선' 의 요청으로 조선을 돕기 위한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독식(!)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벼르던 참이었다.  그런 일본이 청나라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 없다.  일본 측에서는 자신들은 한 번도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며, '조선-일본의 제물포 조약' 및 '청나라-일본의 천진(톈진)조약' 에 따라 자신들도 조선에 파병하겠다고 받아쳤다.


  참 우울한 일이다.

  일본의 조선 파병이 청일전쟁 및 일본의 승리로 이어져서 결국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가는 길에 더욱 가까워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청나라 쪽 손을 들어주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시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명목상 속국이든 뭐든 간에)이라는 유쾌하지 못 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니 말이다.  나라가 힘이 없다 보니 이 나라 저 나라에게 휘둘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유감스러운데,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휘둘리는 일이 과거 뿐 아니라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청일전쟁 중 평양에 평안감사(평안도 관찰사)가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원래의 평안감사는 민병석이었는데, 이 사람은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의 평양 공격에 대항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면서 조선 조정이 일본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김만식이라는 사람을 신임 평안감사로 임명해, 일본군이 평양을 공격하러 갈 때 함께 보냈다.  김만식은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전투를 벌어는 동안에는 임지인 평양으로 들어가지 못 하다가, 일본군이 승리한 후에야 겨우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을 '청나라 감사'라고 부르고 김만식은 '일본 감사' 라고 불렀다.

  조정에서 김만식을 평안도 감사로 임명한 게 본의였는지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는지는 둘째치고(물론 정황상,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을 게 뻔하지만...), 평안감사라는 고위급 관리가 동시에 두 명이 존재하는 상황만으로 조정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두 감사가 각각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편에 선 것 같은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중앙정계에서 대신들이 각자 외세를 끌어들여 친청파와 친일파로 갈라져 싸웠던 것의 대리전 같아서 씁쓸하다.

 

  5. 김개남 -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속 '김개주' 의 모델 


  이 책의 나오는 사람들 중 무척 반가운 이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이끈 김개남이다.

  김개남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속에 나오는 '김개주' 의 모델이 된 사람이다.  학창시절 토지에 푹 빠져서 몇 번이나 읽었다.  토지가 소설이다 보니, 토지에 나오는 동학농민군 장수 '김개주' 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언제였는지 우연히 토지의 작가 박경리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를 통해 김개주의 모델이 된 김개남이란 사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전봉준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충청도로 북진할 때 김개남은 따로 경상도로 진격했다.

  김개남은 양반에 대한 증오심이 유독 깊었는지, 하동이나 진주 등 경상우도를 휩쓸고 다니며 양반들을 많이 죽였다. (다만 이 책에는 김개남이 경상도에서 활동한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고,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한 이야기가 나옴.)  황현이 이 책에 "기범(김개남의 원래 이름은 김기범임.)은 음흉하고 사나웠으며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라든지 "미친 사람 같이 망령되고 포학한 개남의 행동은 도적들 가운데 가장 심했다." 라고 기록한 것을 봐도, 김개남의 성격이 무척 과격해서 양반을 많이 죽이긴 많이 죽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양반들에게 핍박받던 경상도 농민들에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반대로 경상도 양반들에게는 지옥에서 온 악귀 취급을 받았다.


  박경리의 고향인 통영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김개남은 전설적인 인물로 윤색되어 전해졌고, 박경리는 성장하면서 어른들에게 그런 김개남의 이야기를 듣곤했다.  김개남의 이야기는 박경리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훗날 김개남은 토지 속에서 김개주란 인물로 재탄생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김개남이 나오는 부분과,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하동(토지 속 주요 장소적 배경.)을 두고 전투를 벌이는 부분은, 토지를 떠올리면서 읽었다.




  ◎ 분량 관련 사항


  1 .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는 완역본이 아니다.


  이 책은 오하기문의 완역본이 아니다. 

  오하기문은 1860년부터 1895년 3월까지의 부분과 1895년 4월에서 1907년까지의 부분으로 나뉜다.  이 책은 그 중 앞부분만 번역한 것이고, 뒷부분은 아직 번역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읽었기 때문에 본문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드라마에 유행하는 '열린 결말' 도 아니건만, 쓰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뚝 끊긴 채 끝나기 때문이다.  본문 뒤에 붙은 부록을 읽고서야, 이 책이 오하기문 중에서도 동학농민운동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룬 앞부분만 번역한 것임을 알았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뒷부분도 궁금하다.

  1907년까지의 일을 담고 있다니, 조선왕조가 을사조약을 거치면서 그냥 중환자도 아니고 아예 식물인간 상태로 빠져드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번역된 이 책 속 내용처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만이 가능한 생생한 필체로 말이다.  언젠가 이 부분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2. 본문의 단점을 적절히 보충해주면서, 의외의 재미와 정보까지 주는 각주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는 본문만으로도 550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이다. (뒤에 부록까지 합치면 671페이지...!)

  오하기문 전체를 번역한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분량이 많은 이유는, 각주가 무척 많기 때문이다.  어떤 페이지는 각주가 그 페이지의 3분의 1 이나 될 정도로 많다.  각주만 없어도 책 분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역사비평사)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1994년에 이미 출간한 적이 있다. (그 때의 책 제목은 원제 그대로 '오하기문' 이었음.) 그런데 이번에 나온 2016년도판은 1994년도판과 출판사도 역자도 똑같건만, 1994년도판에 비해 분량이 2배로 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994년도판은 축약본이고 2016년도판은 완역본이라서 분량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1994년도판은 원문을 번역한 것만 책에 실어 분량이 적은 편이었다.  이번에 나온 2016년도판은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독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일일이 각주를 달아 부연설명을 해서 분량이 대폭 늘었다. 

 

  다른 책 같으면 각주는 그냥 넘기고 본문만 읽어도 되겠지만, 이 책은 그럴 수가 없다.

  우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정보 수집이 지금처럼 쉽지 않아서,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어떤 사건의 발생일자, 사건 전개 과정, 사람 이름, 관직명 등에 관한 오류)이 꽤 있다.  그리고 그 시대 지식인들에게는 상식이었겠지만 우리 현대인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유교 경전, 고전 시문을 인용한 비유적인 표현)도 많다.  또한 황현이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내린 평가와 완전히 다른 평가도 있을 수 있다.

  역자는 한문으로 된 오하기문 원서를 번역하면서 단순히 번역만 한 게 아니라, 원서 속 내용을 같은 시대의 다른 자료(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우리나라 쪽 관찬사서 +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쓴 저서 + 일본 및 중국 측 보고서나 서적)와 일일이 비교하고 검토했다.  그래서 사실관계가 잘못된 것,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 황현의 평가와 다른 또 다른 평가 등에 대해 일일이 각주를 달아 설명을 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는 주석도 함께 읽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각주라는 것 덕분에 의외의 소득도 있다.  

  각주 상당수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와 문학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다 보니 각주를 읽다 보면, 역사와 문학에 관련된 지식을 단편적으로나마 이것 저것 얻게 된다.


  그 중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황현은 당시 민간에서 크게 유행한 예언서 '정감록' 을 위서라고 생각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몇 페이지에 걸쳐 정감록이 어째서 위서인지 그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설명 과정에서 정감록을 중국의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 에 비유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지난 2월에 사마상여의 봉구황에 대해 포스팅을 하면서 자허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봉구황(鳳求凰) / 탁문군(卓文君)의 백두음(白頭吟)(http://blog.daum.net/jha7791/15791258)  하지만 나는 자허부라는 게 어떤 내용의 시문인지 알지도 못 하고, 또 그 포스트는 어차피 사마상여의 다른 시문을 소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저 자허부라는 제목만 지나가는 것처럼 언급했을 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책 각주에 자허부가 나와서, 자허부가 어떤 내용인지 대강이라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의 소소한 재미도 얻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때 초토사 홍계훈이 김시풍이란 사람을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로 참수했다.  이 일에 대해 홍계훈의 처단이 옳았네 틀렸네 하며 여론이 분분했던 모양이다.  황현은 명나라 말기에 원숭환이 모문룡을 참수했던 일을 예로 들며, 홍계훈의 처단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역자가 원숭환에 대해 따로 각주를 달아 설명하면서, 김용의 무협소설 '벽혈검' 을 언급했다.  벽혈검에 나오는 원승지가 원숭환의 아들로 설정된 인물인데, 아버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 활약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역자가 무협소설 덕후(!)인가 보다.  나도 김용의 무협소설 몇 편을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이런 어려운 책을 번역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학자가 무협소설을 읽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는다. ^^;;




  ◎ 황현의 절명시 - 난세를 살았던 지식인의 고뇌


  황현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되자 자결했다.

  자결하기 전 4편의 절명시를 남겼는데, 이 책 마지막 페이지에 그 절명시 중 한 편이 적혀있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버렸네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곰곰히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황현이 나라가 망한 책임을 통감하며 자살한 게 좀 이상해보일 수 있다.

  황현은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활동에만 힘쓴 사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황현은 일개 백성, 단지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농부가 아니라 지식인층에 속했던 백성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하지만 황현은 스스로에게 그 책임을 물어 목숨을 끊었다.

  위의 절명시 중 마지막 구절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500년 동안이나 이끌었던 지식인층인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 하고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책임감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나라를 망하는 데 한몫 하고도 뻔뻔스럽게 잘 먹고 잘 살았던 친일파들, 그리고 친일파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 고위직에 앉아 나라가 망하는 걸 막지 못 하고도 별다른 책임의식 없이 살았던 여러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비 정신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일단 꽤 두툼한 책이라서 읽자고 결심하는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한글로 번역했다고는 해도 원래 한문으로 쓴 책이라, 문장 호흡이 길고 문체도 요즘의 문체와는 다르다.  그래서 일정 분량 이상을 읽어서 이 책의 문체와 서술방식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난다.

  하지만 그저 공부만 많이 한 지식인이 아닌, 시대와 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절감했던 지식인이 쓴 책이라면,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 같다.  망국의 시대를 직접 겪은 지식인이 붓으로 옮긴 그 시대의 생생한 기록을 읽으며, 그 망국의 시대를 거울 삼고 그 지식인의 심정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