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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Lesley 2016. 8. 6. 00:01


  지난 3월에 본 영화 '동주' 에 관하여 이제야 포스팅을 한다.

  영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 윤동주(강하늘)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윤동주와,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이며 갓난아이 시절부터 한 집에서 자란 친구이기도 하고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송몽규(박정민), 두 사람의 짧은 인생을 담고 있다.  이 두 젊은이가 암울한 시대를 각각 다른 생각과 감성으로 살아가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최후를 맞는 과정을, 감정의 과잉 없이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 동주와 몽규 - 어두운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다가 같은 방식으로 죽은 두 청년 

  

  동주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동주와 몽규는 조선이란 나라가 이미 사라진 때에 태어나 간도의 연변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겹의 끈이 있다.  한 집에서 태어나 쭉 함께 자란 사촌지간(동주의 아버지와 몽규의 어머니는 친남매 사이임.)이며, 동갑내기 친구 사이기도 하고, 두 사람 모두 글쓰기에 재주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친하게 지내지만, 그런 여러 겹의 끈에도 불구하고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미묘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런 차이는 두 사람을 각각 다른 길로 이끈다.  행동파인 몽규는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있지만, 그런 재능을 펼치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장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섬세한 정신세계를 지닌 동주는 집을 지키며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한다.


  한동안 다른 길을 걷던 두 사람이 다시 같은 길을 가게 된다.

  두 사람은 경성(서울)으로 가서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한다.  그러나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세상과 문학을 보는 눈이 같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동주는 몽규가 문학을 도구(비록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를 위한 도구일지라도)로 이용하는 것이 싫지만, 또한 자신이 몽규처럼 과감히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 하는 것에 자괴감을 느낀다.  반대로 몽규는 독립운동이라는 어려운 과제 앞에서 나약한 소리를 하는 동주의 태도를 못마땅해하지만, 그러면서도 친구로서 사촌으로서 섬세한 정신세계를 지닌 동주를 최대한 보호하려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 또 따로 행동한다.  송몽규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항일조직을 만드는 등 직접적으로 행동에 나서지만, 윤동주는 식민지가 된 조국의 상황과 자신의 나약함 및 방황을 시로 풀어낸다.


  그렇게 다른 행보를 보이던 두 사람이지만, 얄궂게도 같은 최후를 맞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후 생체실험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동주가, 얼마 후인 3월 7일에는 몽규가 사망한다.


 

  처음에는 이 영화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굳이 영화관까지 가서 볼 생각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가 반일 분위기에 편승해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부류의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지난 몇 년 한일관계가 심각하게 삐그덕거리면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가 여러 편 나왔다.  애국심을 주제로 삼는 것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완성도는 그냥 그런 수준인데 반일 분위기에 편승해서 대박 터뜨려보겠다는 심보가 너무 드러나는 영화에는 거부감이 든다.  일본과의 관계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었다면, 또 다른 우리나라 영화 '명량' 과 '암살' 이 그렇게까지 히트를 치는 게 가능했을까? (물론 두 영화 모두 영화관을 싹쓸이 했던 것도 생각해야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배우들의 연기력은 딱히 흠잡을 데 없었지만, 이야기 구성이 산만해서 잘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게 동주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다가, 개봉 후 영화평이 워낙 좋기에 영화관으로 갔다.

  다행히 그 좋은 영화평들은 영화 제작사에서 풀어놓은 알바가 쓴 글이 아니었다. ^^;;  영화를 다 보고 영화관을 나설 때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대본도, 배우들 연기도, 주제의식도, 윤동주의 여러 시를 각 시에 걸맞는 장면에 적절하게 나레이션으로 깐 연출도, 모두 좋았다. 


  영화는 옛스런 느낌을 살리기 위해 흑백으로 촬영했다.

  보통은 칼라영화가 시각적으로 더 사실적이며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애초에 흑백영화 시대에 나온 영화를 제외하고 흑백으로 찍은 게 오히려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중국영화 '난징! 난징!' 이고 또 하나가 이번에 본 '동주' 다.

  다만 같은 흑백영화라도 두 영화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난징! 난징!' 의 경우는 남경대학살이라는 대규모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보니, 흑백이 전쟁의 비참함, 살육의 끔찍함, 인간성 상실 같은 느낌을 강조한다.  하지만 동주의 경우는 흑백 영상이 간간히 나래이션으로 깔리는 윤동주의 시와 함께,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너무 일찍 줄어야 했던 윤동주-송몽규의 안타까운 삶을, 역설적이게도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다.




  ◎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동주는 연변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그런데 연희전문학교 시절, 마침내 동경했던 시인 정지용을 만나게 된다.  이미 시인으로 이름 높은 정지용은, 아직 파릇파릇하기만 한 시인 지망생 후배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정지용이란 인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 한다.

  다만 정지용의 감수성 풍부하고 따뜻한 시를 보았을 때, 정지용 역시 동주처럼 식민지 상태인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그 성향상 직접 투쟁에 나서지 못 했던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서도 정지용을 그런 캐릭터로 설정했는지, 동주에게 청년다운 패기가 없다고 일갈하기보다는 동주의 섬세하고 상처받은 마음에 공감을 표시하며 위로의 말을 해준다.


  윤동주 : (일본 유학을 권하는 정지용에게) "그런데...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유학을 간다는 게 웬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정지용 : (자신도 그런 부끄러움을 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고) "부끄럽지, 부끄럽고 말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이렇게 늘 술만 마시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술잔을 들어 비우더니) "자네한테 일본에 유학가라고 권하는 나도 부끄럽고." (한동안 말을 끊더니)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
  윤동주 : (마치 뭔가 깨달은 것 같은 놀란 눈빛으로 정지용을 바라보는)
  정지용 :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정지용이 동주에게 해주는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라는 말이 이 영화 속 동주의 아픔을 제대로 짚어낸 명대사가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눈으로 보자면, 윤동주나 정지용 같은 인물은 비겁해 보일 수도 있다.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잘못된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고도, 그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나서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들이 똑같은 용기와 열정을 품고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각자 자신의 그릇대로 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동으로 나서지 못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시대적 사명에 부응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비록 윤동주는 평생 동안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못 했지만, 시대의 아픔과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고뇌를 읊은 시를 짓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살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섬세했던 윤동주라는 사람이 일제에 저항한 방식이었다. 




  ◎ 윤동주와 송몽규의 미묘한 관계

 

  영화 속 동주와 몽규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눈길을 끈다.

  일단, 이 영화의 일차적인 주제는 영화 포스터에 나온대로 '빛나던 미완의 청춘' 인 두 사람의 삶과, 그 짧은 삶 속에서 겪은 아픔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와는 별도로, 두 젋은이 사이의 심적 갈등이 이차적인 주제로 비중있게 나온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그 속에서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또 순간 순간 희노애락을 느낀다.  동주는 연약한 지식인으로서 고뇌하고 몽규는 열정적인 행동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어다니지만, 두 사람도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람 사이의 갈등을 피하지 못 한다.


  일단, 혈연과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묶인 두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걱정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게 참 복잡미묘해서, 서로에게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감정을 품고있더라도 이런저런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부분을 발견했을 때, 상대방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하지만 또 질투심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동주에게 몽규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위축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동주와 몽규는 모두 문학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동주가 그저 시인 지망생으로 홀로 습작을 하며 지낼 때, 동주보다 겨우 몇 달 일찍 태어난 동감내기 몽규는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자식들이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해서 문학을 전공하는 것을 반대하는 집안 어른들조차, 집안의 자랑이라며 기뻐한다.

  처음에는 몽규를 위해 기뻐하던 동주가 이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차라리 몽규가 밤낮 가리지 않고 글솜씨를 갈고 닦아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것이라면, 동주의 열등감이 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몽규는 문학적 재능은 있지만 동주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이 넘쳐나지는 않는다.  그런 몽규가, 동주 자신은 너무 간절히 원했지만 얻지 못 했던 것을 단번에 얻어냈다.  그러니 동주의 심사가 한결 더 복잡해질 수 밖에... 


  그리고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하는가, 혹은 문학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조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한 몽규에게, 문학이란 독립운동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문학 중에서도 사람들의 투쟁심을 고취시키는데 적당한 '산문' 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시' 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폄하한다.  행동파답게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여기기에, 문학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것은 무조건 독립의 차순위 또는 독립을 위한 수단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주는 자신이 사랑하는 시가 그런 식으로 평가절하당하는 것에 화가 난다.  그리고 몽규가 자신과는 달리 이미 세상에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면서도, 그 재능을 순수하게 펼치는 게 아니라 오직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만 쓰는 데에도 화가 난다.  

   

  강처중 : (몽규가 중심이 되어 발행하는 문예지에 실을 글을 고르면서) "시는 동주 것 말고는 실을만한 게 없어."
  송몽규 : "자기 생각 펼치기에는 작문이 좋티.  시는 가급적 빼라."
  윤동주 : (방 한쪽 구석에서 따로 책을 보다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들어 몽규를 보는)
  송몽규 : "인민을 나약한 감상주의자로 만드는 거이 문학 아니라."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 사소한 일이 곧 큰 갈등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소한 일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 사소한 일은 갈등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 그 동안 두 사람이 마음 속에 묵혀두었던 것들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문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그리고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고 그렇지 못 하는 행동력의 차이...  그 동안 서로 뻔히 알면서도 조심스레 피하며 각자의 마음 속에만 묻어만 두었던 것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두 사람이 경성의 학교로 진학한 뒤로, 동주는 몽규와 달리 표준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그런 동주가, 그것도 원래 내성적이고 조용하던 동주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끝에서는 무심코 사투리로 말을 할 지경이다.


  송몽규 : (자신을 비판하는 동주에게) "와?  시를 빼자고 해서리?  내레 이 문예지를 하는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어.  시를 무시해서리 하는 이야기가 아이야."
  윤동주 : "시도..." (감정이 북받쳐 말이 끊기는) "...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살아있는 생각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받는 거고, 그 힘이 하나 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송몽규 : "그런 힘이 어드렇게 모이는데, 어?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리 문학 속으로  숨는 것 밖에 더 되니?"
  윤동주 : "문학을 도구로 밖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문학을 이용해서 예술을 팔아서 뭐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누가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송몽규 : (답답하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탁 놓아버리는)
  윤동주 : "애국주의니 민족주의니, 뭐 공산주의니, 기딴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거, 그거, 그거이 관습을 타파하는 일이야?  그것이야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려고 하는 썩어빠진 관습 아니겠니!"
  


  두 사람이 일본으로 유학간 뒤로도 이런 미묘한 상황은 계속된다.

  함께 일본의 명문대학인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쳤는데, 몽규만 합격하고 동주는 낙방한 후 차선책으로 다른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동주는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일본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몸짓을 보이지 못 하고, 그렇다고 아예 순응하지도 못 한 채, 그런 고뇌를 계속해서 시로 풀어낸다.  동주가 그렇게 도쿄에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 동안, 몽규는 교토에서 지금껏 그랬듯이 계속 독립에 대한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며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해서 항일단체를 조직한다.

  동주는, 몽규가 여러 일을 자신보다 먼저 이루고 자신이 엄두도 못 내는 일에 과감히 투신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독립운동에서 은근히 떼어놓으려는 것에 더욱 자괴감을 느낀다.  몽규로서는 세상의 거친 풍파에서 동주를 보호하려 그랬던 것 같다.  너무 깨끗한 동주는 험한 일을 감당하지 못 할 것이기에, 동주를 위해 일부러 동주를 독립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우유부단한 자신의 처신에 부끄러움을 느끼던 동주에게는, 그런 몽규의 배려조차 열등감을 깊어지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동주의 내적 갈등조차 사치로 느껴질만큼, 시대는 점점 더 광기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동주는 모처럼 자신의 고뇌를 이해해주고 능력을 인정해주는 좋은 일본인 스승과 여학우를 만나, 잠시나마 작은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막바지 시기에 궁지에 몰릴대로 몰려 독만 잔뜩 남은 일본은, 동주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동주는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에게 모욕당하고, 시인으로서 군국주의자들에게 짓밝힌다.  일본군인에게 강제로 잘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라 섬세하고 연약한 영혼의 조각이다.

  몽규에게 한 말처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게 된 동주는, 대학을 바꿔가면서까지 몽규가 머무는 교토로 가서 몽규의 일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게 아니라 벼랑 끝에 내몰린 상태에서 무너져내리는 정신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참여한 것이다.  동주처럼 섬세한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는, 식민지 체제와 전쟁이라는 끔찍한 현실도, 그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독립운동도, 너무 버겁기만 하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데, 이 장면이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으로 표현된다.

  먼저 몽규와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의 비밀 집회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몽규가 동주의 하숙집 앞에 와서 동주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몽규의 태도를 보면, 일본 경찰의 검거를 운좋게 피해 도망쳤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만일 그렇더라면 무척 다급하게 일본 경찰에게 들켰으니 어서 도망쳐야 한다고 말했을텐데, 그저 안타까운 눈빛과 말투로 막연하게 함께 떠나자고만 할 뿐이다.  그리고 동주 역시 그런 몽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지치고 메마른 눈빛과 말투로 먼저 가라고, 자신은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말하며 냉정히 창문을 닫을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두 사람은 세상을 뜬다.

  평생 돈독한 관계였으면서도 사고방식과 성격의 차이로 갈등을 겪으며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 결국 같은 곳(후쿠오카 감옥)에서 같은 방식(생체실험)으로 죽었다는 것도,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 암울한 시대에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진취적인 사람도, 세상에 휘둘리는 연약한 사람도, 결국 그 시대에 집어삼켜질 뿐인 걸까...   

 



   기타

 

  영화 분위기는 의외로 잔잔하고 따뜻하다. 

  감상문을 쓰다 보니, 식민지라는 어두운 시대와 두 젊은이의 짧은 인생이 몇 번이나 강조되어 무척 음울한 영화인 것처럼 써놓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따뜻하고 잔잔한 느낌이 드는 영화다.  물론, 새드엔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음울한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영화가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접어들면서(일본 유학을 전후한 시기), 윤동주의 시가 나레이션으로 깔리는 횟수가 늘어난다.

  나레이션으로 깔리는 시와 그 시가 나올 때의 장면이 너무 잘 어울려서, 윤동주가 정말로 저런 상황에서 저 시를 썼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보니, 윤동주의 시 대부분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쓴 시라고 한다.  그저, 영화 속에서 윤동주의 여러 시와 잘 어울리는 장면에 그 시를 대응시킨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대본상의 설정 또는 연출상의 기교라는 건데, 기막히게 잘 짜맞췄다.  

 

  그리고 동주와 몽규 모두 처음에는 평안도 사투리를 썼는데,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동주는 표준어를 구사한다.

  사실, 영화를 볼 때에는 동주가 언제부터 표준어를 구사하는지 알아채지 못 했다.  일본의 술집에서 몽규가 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동규가 찾아온 장면에서야, 겨우 동주가 표준어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영화를 다운받아서 다시 봤는데, 그제서야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동주가 표준어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째서 몽규는 그대로인데 동주만 말씨가 바뀐 걸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시를 사투리로 읊는 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한다. (하긴, 평안도 사투리로 읊는 '서시' 는 상상하기 힘듦. ^^;;)

  동주만 표준어를 쓰게 되는 것은 감독이 의도한 바 말고도, 의외의 다른 효과도 나타낸다.  아무래도 평안도 사투리가 억센 느낌이 들다 보니, 몽규처럼 강인하고 냉철하고 행동력 있는 캐릭터에게 잘 어울린다.  반대로 동주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캐릭터에는 다소 나약한(?) 느낌이 드는 표준어가 더 잘 어울린다. 


  이 영화에서는 신연식 감독의 향기(?)가 느껴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앗!' 했던 장면이 있다.  동주가 갇힌 감옥의 창살 사이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이고, 은은한 음악을 배경으로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이 나래이션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이 신연식 감독의 영화 '조류인간' 속 한 장면과 흡사하다.  깊은 산 속 별이 잔뜩 들어찬 밤하늘에 기타로 연주하는 '알함브라 궁의 추억' 이 배경으로 깔렸던 장면이다. (사실 '조류인간' 을 무척 지루하게 봐서 몇몇 장면만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기억하는데, 이 장면도 그런 장면 중 하나임.)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궁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부당거래', '사도' 등으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이다.  그래서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표절(?)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제작 및 각본을 신연식 감독이 맡았다.  그래서 신연식 감독의 분위기도 묻어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