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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비극 - 피로인, 환향인, 환향녀

Lesley 2015. 5. 27. 00:01

 

  환향인(還鄕人)환향녀(還鄕女)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을 말함.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환향인이나 환향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함.  다만, 이 포스트에서는 편의상 환향인과 환향녀라는 말을 쓰도록 하겠음.

 

  ※ 이 포스트는 주로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을 참조해서 쓴 것임.  그 외에, 경향신문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조선왕조실록 국역본도 참조함.

 

 

 

1. 무능한 국가에게 보호받지 못 한 피로인

 

 

  ◎ 피눈물 흘리며 청나라로 끌려간 50만명의 피로인

 

  병자호란은 기간으로만 따지자면, 임진왜란과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짤막한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으면서 시작해서, 다음해인 1637년 1월 30일에 끝났다.  임진왜란이 만 6년 반이나 이어졌던 긴 전쟁이었던 것에 비해, 병자호란은 발발한지 만 2개월도 안 되어 끝났다. 

  하지만 조선에 미친 영향을 보자면, 병자호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의 경우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큰 피해를 입었다지만, 어쨌거나 일본군을 격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국왕인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병자호란이 조선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조선은 여러가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선, 패전국으로서 전쟁배상금 성격의 엄청난 공물을 청나라에 바쳐야 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을 유린했던 청나라에 협조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사와 식량 등을 보태야 했다.  또한, 자주국가의 기본 권리라 할 수 있는 국방 관련 업무(성곽 증축 및 수리 등)를 청나라의 허락 없이는 못 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왕자들과 여러 대신의 자제가 인질로 끌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잔인했던 것이 '피로인(被虜人 또는 被擄人, '붙잡힌 사람' 이라는 뜻임.)' 에 관한 조치였다.

  피로인은 전투 중에 붙잡힌 군사들을 제외한, 처음부터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붙잡은 민간인들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전투와는 직접적인 상관 없이, 처음부터 노예로 부리거나 몸값을 받아낼 생각으로 인간사냥(!)에 나서서 붙잡은 민간인 포로를 말하는 것이다. 

 

  청나라 태종(홍타이지)은 조선 인조에게 항복을 받으면서 피로인에 대해 못을 박았다.

  즉, "압록강을 건너 한 발자국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도망을 친다면, 조선이 그들을 붙잡아 청나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 고 했다.  적군에게 붙들려 이국땅으로 끌려가게 된 것만으로도 원통해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도망을 쳐서 조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바로 그 조국에 의해서 다시 이국으로 넘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네 조정에 붙잡혀 청나라에 넘겨져야 하는 백성들이나, 자기 백성들을 붙잡아 청나라에 넘겨야 하는 조정이나, 모두 차라리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화론자로 유명했던 최명길(崔鳴吉)은, 병자호란 후 명나라에 보낸 문서에서 이 때 끌려간 조선 피로인 숫자를 약 50만명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약 150년이 지나 활약했던 실학자 정약용은 약 60만명으로 추정했다.  아무래도 최명길이 병자호란 당시의 사람이고, 또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사람이라 병자호란에 관련된 더 많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을테니, 최명길의 추산이 실제 숫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숫자가 많아야 150만명 정도였고,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침략하느라 끌고온 군사가 약 10만명(만주족 뿐 아니라 몽골족과 한족을 포함한 군사 숫자임.)이었다.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자기네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며 조선을 침략한 군사수의 5배에 달하는 조선인을 잡아간 것이다.  말 그대로 갈퀴로 긁는 것처럼 닥치는대로 잡아간 것이다. 

 

  인조는 조선왕조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타국에 항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우선, 청나라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림.)의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태종이 군사들을 이끌고 청나라로 돌아갈 때는 배웅까지 나가야 했다.  한 나라의 왕이 침략군을 귀한 손님 대하듯 공손하게 배웅해야 하다니, 치욕도 이만저만한 치욕이 아니다.

 

  하지만 이 때 인조가 겪은 치욕도, 피로인들이 겪은 참담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금에 비하면 인권이란 개념이 없다시피 했던 그 시절, 붙잡힌 패전국 백성들은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  나만갑(羅萬甲)은 병자호란 때 병조참지 겸 공조참의의 직책을 맡아, 인조가 피난을 간 남한산성의 군량미 공급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의 일을 기록한 병자록(丙子錄)이란 책을 남겼는데, 이 책에 인조가 태종에게 항복하러 갔던 때와 철수하는 태종을 배웅하러 갔을 때 본 피로인의 참상을 기록했다.

 

"적진 가운데 조선 피로인이 절반이나 되는데, 그들이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면 청나라 군사들이 철퇴로 때려,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서강(현재 서울 마포구 일대 한강의 지류)을 오가며 적진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벌써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화살에 맞아 아직 목숨이 끊기지 않은 상태고, 어떤 이는 전하(인조)를 쫓아오다가 잡혀가고, 또 어떤 이는 전하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비는 등 비참한 장면 뿐이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태종의 뒤로, 청나라 군사들이 피로인 수백 명씩을 한 단위로 해서 묶어 끌고가는 모습이 온종일 반복되었다.

  인조는 자기 백성들이 짐승 마냥 끌려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궁으로 돌아갈 때 일부러 다른 길로 갔다.  붙잡힌 백성들은 그래도 자기 나라 왕이 찾아왔으니 자신들을 어떻게든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왕을 쫓아오고 왕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왕은 도망치듯이 다른 길로 가버릴 수 밖에 없었다.  

 

 

 

  ◎ 천정부지로 치솟는 피로인의 몸값 / 죽는 날까지 귀국할 수 없었던 수많은 피로인

  

  그렇게 비참하게 끌려간 피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은 속환(贖還) 밖에 없었다. 

  즉, 몸값을 치르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풀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조선 조정이 몸값을 대신 수납해서 청나라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피로인의 가족이 직접 청나라 심양(당시 청나라의 수도)까지 가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로인 가족 입장에서 보자면 거액의 몸값을 마련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왕복 여행비 및 체재비를 장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공식적인 속환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1637년 5월에 청나라 심양에서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군사들이 아직 조선에 머물고 있을 때부터 속환이 이루어졌다.

  청나라 고위층에서는, 자신들이 청나라로 돌아간 후에 속환을 시작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 중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 또는 피로인을 청나라까지 끌고가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조선에서 철수하기 전에 암암리에 피로인의 가족에게 돈을 받고 피로인을 넘겼다.

  그리고 이 '비공식적인 속환' 때만 해도 속환금, 즉 몸값이 비교적 낮았다.  보통의 경우 남자 피로인은 은 5냥, 여자 피로인은 은 3냥이었고, 몸값이 높은 경우에도 은 10냥을 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서 몸값이 낮다는 것은, 몇 달 뒤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었을 때의 몸값에 비해서 낮았다는 뜻이다.  대다수 백성들에게 은 5냥과 은 3냥은 결코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그 당시 은 5냥과 은 3냥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역사평설 병자호란' 이나 다른 참고자료에는 설명이 없다.

  다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병자호란으로부터 약 70년 뒤인 숙종 시대 물가에 대한 자료가 있다.  숙종 시대에 은 1.25냥이 상평통보 5냥(약 140킬로미터짜리 쌀 1석 가격)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인조 시대 물가와 숙종 시대 물가가 비슷했다고 가정한다면, 남자 피로인의 몸값은 쌀 4석, 여자 피로인의 몸값은 쌀 2석 반 정도 된다.  

  숙종 시대에 정승이 1년간 받는 녹봉이 쌀 100석이었다고 하니, 한달에 8석 조금 더 받은 셈이다.  조정의 신하 중 최고위직이라는 정승의 한달 급여도 쌀 8석을 겨우 넘는 정도인데, 평소에도 입에 풀칠하기 바쁘고 전쟁까지 겪어서 그나마 가진 것도 잃은 수많은 백성들에게, 쌀 4석 또는 2석 반에 해당하는 몸값은 부담스러웠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 썼듯이 그 몸값이 그나마 낮은 편이었고, 일단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자 몸값은 미친 듯이 뛰었다.

 

  5냥이니 3냥이니 했던 몸값이, 수백냥에서 심한 경우 천냥 이상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겨우 몇 달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몸값이 100배 이상 뛰어올랐을까?  물론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자면야, 가족간의 애끓는 정을 이용해서 떼돈을 벌려는 청나라 사람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 고위층의 부적절한 처신도 한몫 했다.  평범한 백성들과는 달리 재산이 넉넉했던 고위직 신하들이, 자기 가족을 하루 빨리 속환하고 싶은 마음에 엄청난 몸값을 아낌없이 지불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다가, 일이 틀어져서 가족을 영영 잃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또한 명문대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귀하게 자란 자기 가족이 적국에서 온갖 고생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빨리 속환해주려 했다.

 

  그런 사람들이 공식적인 속환 절차를 밟지 않고, 청나라 관리들에게 따로 줄을 대며 피로인의 소유주에게 웃돈을 얹어줬다.

  조선과 청나라의 교섭으로 정해진 '공식적인 적정 가격' 은 25~30냥이었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가 첩에게서 얻은 딸을 속환하겠다고 1,000냥을 부르는가 하면, 병조 사령 신성회는 600냥을 냈다.  공식적인 가격의 수십배나 지불한 것이다.

  제일 엄청난 예가 좌의정 이성구인데, 아들 몸값으로 무려 1,500냥이나 썼다!  위에 언급한 숙종 시대 물가로 환산하면 쌀 1,200석에 해당한다.  정승의 1년 녹봉이 쌀 100석이라고 했으니, 이성구가 좌의정 자리에 12년이나 있으면서 한 푼도 안 써야만 겨우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또한 조선시대 좌의정에 해당하는 현재의 부총리 연봉이 약 1억 2천만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성구는 현재의 화폐로 약 14억 4천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한 것이 된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빨리 구하고 싶은 마음이야 누가 이해 못 하겠느냐만은...

  일부 고위층에서 거액을 아낌없이 지불하자, 청나라 사람들은 너도 나도 조선 피로인들에게 높은 몸값을 매기게 되었다.  시쳇말로, 조선 피로인은 봉이 되고 피로인의 가족은 호구가 된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던 백성들은 아무리 기를 써도 붙잡힌 가족의 몸값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보다 못한 최명길(위에서 피로인 숫자를 50만명으로 추정한 주화파 대신)이 가족을 돌려받지 못 하는 한이 있어도 1인당 몸값을 100냥 이상은 내지 말자고 주장했다.  모두가 몸값을 100냥 미만으로만 내도록 담합(?)한다면, 피로인 전체의 몸값이 낮아져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속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명길의 주장은, 미천한 백성들의 자식이야 어찌되거나 말거나 나의 귀한 자식부터 구해야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고위층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런 몇몇 고위층 인사들의 행태가 피로인의 전반적인 몸값을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평범한 백성들은 붙잡힌 가족의 몸값을 구할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고위 공직자란 사람들이 국가 전체의 상황보다는 자기 집안의 일만 챙기며, 많은 피로인이 귀국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좀 의외였던 게, 피로인 속환을 피로인의 가족들에게만 맡겨둔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도 나섰다는 점이다.

 

  조정에서 나랏돈을 들여 몸값을 내주고 피로인의 속환을 추진한 것이다.  이것을 공속(公贖)이라고 한다. 

  국가가 피로인들을 챙기려 애썼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칭찬받을만한 일인데...  문제는, 끌려간 사람은 많은데 공속의 대상자는 소수였다는 점이다.  공속의 대상자는 세 종류였다.  ① 왕족, ② 피난 떠나는 인조를 호종했던 신하 및 남한산성을 수비했던 군사, ③ ②의 경우에 해당하는 신하 및 군사의 가족이었다. 

 

  공속 대상자가 그렇게 적었던 이유는 국가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져서 청나라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하고, 그나마 국가 소유 창고에 있던 식량이나 각종 재물은 청나라 군대가 쓸어가다시피 했고, 앞으로 전후복구에 쓸 비용도 엄청나니, 조선 조정에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왕족이야 신분제 사회에서 최상위 계층이며 국가의 주인인 왕의 친척이니, 그 시절 기준으로 봤을 때 일순위로 구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인조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다 포로가 된 신하 및 군사는 공속의 대상이 아니고, 인조 곁에 있다가 포로가 된 신하 및 군사만이 공속의 대상이라니, 참 불공평해 보인다.

 

  결국, 고위층 출신 또는 특수한 상황의 피로인을 제외하면, 대다수 피로인에게는 귀국할 수 있는 길이 원천봉쇄 되었다.

  불가능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발 몸값을 모아 자신을 구해달라고 고향에 연락해야 하는 이도, 그 애절한 연락을 받고도 몸값을 마련한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가족도, 모두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와중에 동포들의 불행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악질 상인들의 경우를 보자면...

  일부 상인들이 '사람장사' 에 두 팔 걷어부치고 나섰다.  그들은 먼저 청나라에 가서 피로인을 비교적 낮은 가격에 샀다.  상인이라 흥정에 익숙하기도 하고 또 피로인을 대량으로 매매했기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몸값을 치룰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되었거나 그렇게 산 피로인을 조선에 데리고 와서, 피로인 가족에게 비싼 가격으로 넘겨서 차익을 챙겼다. 

  심지어 청나라에서 이미 몸값을 치르고 귀국하던 피로인을 중간에 납치해서, 그 가족에게 다시 몸값을 받아내는 경우까지 있었다.  차라리 청나라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야 원래 청나라 사람이 적이라 어쩔 수 없다 치고, 동포에게까지 핍박 받았던 피로인과 그 가족의 심정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관료들이 피로인 가족의 애타는 마음을 이용해 뇌물을 받아 챙기는 일도 있었다.

  조선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청나라땅에 자기 가족이 끌려갔는지를 확인하려면, 청나라 조정에서 조선 조정에 보낸 피로인 명단을 봐야 한다.  그런데 가족을 찾는 애끓는 심정을 이용해서, 일부 관료가 피로인 명단을 보여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은 것이다.

  드라마 '환향 - 쥐불놀이' 에 나온 이방도 그런 못된 하급관리 중 하나다.  ☞ 단만극 모음 : 원녀일기 / 환향 - 쥐불놀이 / 곡비(哭婢)(http://blog.daum.net/jha7791/15791166)  그 이방은 공무 때문에 청나라를 오가면서, 청나라에 끌려갔던 같은 고을 여인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조선에 남아있던 남편에게는 아내가 살아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 생활비를 몇 년이나 가로챘다. (도대체 어려서 뭘 먹고 커야 이렇게 뻔뻔스럽게 자랄 수 있는 건지, 정말로 궁금함...!) 

 

 

 

  ◎ 백성이 끌려가는 것을 막아줄 힘이 없었던 조정은, 탈출한 백성을 지킬 힘도 없었다.

 

  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피로인 중 일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청나라를 탈출해서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노비로 부리던 청나라 주인과 국경을 지키는 청나라 병사들만 피한다고 해서, 탈출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우 도망쳐 압록강을 건넌다 한들 조선 군사들의 눈에 띄면, 조선과 청나라의 약조에 의해 청나라에 다시 넘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청나라로 다시 끌려간 사람들은, 도망친 것에 대한 대가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정말로 발뒤꿈치를 잘라냈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는 도망치지 못 하게 아킬레스건을 잘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는 뜻임.) 

  그러니 불법적(!)으로 도망쳐서 돌아온 피로인들과 그 가족이 왕과 조정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병자호란이 끝나고 4년 후인 1641년에 유례없는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 사이에 "청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붙잡아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하늘이 노해서 벌을 내린 것이다." 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이도 일부러 붙잡아 돌려보내는 판국에, 압록강까지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하는 이들을 순순히 입국시킬 리는 만무했다. 

  도망친 피로인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겨우 압록강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작 조국의 관리와 군사들이 받아주지 않았으니 그 절망감이 엄청났을 것이다.  결국에는 꿈에 그리던 조국땅을 바로 앞에 두고서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1642년에 하진(河溍)이란 신하가 심각한 민심이반 및 해이해진 국가기강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에는 압록강 근처에서 벌어지는 도망친 피로인의 비극이 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사로잡혀 간 사람이 고향이 그리워서, 산 넘고 물 건너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돌아와 그 부모와 처자를 만납니다.  하지만 슬픈 마음으로 위로하는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그 사람을 다시 청나라로) 잡아 보내는 일이 곧 뒤따릅니다.  그런데도 (피로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부모가 계시는 나라니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며 서로 뒤를 이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압록강가에 당도하면, 변방의 장수는 국법을 꺼리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밤낮으로 (도망친 피로인을) 막고 지키면서 그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강가에서 통곡하며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거나 목을 매어 죽거나 혹은 굶어서 죽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창성(昌城)과 삭주(朔州) 지방의 강줄기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습니다.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이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으며, 그 부모와 처자들이 길거리에서 소리쳐 통곡하며 가슴이 막혀 허둥대는 모습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사대부 남자들의 이기심에 희생당한 환향녀

 

 

  ◎ 강화도 함락 중 벌어진 비극

 

  전쟁 중에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비참한 일을 겪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했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히기 전, 즉 피로인의 신세로 전락하기도 전에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가혹한 일을 겪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왔을 때, 남자들에게는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포로의 처지가 되어서라도 살아남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사대부 같은 상류층 여자들에게는 그런 최소한의 생존 기회조차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정조를 잃는 일이 없도록 자살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는 많은 왕실 사람들과 사대부들이 머물고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조정에서는 한양이나 그 근처에 살던 왕실 및 사대부의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난가게 했다.  조정은 물론이고 민간의 많은 사람들도, 고려시대에 몽골이 침략했을 때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오랫동안 버텼으니, 이번에도 강화도로 가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던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으로, 강화도는 공격을 받은지 겨우 며칠만에 허무하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여자들에게 생지옥이 벌어졌다.

 

  잠시 삼천포로 빠져서, 김경징에 대해 설명하자면...

 

  김경징 같은 형편없는 인물이 인조의 아들, 며느리, 손자 등 중요인물들이 피난간 강화도를 책임지게 된 이유는, 소위 '빽' 때문이었다.

  김경징의 아버지가 김류다. (위에서 언급한, 피로인들의 몸값을 엄청나게 올리는데 한몫 한 바로 그 영의정 김류.)  당시 김류는 영의정이었던데다가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이기까지 해서, 인조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런 김류가 자기 아들이 강화도 수비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하자, 인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한 것은 '낙하산 인사' 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된 셈이다. 

 

  김경징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날 때부터 물의를 일으켰다.

  가뜩이나 부족한 배를 자기 집안 식구와 재물을 옮기는 데에만 쓰느라, 세자빈을 바닷가 찬바람 속에 한나절이나 내버려두는 등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세자빈이 화를 내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세자빈 등 신분 높은 사람들에게 배를 내주었다.  그러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배를 타지 못 해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 했다.  결국 뒤에 남은 그 사람들은, 강화도 공격을 위해 강화도 맞은 편 육지에 도착한 청나라 군사들에게 일차적으로 희생되었다.

 

  김경징은 강화도로 들어가서도 술잔치로 흥청망청 지내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강화도로 피난을 한 봉림대군(훗날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효종)과 몇몇 신하들이 보다 못 해서, 강화도의 수비상태가 너무 허술하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경징은 검찰사라는 직위를 내세워 봉림대군과 신하들을 윽박지르며 그런 의견을 무시해버렸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 근처까지 몰려온 상황에서도 김경징이 이토록 안일하게 행동한 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만주족은 기마민족이라 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날지 않는 한 절대로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오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마민족이라도 몽골족과 다르게 만주족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해적 노릇을 한 기록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바다에 익숙한 편이었다.

  게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무려 280여 척이나 되는 배와 수만 명의 군사로 구성된 명나라 수군이 통째로 청나라로 투항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조선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 수군이 청나라에 투항하는 걸 막으려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 군대가 명나라 군대와 함께 그 수군을 추격하여 전투까지 벌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이미 수군이 생겼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청나라 군대가 절대로 바다를 건너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다니,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김적이란 사람이, 청나라 군대가 산의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강화도 앞바다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그러자 김경징은 뒤늦게라도 전투 준비에 나서기는커녕, 김적이 허황된 정보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면서 김적의 목을 베겠다고 펄펄 뛰었다.

 

  결국, 강화도는 제대로 된 전투 준비 없이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김경징은 우왕좌왕 하다가 싸우는 시늉 정도는 하더니, 결국에는 배를 타고 도망쳐버렸다.  왕의 아들, 며느리, 손자 등 중요인물들이 청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도록 내버려둔 채...  그리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적군과 싸우는 군사들과 하급무관들을 내팽개친 채...

 

  병자호란이 끝난 후, 김경징을 참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정공신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그리고 김경징 스스로도 반정공신이였음.)을 처단하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재야에서까지 김경징을 참수하라는 분노의 여론이 계속되자, 결국에는 김경징을 사형시켰다.  다만, 여론이 원했던 참수가 아니라, 한 단계 아래인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으로 끝냈다.  김경징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비하면 약한 벌을 받은 셈이다.

 

 

  김경징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으로 강화도가 맥없이 함락되자, 많은 여자들이 청나라 군사를 피해 바다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고 죽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바다에 투신을 했는지, 연려실기술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 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스스로 자살을 택한 여자들은 차라리 나은 경우에 속했다.

  남자들의 강요로, 자살 아닌 자살을 해야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낙하산' 김경징 집안의 여자들이었다.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비열한 사람이었다.  청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자신의 아내는 물론이고 어머니(김경징의 아내)와 할머니(김경징의 어머니이자 김류의 아내)까지 협박하여 목숨을 끊게 했다.  차라리 가족 모두 함께 죽자는 것이었으면 그나마 말이 된다.  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아내, 어머니, 할머니 등 여자들에게만 자살을 강요한 것이다.  그런 패륜을 저지르고는, 정작 김진표 자신은 강화도에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김류에, 김경징에, 김진표에... 도대체 이 집안 남자들은 3대에 걸쳐 왜 전부 이 모양 이 꼴인가...)

 

  여자들은 자기들이 고통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식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 것까지 봐야 했다.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곁에 있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자를 강간하거나 납치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청나라 군사들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아이들을 함부로 내팽개치거나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강화도가 함락될 때의 상황을 기록한 강도록(江都錄) 등의 책에는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었다.' 라든지 '눈 위를 기어다니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는 비참한 기록이 남아있다.

 

 

 

  ◎ 여자 피로인의 고통

 

  피로인이 되어서도, 여자 피로인들은 남자 피로인들보다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잖아도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에 저항하다가 살해당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청나라 군대 안에서 여자 쟁탈전까지 벌어졌다.  즉, 하급자가 차지한 여자를 상급자가 빼았는다든지, 아니면 한족 군사(원래는 명나라 사람인데, 청나라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혀 청나라 군대에 편입된 이들)가 차지한 여자를 만주족 군사가 빼았는 경우가 속출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번갈아가며 넘겨지는 과정에서 강간 피해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청나라로 끌려간 후에 또 다른 참담한 일을 겪게 되었다.

  청나라 장수들이 끌고간 조선 여자들을 첩으로 삼자, 그 청나라 장수들의 본처들이 질투심 때문에 조선 여자들을 학대했다.  조선 여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기막힐 노릇이었다.  자신들이 원해서 청나라 장수의 첩으로 살게 된 것도 아닌데, 그 일로 그 장수 본처에게 괴롭힘까지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괴롭힘이라는 것이, 그저 욕을 하거나 몇 대 때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펄펄 끓는 물을 끼얹거나 쇠로 만든 채찍으로 구타하는 등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악행을 일부 잔인한 사람만 벌인 게 아니라 제법 많은 이들이 저질렀던 것 같다.  청나라 조정에서 그 문제가 논의될 정도였으니,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 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조선 여인들을 계속해서 학대하는 본처는, 남편이 죽을 때 순장시키겠다." 고 경고했다.  어찌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애초에 청나라 군대가 그 여자들을 끌고가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들이 그런 고통을 겪을 일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하면, 당시 조선 여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참혹했으면, 조선 여자들을 끌고간 태종까지 나서서 제동을 걸었을까 싶기도 하다.

 

 

 

  ◎ 환향녀 - 남존여비의 시대가 낳은 비극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용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환향녀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고국으로 돌아온 피로인들을 환향인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여자 환향인을 환향녀라고 하자면...

 

  환향인치고 몸과 마음이 성한 이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 중에서도 환향녀들의 처지는 남자 환향인들보다 몇 배나 비참했다.

  남자 환향인들이야 고향으로 돌아오면, 과거의 고통을 뒤로 한 채 다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환향녀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여자' 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특히, 체면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대부 집안에서 그런 일이 많이 생겼다.  아내나 며느리가 청나라 군대에 붙잡혀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환을 해주지 않거나, 혹은 최소한의 도리로 속환까지는 해준 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 해인 1638년, 한 여자를 둘러싸고 두 고위직 신하가 상반된 호소문을 조정에 냈다.

 

  문제의 여자는 장선징의 아내인 한씨 부인이었다.

  그리고 호소문을 쓴 두 사람은, 한씨 부인의 친정아버지인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과, 한씨 부인의 시아버지인 전 우의정 장유(張維)였다. (참고로, 장유는 인조에게는 사돈이며,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에게는 장인이었음.)  친정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인 승지를 지냈고 시아버지는 부총리에 해당하는 우의정을 지냈으니, 만일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한씨 부인은 명문가의 마나님으로 평생 동안 호강하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중에 그만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혔다가 어찌어찌 하여 속환되었다.

  그러자 시아버지 장유는 속환된 며느리가 정조를 잃었을테니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면서, 아들 장선징과 며느리 한씨 부인이 이혼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호소했다.  반대로 친정아버지 한이겸은 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니 이토록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이혼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양쪽 모두 쟁쟁한 고위급 대신이니, 인조는 어느 한 편을 들어주기가 곤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그 일에 대해 의견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위에서 몇 번 언급한 최명길(그 당시는 영의정이었음.)이 나서서 이혼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인조도 최명길의 의견이 옳다면서, 장선징과 한씨 부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최명길이 한 주장을 살펴보자면...

 

"신이 옛 노인들에게 들으니, 선조대왕 시절인 임진왜란 후에 전교가 있었는데, 지난해 성상의 전교와 서로 부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전하는 바로 말한다면,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관이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돌아오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 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상이나 조관(朝官) 중에,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히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전에 청나라 심양에 갔을 때, 사대부 사람 중에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이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린다면, (붙잡힌 아내를) 반드시 속환하겠다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원을 이루더라도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 모르겠습니다."

 

  즉, 최명길은 이혼 반대의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번째 근거로 임진왜란 후에 있었던 비슷한 전례를 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에게 붙잡혔다가 돌아온 여자들의 이혼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국왕인 선조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야첨재라는 책에는 그 일에 대해 "이것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자 스스로 원해서 간통을 저지른 것' 과 '전쟁 중 강간을 당한 것' 은 완전히 다른 경우니,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번째 근거로 인간의 심리와 정리를 들었다.  이혼을 허락한다면, 남자들이 붙잡힌 아내를 어떻게든 구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새 장가를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여자들이 이국에서 한을 품고 죽을 것이니, 이혼은 옳지 못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최명길의 말을 읽어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엄연히 피해자인 여자들을 정조를 잃었네 절개를 잃었네 하며 내쫓으려 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 여자들이 그런 처지가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조선 고위층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위층에서 앞장서서 이혼을 요구했으니 뻔뻔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봤을 때 최명길의 말이 옳다는 것일 뿐, 그 당시 사대부 중에는 최명길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최명길이 한 말 바로 아래에 '그러나 그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환향녀와) 다시 합치는 자가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환향녀를 감싸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최명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위에 소개한 최명길이 한 말에 대한 사관의 평이 적혀있다.  그런데 읽어 보면 거의 인신공격 수준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이미 의리가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 때가 딱딱한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며 읽어도,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본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분을 보면, 환향녀들이 원해서 붙잡히고 강간당한 게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알지만, 어쨌거나 자살을 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큰 죄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이혼당하는 것을 막은 최명길은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 즉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을 몹쓸 오랑캐 나라로 만들어버린 천하의 악당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던 저 문제가, 몇 년 후에 다시 불거졌다.

  장유가 세상을 떠난 후, 이번에는 장유의 아내가 조정에 호소문을 낸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는 속환된 며느리의 정조 문제를 운운하는 대신 '며느리의 성품이 나빠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는 새로운 이유를 들고 나왔다.  먼저번에 인조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잡혔다가 속환되었다는 이유로 이혼할 수는 없다' 라는 왕명을 내렸기 때문에, 똑같은 이유로 다시 호소문을 내면 왕명을 무시하는 모양새가 될까봐 그랬던 것 같다.  

  죽은 바깥사돈이 그토록 원했고 또 이제는 안사돈까지 간청하니, 인조도 계속 거절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결국 인조는 애매모호한 결정을 내렸다.  장유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이며 아들이 하나 밖에 없으니, 장유의 아들에 한해서만 이혼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  분명히 장유의 아들에 한해서만 이혼을 허락한다고 했지만, 한 번 예외를 두기 시작하자 너도 나도 그것을 기화로 이혼에 나섰다.  그 전에도 지엄한 왕명 때문에 정식 이혼을 못 했을 뿐, 속환된 아내나 며느리를 소박 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정식으로 갈라설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 '환향녀' 와 '화냥년' 의 관계

 

  흔히, '화냥년' 이라는 욕은 병자호란 때의 '환향녀' 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그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라는 뜻이었던 환향녀라는 단어가,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던 그 시대의 악습 때문에 죽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욕하고 멸시하는 뜻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딱딱한 '환향'이라는 말에 음운변화가 생겨 '화냥' 으로 바뀌고, 또 여자를 뜻하는 평범한 말인 '녀' 가 여자에 대한 욕설인 '년' 으로 바뀌면서, 최종적으로 '화냥년' 이란 단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포스트를 쓰면서 찾아보니, 그런 화냥년의 어원이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가 적혀 있지 않아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화냥년이라는 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병자호란 때 생긴 환향녀란 말에서 화냥년이란 욕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환향녀라는 말이 화냥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환향(還鄕)이란 단어의 뜻이 '고향으로 돌아오다' 이니,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의 상황에 들어맞는 단어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향에 돌아오다' 를 한자어로 표현할 때 귀향(歸鄕)이라고 했지, 환향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귀향녀' 라고 하지 않고 '환향녀' 라고 한 것은, 그 전부터 존재했으며 발음이 비슷한 '화냥년' 이라는 욕과 연관지을 의도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살하지 않고 귀향한 여자들을 음탕한 여자로 매도하려고, 일부러 화냥년과 발음이 비슷한 '환향녀' 라는 단어를 굳이 새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주장을 정리하면 '환향녀 → 화냥년' 이 아니라, 거꾸로 '화냥년 → 환향녀' 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 된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주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환향녀에서 화냥년이 나왔든, 화냥년에서 환향녀가 나왔든, 결국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혔다가 살아 돌아온 여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원흉으로 보고 손가락질 한 것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기는 모두 마찬가지인데, 같은 피해자끼리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주기는 커녕 한쪽이 다른 한쪽을 멸시하고 배척했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더구나 외적의 침입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굳이 따지고 들자면, '멸시당하는 쪽' 보다는 '멸시하는 쪽' 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기에 더욱 기막히다.  

 

 

 

3.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어진 피로인의 비극

 

 

  ◎ 28년만에 귀국했으나 고국에 적응할 수 없었던 피로인 

 

  인조의 손자인 현종이 재위하던 1664년, 안추원(安秋元)이란 사람이 무려 28년만에 청나라를 탈출해 귀국했다.

  그 전과는 다르게, 조선 조정에서는 안추원을 청나라로 넘기지 않고 조선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세월이 많이 흘러 청나라의 눈길이 그 전만큼 무섭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28년만에 고국으로 온 안추원의 사정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인지...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간 안추원이 새 생활에 적응하지 못 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청나라로 잡혀가서 오랜 세월을 그 곳에서 살았던데다가, 부모형제가 모두 죽어 고향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안추원은 차라리 익숙한 청나라로 돌아가서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돌아온지 3년 만에 압록강을 다시 건너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안추원이 붙잡힌 일로, 조선 조정이 도망쳐온 안추원을 숨겨주고 청나라에 넘기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러자 청나라는 조선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안추원 사건에 관련된 조선 조정의 신하들을 사형시키겠다며 따지는 소동을 일으켰다.  현종과 신하들이 서로 자기 잘못이라며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나서자, 청나라 사신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아마도 정말로 조선쪽 인사들을 사형까지 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청나라 조정을 두 번 다시 속일 생각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하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그렇게 그 일은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28년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살 수 없었던 안추원의 처지도, 그런 안추원을 숨겨주었다가 곤욕을 치른 조선 조정의 처지도, 무척이나 딱하고 안타깝다.

 

 

 

  ◎ 38년만에 돌아온 고국의 입구에서 다시 끌려갔던 피로인

 

  인조의 증손자인 숙종이 재위하던 1675년에 있었던 안단(安端)의 사정은 더 기막히다.

  바로 위에 나온 안추원의 사연을 보면, 시기만 잘 맞췄더라면 안단 역시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넘기지 않고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바로 그 시기를 잘 맞추지 못 했다는 점이다.  안단이 탈출해서 국경지역인 의주로 왔을 때, 하필이면 청나라 사신이 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의주의 관리는 청나라 사신의 시선 때문에라도 안단을 청나라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끌려간지 38년만에 겨우 탈출해서 고국의 입구까지 왔던 안단은, 다시 끌려가면서 "고국땅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보내는구나!" 라고 울부짖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안단을 붙잡았던 관리는 그 와중에도 청나라 정세에 대해 자세히 탐문했다.

  안단에게서 청나라 남쪽지방에서 벌어진 반란 및 청나라와 몽골 사이의 무력분쟁 등에 대해 자세히 묻고,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물론, 외국에 대한 정보를 구할 길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캐내는 것이 관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임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하고도 결국 청나라로 다시 압송되었던 안단의 심정은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안단을 청나라에 넘겨야 하는 관리 입장에서도,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단만극(2) : 환향 - 쥐불놀이(http://blog.daum.net/jha7791/15791166)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http://blog.daum.net/jha7791/15791167)

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http://blog.daum.net/jha7791/15791173)